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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ul Jun 23. 2022

중년에 돌아보는 My Story

회상

요즘 물가가 올라도 너무 오른다.

가뜩이나 코로나바이러스 여파가 지속 중인데 체감하는 장바구니 물가는 그야말로 고공행진이다.

요리를 좋아하는 필자는 퇴근하면서 시장에 자주 가지만 갈 때마다 자고 나면 치솟는 식자재 가격에 한숨부터 나온다.

경기가 좋지 않아 비즈니스도 고전을 면치 못하는 상황에서 수입은 그대로인데 물가가 이렇게 오르면 어느 가정이나 엥겔지수가 오르는 것은 당연하다.

필자 역시 최근 몇 년 간 새로운 일이 들어오지 않았다.

너 나 할 것 없이 힘겨운 시기라 하지만 사업은 굴곡이 있더라도 지속적이어야 비즈니스가 가능한 법인데 하향 곡선을 나타낸 그래프가 올라갈 기미조차 보이지 않으면 저조한 매출과 함께 감정 또한 우울해지는 것은 모든 사업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심리가 아닐 수 없다.

세상 모든 일이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은 어떤 분야나 마찬가지이지만 위험 부담도 많고 정기적인 인컴(income)이 발생하지 않는 비즈니스의 경우 장기간 침체된 경제 상황은 그야말로 악몽과 같다.

흔히 위기는 기회란 말들을 많이 하고 최후에 웃는 자가 승자라는 말을 하지만 이렇게 비빌 언덕이 없는 경우에는 씨도 안 먹히는 얘기이다.

언제나 안정세를 보이던 대기업들도 주가가 하락하고 국내뿐 아니라 세계가 경기 침체로 난항을 겪고 있지만 어떤 분야이든 비즈니스는 거래가 있어야 움직이는 법이고 파는 사람이 있으면 사는 사람이 있는 게 가장 단순한 경제의 기초이듯 주고받는 돈이 없다면 사업 자체는 존립할 수 없다.

그나마 장기간 신뢰가 형성되고 필요에 의해 공생관계를 유지해 온 비즈니스는 그런대로 이익은 발생하지만 물가는 오르고 현금 가치가 예전 같지 않은 상황에서 몇 년째 꼭 같은 수입만 발생하는 것도 마이너스 성장의 요인이 된다.

이 글을 쓰는 필자는 사업을 일찍 시작했다.

뉴욕에서의 짧은 경험을 바탕으로 겁도 없이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31세의 젊은 나이에 홀로 감당해야 하는 비즈니스를 고운 시선으로 응원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가족들은 심한 걱정이 먼저였고 '저러다 말겠지. 얼마나 하겠어.'라는 부정적 반응을 보이는 친척들이 많았다.

자본도 부족했고 구체적인 조언을 해 줄 멘토도 없었으며 변변한 사무실도 없어 지인의 사무실 구석에 칸막이를 친 책상 두 개와 컴퓨터가 사무실의 전부였으며 사업장 소재지는 집 주소로 대신했다.

당시 IMF 금융위기의 여파가 끝나지 않은 상태여서 대기업에서는 구조조정으로 사내 규모를 대부분 축소하는 시기였으며 자체적으로 진행하던 일을 하청을 주던 대기업이 많았다.

처음에 작은 일을 하청 받고 일을 마무리하면 샐러리맨의 몇 달 치 수입이 발생했고 발로 뛰는 영업 활동이 천천히 성장하면서 수입도 오르기 시작했다.

사실 금융위기 때 대부분 기업에서 하청 주던 일들은 큰 수익이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열심히 이 회사, 저 회사 찾아다니면 할 수 있는 일들은 적지 않았다.

일을 하청 받기 위해 세일즈를 하면서 장시간 기다리는 경우가 많아 항상 책을 갖고 다녔고 4시간 이상을 기다려도 담당자를 만나지 못해 다시 방문해야 되는 경우는 부지기수였다.

