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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Jul 23. 2022

나의 글쓰기 스승

정유정과 '종의 기원'

그녀는 문학을 공부한 적이 없댄다. 소설 쓰기를 가르쳐 준 사람도 없댄다.

그저 세상의 작가들이 다 스승이었다고.


정유정 작가의 소설 7권. 다 합치면 16번 정도는 읽었을 것이다.

그중에서 '종의 기원'과 그 문장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세 번째 완독을 끝낸 책이다.

앞으로 그 두 배는 더 읽어야지.


아 그리고 '없단다'가 올바른 표현이라는데, '없댄다'가 더 잘 와닿는 걸 어쩌겠나.




종의 기원
: 악은 어떻게 존재하고 점화되는가. 심연에서 건져 올린 인간 본성의 '어두운 숲'


1. 태양이 은빛으로 탔다.


2. 이윽고 세상이 왈칵 뒤집혔다.


3. 어둑해오는 하늘 한복판에선 태양이 붉게 탔다.


4. 시야에선 기이한 삽화들이 표류하고 있었다.


5. 폭풍의 임박을 알리는 전령사였다.


6. 어둠에 허기 든 사람처럼, 종종 야밤에 동네를 내달리는 건 그 때문이었다.


7. 머릿속에선 기차가 충돌하는 듯한 폭음이 울렸다. 시야는 물결치듯 뒤흔들렸다.


8. 암전된 머릿속에 불이 들어오기를.


9. 모든 게 꿈이라고 우기는 청군의 우김질마저 꿈이기를 바랐다.


10. 소리의 파동이 한기처럼 귀밑으로 파고들었다. 눈 뒤편에서 피가 쿵쿵 울렸다.


11. 석양은 하늘을 오렌지빛으로 뒤덮고, 바다에는 붉은 파도가 화염처럼 일렁거렸다. 배가 지나온 자리와 갑판 위로 튀어 오르는 물보라와 불어치는 해풍마저 붉었다.


12. 숨이 가빠 왔다. 폐에 물이 가득 찬 것처럼 가슴이 무거웠다. 물 한 방울 없는 지상에서, 가만히 선 채 익사하는 기분이었다.


13. 나는 내 망막을 더듬는 녀석의 시선에서 몇 가지 의문을 읽었다.


14. 짜증이 났던 나머지 전화기에 대고 바주카포라도 쏴버리고 싶었다.


15. 몰아드는 바닷바람은 목이라도 딸 것처럼 날이 퍼렜다.


16. 내 삶이 잿더미가 됐다는 새삼스러운 자각이 따라왔다.


17. 다리가 부러진 환자에게 빨간약을 발라준 거나 다름없는 조치였다.


18. 유조 탱크만 한 배통에다 술을 꽉꽉 채운 초대형 술통으로 보였다. 얇은 비닐 우비를 걸친 몸통이 한 발짝 움직일 때마다 낚시찌처럼 건들거렸다.


19. 술통은 뒤집힌 우산에게 '좆같은 우산'이라는 이름을 지어주더니 빗줄기를 향해 비슷한 악담을 퍼부었다. 씨발, 비 한번 좆같이 내리네.


20. 감각의 대역폭이 무한대로 확장되는 마법의 순간이었다.


21. 어찌나 말랐는지, 양복 소매 속에 든 것은 팔이 아니라 먼지떨이 같았다.


22. 난파당한 스물여섯 해 내 삶에 대해,


23. 유진의 심장을 뛰게 하려면 특별한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무엇일지 몰라 겁이 난다.


24. 맥박이 이마를 치는 소리.


25.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부옇게 흐린 저 겨울 대기 속으로 계속 걸어가는 것 말고는.


26. 쏟아지던 별들은 사라지고 너절한 잔광만 발밑에 흩어져 있었다.


27. 바다가 남편을 입에 물고 수평선 저편으로 훌쩍 물러서는 것을 꼿꼿하게 선 채로 지켜만 봤다.


28. 절벽 끝에 도착했을 때, 붉은 해가 수평선 아래로 반쯤 침몰해 있었다. 하늘은 짙은 핏빛이었고, 너울이 이는 바다에는 붉은빛의 길이 깔렸다.


29. 잿불 위에서 돌아갈 길 없는 이전의 삶들이 너울거렸다. 머릿속에서는 분노와 절망과 자기 연민이 격류가 되어 휘돌았다. 배 속 깊숙이 억눌려 있던 슬픔이 위액처럼 역류해 올라왔다.


30. 어쩌면 나처럼, 머릿속에서 폭발하는 제 비명 소리를 듣고 있을지도 몰랐다.


31. 비슷한 일을 반복적으로 변주하며 살아가는 게 인간의 삶이라는 걸.


32. 의식은 쇄빙선처럼 시간과 공간을 뚫고 과거로 돌진했다.


33. 나는 죽음을 등에 업은 채, 적막하고 춥고 어두운 삶의 기슭으로 돌아온 셈이었다. 몸뚱이가 무쇠로 된 갑옷처럼 무거웠다.


34. 숨을 마실 때마다 칼날 같은 공기가 목구멍을 벴다.




저자는 진화심리학자의 주장을 인용하며 '작가의 말'을 시작한다.

악이란, 우리 유전자에 내재된 어두운 본성이며 악인은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라, 나를 포함한 '누구나'일 수 있다고.

우린, 무자비한 '적응 구조'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후손이라고.


이 사람은 왜 그토록 인간의 '악'에 집착할까.

왜 스스로 악인이 되면서까지 어두운 내면을 그려 보이려 했을까.


우리 내면의 악, 타인의 악, 나아가 삶을 위협하는 포식자의 악에 제대로 대처하기 위해 이를 똑바로 응시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란다.


나도 가끔씩 내 무의식의 폭력성에 깜짝 놀랄 때가 있다.

그런, 날 것 그대로를 보여준 작가에게 감사를.


/


인생을 살아가는 와중에

내면의 음습한 곳을 마주한 것은 정유정 때문이고

염세주의 자세로 사는 것은 이유선 때문이다!

그 밑바탕에서 꿈틀대는 건 나의 경험과 생각들이고!


인생을 살아가는 와중에

그들의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좋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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