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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Jun 23. 2022

첫 소설 - 다자이 오사무 따라 하기

어머니,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게 뭔지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한 세기가 지나간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제가 죽은 지 꼬박 백 년이 흐르고 나서야 이런 편지로나마 밝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보다 일찍 돌아가신 누님과 형님을 언젠가 한 번 뵌 적이 있습니다. 역시 잘 지내고 계시더군요. 그리고 동생. 이건 동생한테 보내는 편지입니다. 물론 편지라기보다는, 과거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한 독백에 가깝습니다.


두 분이 먼저 읽으시겠지만, 동생에게도 꼭 보여주세요. 형님과 누님께는 제가 따로 전하겠습니다.




1.


여기가 어딘지, 제가 어떻게 글을 쓸 수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젠 묻는 것도 지쳤습니다.


아, 걱정하지는 마세요. 기억을 더듬어 쓰고 있는지라 머리가 복잡할 뿐, 지난 백 년간 별일 없었습니다.

옛 친구들을 만나 추억을 나눈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 작가도 만났습니다. 다자이 오사무라고 하더군요.

첫인상은, 참 이상한 사람이다,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오해였나 봅니다.

단지 지나치게 솔직한 인간이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도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듯합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겠죠. 저 역시 그렇습니다.




2.


사후세계에서도 저는 '정상인'의 범주에 속하겠지만, 그건 그냥 시늉에 가깝습니다.

이쪽저쪽으로 살펴봐도, 가장 유별나고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존재는, 바로 저 자신입니다.

자의식 과잉, 나약함, 외로움 그리고 후회가 일상입니다. 모두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입니다.


그러나 여기 사람들은 제게 여유롭고 차분하다고 합니다.

물론 사실입니다. 그러나 진실은 아닙니다.

'진실'에는 '사실'이 담을 수 없는 맥락이 포함되어 있을 테니 말입니다.


평온함. 그건 편집된 모습입니다. 바람 앞의 등불에 불과합니다.


다만, 위태로운 여유로움일지라도 달콤한 것은 사실입니다.

꺼질듯한 등불을 부여잡은 채로, 읽고 읽고 또 읽다 보니 뭔가 쌓이긴 쌓였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이렇게 쓰고 있으니 그 나름대로 즐겁습니다.




3.


제가 살아있을 때는 어땠는지 기억이 나 않는군요. 다만 백 년이라는 시간과 누군지 모를, 어떤 사람의 삶을 기억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게 아마 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여 제가 일면식도 없는 엉뚱한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있어도 이해해 주세요. 사실은 과거의 추억이 타인의 것일지라도 상관없습니다. 어쨌든 저는 그 사람의 두 번째 삶―더 정확하게는 죽은 이후의 삶―을 살고 있고, 말하자면, 인생의 공동 저자, 뭐 그런 셈입니다.


지금부턴 살아생전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4.


어떤 사람에게는 '무관심'했고, 또 어떤 사람은 '무시'받는 듯한, 그런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무관심. 이건 지금까지도 여전합니다. 먼저 다가가는 게 너무 어렵습니다.


깔봄과 업신여김. 일부러 그런 것은 정말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딱히 변명할 수도 없습니다.

오해할 수 있는, 아니 오해 안 하는 게 이상할 정도로, 다듬어지지 않은 말과 행동은 '미숙함'의 징표입니다.

아는 것과 아는 척. '앎'과 '척'의 가늠자를 조절하는 일은, 제게 남겨진 과제입니다.




5.


어머니 아버지는 많은 고생을 하셨습니다.

자신이 겪은 고통과 후회가 자식들에게는 반복되지 않도록 애쓰셨습니다.


아, 그리고 저는, '노동'이란 게 뭔지 잘 모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삶이 꼭 즐거운 것만은 아닌듯합니다.

아니, 사실은 좋습니다. 비약적인 성장을 한 것도 그때―대학생 시절―입니다.

그러나 만능은 아닙니다.


나약함을 물리치기는 게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또한 내면의 악, 그 '평범 악'은 제가 어찌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읽어대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물론 위대한 사상가들이 한 목소리로 "그건, 인간 모두의 것"이라 외치지만, 유쾌한 일은 분명 아닙니다.




6.


인생을 철학으로 무장하거나 문학으로 가득 채우면 나아질까요?

분명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인생은 무상한 것이고 다만 그 덧없음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투쟁 그 자체로, 저마다의 삶이 값진 게 아닐까, 하는 막연한 생각뿐입니다.


그렇기에 무의미는 곧 의미의 가능성입니다.


그런 점에서 죽기 전의 저는, 행운 깃든 비관주의자, 파국 속 낙관주의자였습니다.




며칠 전에는 나쓰메 소세키라는 소설가를 만났습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잠시 묻어두려 합니다.

또다시 백 년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침이 밝아 왔습니다. 이제는 정말 떠나야 합니다.

기회가 있다면 또 편지하겠습니다. 항상 건강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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