대기업 직원들의 오만불손한 태도에 감정이 상할 때도 많았지만 신기하게도 계약서만 쓰고 나면 인격적인 모욕감도 씻은 듯이 사라졌고 그때마다 이게 바로 비즈니스의 묘미란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내가 하던 업무는 컴퓨터 모니터만 있으면 가능한 서류 작업이 대부분이어서 시설 투자나 번듯한 쇼룸이 필요한 비즈니스는 아니었다.

일이 바쁠 때는 직원을 채용해야 했지만 고용계약서를 쓰고 정식 직원을 고용할 입장은 아니었기 때문에 항상 아르바이트를 구해야 했고 경험이 전무한 아르바이트 직원을 일일이 가르치며 업무를 진행해야 하는 상황은 정말 힘겨운 시간이었다.

지난 경험을 되돌아보면 고객을 100번 만나면 기획서를 올릴 수 있는 기회는 10번 정도이고 업무로 진행되는 경우는 고작해야 한두 건이 전부였다.

확률로는 1~2% 밖에 안 되는 사업이지만 그래도 오랜 기간 매진할 수 있었던 이유는 거래 액수가 크고 수익이 발생했기 때문이지만 무엇보다 일에 흥미가 있었고 프로젝트를 마무리할 때마다 말로 형용하기 부족한 쾌감과 추진력이 생성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업이란 무조건 이익이 발생해야 가능한 것이지만 수익과 함께 사람의 입지가 상승하는 메리트(merit)가 다름 아닌 비즈니스의 매력이라 여겨진다.

처음에는 냉랭하고 잡상인 취급을 하던 대기업 직원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태도가 바뀌고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얘기를 실감하게 되었다.

가는 곳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에서 "대표님, 어서 오세요."라고 변하는 과정은 업무의 성과와 업체 대표로 신뢰가 쌓인 결과였으며 자주 가는 장소가 사업하는 사람들이 많이 가는 곳이고 거래하는 업체가 대부분 연결된 공동체로 형성된 까닭이었다.

사람이 대접을 받는다는 것은 굉장히 흐뭇한 일이고 주위에서 자신의 능력을 인정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 무척이나 행복한 것이다.

업무의 특성을 모르는 주위 사람들은 내 능력이 남들과 다르고 미국에서 공부한 특별한 노하우가 있는 줄 알았지만 솔직히 내세울 것이라고는 영업의 확률을 높이기 위해 열심히 발품을 팔고 한 군데라도 더 방문하기 위해 바쁘게 뛰었던 것과 업무에 관한 한 철두철미하게 준비를 하고 결과를 위해 노력한 것 밖에는 없었다.

단지 언제나 말할 수 있는 나만의 노하우란 매일 동트기 전에 일어나는 새벽형 스케줄과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해 왔던 생활습관 그리고 일을 받기 위해서는 비굴할 만큼 겸손해야 한다는 신념이었다.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직장에 근무했던 사람들은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미국 사회는 대충이란 개념은 상상할 수 없다.

학교에서는 학점을 못 따면 곧바로 퇴학이고 직장에서는 punch in, punch out이라는 출퇴근을 기록하는 시스템이 있어 1분만 늦어도 자동으로 지각 처리되고 커피를 마시며 잠시 쉬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다.

직원들의 편의를 위해 커피 메이커를 배치하는 회사는 많지만 커피를 마시며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사람은 매니저 이상의 직책이며 점심 식사 시간도 보통 20분에서 길어야 40분이다.

누구나 능력에 따라 초고속 승진이 가능하지만 매달 업무 평가에 따라 실적이 부진하면 쫓겨나는 것은 어느 회사나 마찬가지이며 직속상관의 모욕적 욕설에도 익숙해야 하고 선후배 개념은 아예 없는 동료도 모두 경쟁자인 일터가 미국의 직장이다.

이러한 인사 시스템은 영업 파트에만 적용하는 인사 정책이 아닌 전 사원 모두에게 해당하는 모든 기업의 동일한 원칙이다.

한국에서 흔히 듣고 보게 되는 기업체의 노사분규나 파업 관련 뉴스는 1년에 한두 번 보면 많이 보는 것이고 한마디로 미국 직장은 능력이 없으면 쫓겨나고 불만이 있는 경우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는 곳으로 이해하면 된다.

대신 능력에 따른 이직은 빈번하고 스카우트가 많은 사회여서 돈을 많이 주고 혜택이 좋으면 회사를 옮기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24세에 늦게 대학에 진학한 필자는 미국 대학생활이 마치 한국의 고3 입시생이나 고시생들과 다름이 없는 현실에 무척이나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누구나 그렇듯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졌다.

그러나 무엇보다 힘들고 놀랐던 일은 미국 직장의 실체는 말 그대로 치열한 전쟁터와 같다는 사실이었다.

모든 직장은 실적을 위한 엄청난 업무를 감당해야 한다.

회사마다 시스템의 차이는 있지만 평균 6개월, 1년이 되면 월급에 대한 재계약을 하는데 실적이 좋은 직원은 커미션(commission)을 더 받을지 연봉을 더 받을지를 선택하고 능력이 월등한 직원에게 주어지는 혜택은 증가한다.

장기간 이용할 수 있는 무료 주차권은 물론 헬스클럽 회원권을 주는 회사도 있고 직책이 중역이면 골프 회원권을 제공하거나 보상으로 비즈니스 클래스 항공권과 특급호텔을 이용하는 여행을 보내주는 회사도 적지 않다.

한마디로 회사에 필요한 인재에게는 후한 보상을 하지만 능력이 없는 직원은 곧바로 쫓아내는 공통적인 시스템이다.

그러나 좋은 혜택도 직원의 실적에 따라 유동적이므로 잠시도 마음을 놓지 못한다.

요즘 4차 산업 시대에 자주 듣게 되는 능력주의(meritocracy)의 실체는 오래전부터 미국에서는 정착되고 문화로 인식된 시스템이다.

젊은 20대에 미국 학교생활과 사회 초년생 시절을 혹독하게 연마한 나는 미국 생활에 빠르게 적응했고 처음 입사한 회사에서 남들보다 죽어라 일한 덕택에 실적은 사내 최고를 기록했으며 6개월이 지났을 때 사장님과의 미팅에서 파격적인 커미션을 제안받았지만 그 대신 매달 받는 월급은 포기를 해야 했다.

입사 1년이 채 되지 않는 시기에 마케팅 대표를 할 수 있었고 수입도 안정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통장 잔액이 넉넉해지자 성공을 위해 매진하겠다는 초심은 자연스레 흐트러지기 시작했으며 얼마 남지 않은 젊음을 즐기면서 살아야겠다는 그릇된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고 퇴근 후 친구들과 노는 게 일상이 되었다.

주말에만 마시던 술자리가 잦아졌고 회사 근처의 술집을 떠나 고급 클럽을 자주 가게 되었다.

매주 주말, 금요일과 토요일은 낮보다 환한 밤을 즐기며 살았고 고급 클럽에 어울리는 탑 브랜드 정장들이 옷장을 채우기 시작했다.

매일 새벽 1시, 2시에 귀가하다 보니 20대 초반부터 계속했던 새벽 운동을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고 월 말이 되면 카드 값 메꾸기에 정신없는 생활은 계속되었다.

놀면서 사귀게 된 친구들은 유명한 기업에서 높은 연봉을 받는 내 또래였으며 비슷한 나이, 동일한 정서는 금세 뜨거운 공감대를 형성했고 새 친구들과 나누는 시간이 늘어만 갔다.

주말에만 가던 클럽 외에 유명한 클럽을 찾아 주중에도 가게 되었고 시간이 가면서 내 생활은 점차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학교 친구들과 유학생 동아리 친구들과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그나마 젊은 체력이 버티던 나이어서 낮에 일하고 밤에 노는 일상에도 생활은 유지되었고 다행스럽게 변함없이 고객들은 나를 찾아주었다.

이런 생활에 젖어들면서 한 해가 지날 무렵 건강에 이상이 오기 시작했으며 몇 년 동안 운동으로 다져진 근육은 사라지고 체중은 빠져만 갔고 만성피로는 떠나지 않았다.

하얗고 깨끗하던 피부는 빨갛게 변했고 자주 마시는 술 탓에 피부 트러블도 생기기 시작했다.

우연히 친구와 찍은 사진 속에 몹시도 변한 내 눈빛을 발견하게 되었을 무렵 풋풋했던 젊은 정서는 피폐해졌으며 업무 중 예전 같지 않은 기억력을 느낄 정도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회사의 경영상태가 악화되었고 클럽 출입을 자제하고 열심히 일을 해도 수입은 조금씩 줄어만 가더니 급기야 몇 달 후 통장 잔액은 바닥을 드러냈다.

돈이 없으면 사람이 기운이 빠지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 듯 정신적으로 매우 약해진 상황에서 잦은 고향 생각에 Homesickness(향수병)가 찾아왔고 몸과 정신력이 함께 나약해지면서 친구도 노는 것도 싫어졌다.

미국 회사에 처음으로 입사할 때의 초심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내가 이렇게 살려고 미국에 왔나.’하는 생각을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했고 몇 주 후 아무 생각 없이 짐을 싸고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공항에서 엄마를 만나고 참 동안 끌어안은 엄마를 놓지 않았다.

흐르는 눈물이 엄마의 어깨를 적셨지만 엄마의 향기는 변하지 않았고 엄마의 품은 몹시도 따뜻했다.

무척이나 여윈 내 얼굴을 보시며 엄마는 다시 나를 안아주셨고 “잘 왔다. 잘 왔다.”만 반복하셨다.

공항에서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동네 성당에 들려 성체조배를 한 후 집으로 향했다.

몇 년 만에 돌아온 집은 너무나 따뜻하고 아늑했다.

엄마께서는 오랫동안 미국에서 먹지 못한 명절 음식을 일부러 준비하시고 갖가지 내가 좋아하는 요리들로 상이 넘치게 밥상을 차려 주셨다.

저녁 식사를 하며 엄마와 끝이 없는 대화는 새벽까지 이어졌고 새벽 늦게 곯아떨어진 후 다음 날 늦은 밤에야 잠을 깼다.

너무나 오랜만에 맛보는 평화는 밖에 나갈 생각도 잊게 만들었고 며칠간 아무 생각 없이 먹고 자고를 반복했다.

집안 어른들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 했지만 당분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마께 말씀드리고 두문불출을 한참 동안 계속했다.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병원에서 종합 검사를 받았는데 잦은 음주 탓에 지방간 증세가 심각한 상태였지만 그 외에 건강에 이상 소견은 없었다.

한동안 통원 치료를 계속했고 기력 회복을 위해 몇 주 동안 영양 주사도 계속 맞았다.

건강은 금방 회복되었지만 장기간 약물 치료는 필요한 상태였고 컨디션이 정상으로 돌아오자 무척이나 보고 싶었던 친구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며 아무 생각 없이 고향의 시간을 향유했다.

노는 것도 지겨워질 즈음 엄마께서는 돌아가신 작은할아버지가 창립한 회사에 들어갈 생각은 없냐고 물어보셨지만 지금 와서 친척 회사에 들어갈 마음은 조금도 없고 내 할 일은 스스로 찾겠다고 걱정 마시라고 말씀드리자 직장 얘기는 더 이상 꺼내지 않으셨다.

사실 그때 당시 한국에서 자리를 잡을지 뉴욕으로 돌아갈지 결정을 못 했고 계속 집에만 있는 것은 답답했기 때문에 벤처기업을 창업한 선배의 조그만 회사에 용돈이라도 버는 마음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다니기 시작한 작은 회사의 업무는 그다지 어려운 일은 없었고 회사 분위기는 좋았으며 몇 명 안 되는 직원들과도 거리감 없이 친해질 수 있었다.

부담 없이 시작한 일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영업 실적은 예상외로 좋기만 했고 그냥 흔한 말로 물어오는 일들이 액수가 큰 굵직굵직한 프로젝트로 연결되는 상황도 발생하기 시작했다.

넉 달쯤 지났을 때 선배는 파트너십을 제안했고 자기 회사에 투자할 생각은 없냐고 물어봤다.

동업이란 상상조차 안 해본 까닭에 투자를 거절하자 내가 발생하는 수익의 50%를 주겠다는 제안을 다시 하며 함께 정식으로 일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10년 가까이 친분이 있는 형이지만 돈이 오가는 관계는 만들고 싶지 않았고 오랜 기간 그 형의 장단점도 알고 있던 터라 투자 없이 커미션만 받는 조건으로 함께 일하기로 동의했고 여러 사람 앞에서 합의한 내용이므로 구두계약만 체결한 상태로 진행했다.

정식 계약서를 쓰고 공증을 받으면 차후에 법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데다 당시 나는 뉴욕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접지 못했기 때문에 법적인 절차는 피하고 싶었다.

부모 자식 간에도 동업은 하지 말라는 말처럼 아니나 다를까 얼마 후 수익이 발생하게 되자 '내 거', '네 거'다투는 상황이 생기기 시작했고 시작된 불화는 커져 갔으며 약속과 다르게 그 사람 속내가 드러난 상황에서 투자한 것도 없는 나는 손해 볼 것도 없었기 때문에 심한 배신감을 뒤로하고 회사를 나왔다.

한동안 계속 연락이 오고 “밥이나 같이 먹자.” “술 한잔 하며 다시 얘기하자."라며 회유를 해 왔지만 부담 없이 시작한 일을 부담 없이 끝내는 것으로 매듭을 지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분명히 수익이 발생했는데도 몇 달 동안 직원들에게 월급을 지급하지 않았고 직원들과 돈 문제로 말썽이 많았던 내용을 함께 일하던 직원들과의 술자리에서 듣게 되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10년이란 기간 동안 호형호제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해 온 사람도 돈 앞에서는 쉽게 속물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에 애석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으나 한편으로는 값진 교훈을 체험하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 그때 이후로 사람을 믿지 않는 습관이 배양되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었다.

뉴욕에서 비즈니스를 하며 내가 쌓은 거래처(account)는 200군데가 넘었고 거래액으로 따지면 소액부터 큰 금액까지 다양했으며 신뢰가 가는 좋은 고객도 있는 반면 일만 아니라면 상종조차 하기 싫은 인간들도 많았다.

그러나 비즈니스의 관계에서는 모두 나에게 소중한 고객이었다.

고객들과는 오직 업무상의 관계였으며 거래 기간이 1년에서 2년의 비교적 짧은 기간이었기 때문에 개인적 친분관계는 거의 없었다.

미국 사회의 특성이 일과 사생활은 철저히 구분하는 개인주의가 팽배한 까닭도 있지만 한국처럼 일하다 친해지면 자연스럽게 식사를 함께 하거나 가끔 술 한잔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사회이고 접대문화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비즈니스 외에 고객을 만나는 일은 없었다.

처음 입사할 때부터 회사마다 정해진 규칙과 고객과의 관계에 대해 교육받는 내용은 있지만 몇 년 간 오랜 비즈니스를 유지한 사이에 식사를 하거나 술을 같이 마시는 경우는 있고 엄격한 회사의 규정이 아니라면 고객과의 개인적 친분을 금지하는 사회는 아니다.

다만 개인적 친분은 친구 관계가 형성된 다음에 가능한 것이며 어떤 경우라도 공과 사는 구분하는 문화이므로 비즈니스 관계가 사적으로 연결되는 사이는 연인으로 발전하는 남녀 관계를 제외하면 매우 드물다.

세상 모든 일은 좋은 일, 궂은일 순서 없이 겪는 것이지만 내가 한국에서 사업을 시작하게 된 기회는 선배와의 불화가 한몫을 한 것은 사실이었다.

선배 회사에서 함께 근무했던 직원들과 몇 차례의 술자리가 있었고 임금을 받지 못한 하소연을 듣다가 문득 이전과 동일한 시스템으로 회사를 창업하면 어떻겠느냐는 말이 오갔으나 술자리에서의 대화라 신경을 쓰지 않았다.

며칠 후 그 친구들에게 다시 연락이 왔고 나에게 전달한 내용은 나를 중심으로 회사를 창업하는 제안을 고려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웃으면서 경험 있는 분들이 직접 하시지 왜 나에게 이런 얘기를 하느냐고 되물어 보자 자기들은 컴퓨터 전문가일 뿐 회사를 창업한다 해도 영업을 해 본 경험이 없고 회사를 경영한다는 엄두도 못 내지만 지난 회사에서 쌓은 경험이 아깝고 다시 시작하더라도 프로답게 일을 처리할 자신이 있다는 것이었다.

말은 조심스럽게 했지만 대화의 핵심은 회사를 창립하려 해도 돈이 없고 영업 능력이 없으니 사무실을 만들고 회사를 설립하면 내 밑에서 일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그쪽에서 어렵게 말을 꺼내고 이 말 저 말 돌리며 본론을 얘기하다 보니 시간이 꽤나 흘러서 삼겹살에 소주로 저녁을 먹고 며칠 시간을 주면 연락을 하겠지만 큰 기대는 하지 말라는 대답을 하고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온 후 며칠 동안 예상 못 했던 고민을 하게 되었고 회사를 창업하고 한국에서 정착을 해야 할지 뉴욕으로 돌아가야 할지를 선택해야 하는 혼란한 갈등이 잠시도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나는 한국 사람이고 가족과 친척, 지인들도 많지만 특히 어린 시절부터 가족처럼 지내온 친구들도 있고 내가 어려울 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다. 중요한 사실은 여유로운 가정생활을 바탕으로 정서적 안정이 일을 하는데 무엇보다 큰 장점이고 미국 보다 기회는 적지만 내 고향, 내 나라에서 사는 게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과 한편으로는 '남들은 미국 비자를 받기도 어렵고 뉴욕에 가 보는 게 소원인데 몇 년 간 공부하고 힘들게 미국 사회에 적응하고 언어, 문화적 장벽도 없는 상황에서 다시 시작한다면 한국보다 기회는 미국이 훨씬 많은데.....'

몇 주 동안 결정을 내리지 못한 고민은 지속되었지만 심사숙고를 거듭한 결과 현실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미국은 이민자들이 세운 나라이지만 아직도 인종차별이 존재하고 백인들이 핵심인 사회이기 때문에 동양인이 주류사회(main stream)로 진입하는 것은 불가능한 현실과 실제로 미국 회사를 다니면서 동양인과 흑인이 기업의 중역으로 진입하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고 들은 적도 없으며 능력 있는 유색인종은 도구(tool)로서 가치를 인정받고 돈은 벌 수 있지만 실상 나이가 들어도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대우를 받는 경우는 너무나 희박하다는 구체적 현안이 내 마음을 서울로 이끌었다.

어느 정도 머리가 정리되자 예전 직원들을 만나고 함께 도전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때부터 회사를 창업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창업 자금도 없었으며 사무실 임대료와 보증금도 엄두가 나지 않았고 영업 라인도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법인을 설립하는 과정 역시 무척이나 복잡했다.

그런 여건에서 우선 사업장 소재지는 집 주소로 정하고 아는 지인의 화장품 총판 대형 사무실 구석 공간에 칸막이를 치고 당분간 무상으로 공간을 사용하면서 사업자 등록을 냈다.

열약한 환경이었지만 젊음이라는 에너지와 인터넷 시스템을 통해 업무는 진행되었고 모든 불편은 곧 익숙해졌다.

시작하자마자 기대도 안 했던 회사에서 하청이 들어왔고 예상 밖의 수익이 생겨 몇 달은 회사를 운영할 수 있었지만 사업이란 게 들어가는 돈이 왜 그리도 많은지 하나하나 감당해야 하는 값비싼 레슨은 지속되었다.

몇 달 후 운영 자금은 바닥이 났고 나는 하는 수없이 자존심 버리고 가족들에게 손을 벌렸다.

하지만 가족의 반응은 싸늘했고 돈은 한 푼도 마련할 수 없었다.

당시 믿었던 엄마의 말씀은 너희 두 형제 미국 사립대 유학 보내고 생활비 부치느라 이제는 여유가 없고 가족 회사에 취직하라고 엄마는 분명히 얘기했지만 네가 거절하고 사업을 시작했으니 선택한 일은 스스로 해결하라고 말씀하시고는 돈이 있어도 위험한 사업 하는데 도와줄 수가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생각해 보면 내 인생에서 그때처럼 엄마가 야속했던 적은 없었다.

그래도 시작한 사업은 진행해야 했기에 가까운 친척들을 방문하고 어려운 부탁을 드렸지만 31세의 젊은 조카를 믿고 자금을 융통해 주신 분은 한 분도 없었다.

사실 젊은 날, 방황이 길었던 연유로 대학 진학도 24세에 할 정도로 나란 존재는 이해하기 힘든 아웃 사이더로 친척들에게 각인돼 있었고 내가 만든 신용의 결과로 나에게 선뜻 사업 자금을 빌려줄 가족과 친척이 없는 것은 예상했던 일이었다.

결국 사업을 계속할 수 없어 일이 들어오면 그때그때 진행을 하기로 직원들과 논의를 하고 폐업은 하지 않은 상태로 몇 달 동안은 자금 마련을 위해 다른 일을 하면서 사업을 병행해야 했다.

당시 21세기가 시작되는 2000년은 IMF 금융위기가 채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모든 회사가 감원을 실시할 때여서 병행할 수 있는 일도 없었지만 임금도 열약해서 사업 자금을 마련하면서 내 일을 병행하겠다는 계획은 불가능했다.

그나마 꽤 많은 임금이라고는 건설 현장 막노동이 일당은 높았지만 워낙 고된 일이라 망설였으나 그래도 뜻이 있는 곳에 길은 있고 한 번 시작한 일, 갈 때까지 가보자는 심정으로 혜화동 서울대학 병원 별관 공사현장을 소개받고 일을 시작했다.

안 하던 육체노동은 무척이나 힘들었지만 5년이 넘게 헬스클럽을 다니며 키워온 기초 체력 덕택에 육체노동도 견딜 수 있었다.

한 달쯤 지났을 때는 야근도 지원했는데 일명 '두 대가리'라고 부르는 현장 용어인 야근은 건설회사 담당 직원들도 퇴근해야 했기 때문에 3시간 정도 일을 하면 마감을 했고 3시간만 일을 해도 하루, 이틀 치 일당을 지급했다.

야근이 있을 때마다 지원을 했고 내 일이 발생하면 밤늦게라도 직원들을 만나 업무 지시를 했으며 고맙게도 직원들은 일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혜화동 건설 현장 근처 커피숍이나 식당으로 모여 준 덕택에 시간을 절약하며 회의를 할 수 있었다.

계획했던 6개월은 바쁘게 지나갔고 야근을 계속한 임금은 어느새 목돈이 돼 있었고 한동안 자금 걱정 없이 비즈니스를 진행할 수 있었다.

그때 나를 기특하게 봐주셨던 본사 과장인 현장 소장님과는 좋은 인연이 되어 몇 년 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가끔 식사를 함께 하면서 사업에 필요한 정보도 제공받을 수 있었다.


수많은 만남과 사연을 거듭하며 그렇게 시작한 사업은 희로애락을 거치며 강산이 두 번 변하는 시간은 빨리도 지나갔다.

굴곡진 비즈니스는 좋은 날 보다 궂은날이 많았고 오르막 내리막을 숱하게 겪었던 비즈니스에서 잠시 머물다 가는 돈은 나를 부자로 만들지는 않았다.

내 나이 50이 되면 기필코 빌딩을 세우겠노라 다짐하며 다짐하며 매진했지만 아직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사실 나의 인생은 기쁨과 슬픔의 교차로를 수 없이 반복하며 여기까지 왔지만 되돌아보아도 후회는 없고 아쉬운 미련도 없다.

부모님이 깔아주신 꽃길을 거부하고 나의 청사진을 실황으로 만든 대가는 파란만장한 시련의 연속이었지만 잦은 풍랑의 여정에서 나를 지켜준 것은 신앙과 가족의 사랑 속에 형성된 나만의 성취욕이었다.

온갖 유혹 속에서 기도는 내 영혼의 등불이 되었고 엄마가 계신 가정은 힘겨운 짐을 언제나 내려놓을 수 있는 나의 안식처였다.

어려서부터 철저한 가톨릭 교육에 세뇌된 양심은 단 한 번도 불법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내 손에는 묵주가 쥐어져 있었다.

그렇다고 신앙심이 깊은 범생이 아니었고 급한 성격에 화도 잘 내는 까다로운 젊은 감성의 주인공이었다.

성숙이란 나이의 증가가 아니라 겸손을 터득하는 과정이란 사실을 힘겨운 일을 겪을 때마다 실감하면서 나 자신은 조금씩 연마되어 갔고 성공하려면 수치심을 버려야 한다는 진리와 일을 잘하려면 싫은 사람과도 밥 잘 먹고 술도 마실 수 있어야 한다는 배포도 갖춰지기 시작했다.

비즈니스를 하면 할수록 이상하게도 언제나 좋은 일 뒤에는 약속이나 한 듯 고비가 닥쳤고 한 폭 한 폭 무거운 장막을 거둬내면 잡히지 않는 무지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젊지도 늙지도 않은 나이에 접어들면서 나의 행보가 깨닫게 해 준 삶의 교훈은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것은 돈이라는 진실이었다.

사람은 거짓말을 해도 돈은 결코 거짓을 말하는 법이 없다.

일한 만큼 나오는 것이 돈이며 뿌린 만큼 거두는 게 돈이다.

대박이란 없는 게 돈의 실체이며 불법으로 돈을 유용하면 보복을 하는 게 돈의 본성이다.

정직한 투자는 결실을 주지만 결실을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고 돈은 언제나 변화무쌍한 변화를 싫어한다.

돈은 생명이 있어 스스로 꿈틀거리며 이자를 번식하지만 돈의 생리는 다산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부자는 하늘이 낸다는 옛말이 있듯 큰돈의 행로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다만 돈이란 성실한 사람을 항상 동행하는 성격이 있어 부지런한 사람을 그림자처럼 따른다.

필자 또한 과욕의 결과로 혹독한 시련을 감내해야 했고 그 시련은 깊은 상처를 남겼다.

사업을 하면서 아픈 만큼 성숙할 수 있다는 말은 비즈니스에서는 해당되지 않는 철학이란 사실을 나는 수차례 목격을 했다.

한 번 쓰러지면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 비즈니스이며 회복을 위해서는 기나긴 고통이 필요하지만 사업의 회복이란 언제나 깊은 후유증이 남는 법이다.


오늘도 바쁜 하루는 어김없이 저물었고 나는 매일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여기까지 무사하게 인도해 주심에,

건강한 몸과 영혼을 허락해 주심에,

사랑할 수 있는 가족이 있음에 진심으로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그리고 열심히 살아온 만큼 기회를 주시라고 간청을 드린다.

나는 믿는다.

기도의 응답은 반드시 주신다는 사실을 단지 우리들은 그 시기를 모를 뿐이다.


밤이 지나고 새벽이 오면 나는 변함없이 무거운 바벨을 들을 것이고 변함없는 일과를 바쁘게 보낼 것이다.

크든 작든 통장에 들어오는 짜릿한 행복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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