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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메아리 1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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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ul Sep 19. 2022

퇴색된 신앙

정의의 명분

한국인에게 설날과 추석은 가장 큰 명절이며 오랜 역사를 통해 전래된 고유한 축제이다.

시대가 바뀌어 첨단과학과 인터넷 세상에 살고 있지만 아직도 차례와 제사를 지내는 가정이 많고 언제까지 계승될지는 의문이지만 고유한 전통은 현존하고 있다.

전통적 관례인 제사는 대대로 이어진 관습이며 조상님께 예를 갖추고 복을 기원하는 민속신앙의 의미도 포함된 한민족의 문화이다.

서양의 기독교 문화도 유구한 역사를 통해 전 세계로 전파된 종교이며 동양의 불교, 이슬람(Islam) 또한 조상 대대로 내려온 뿌리 깊은 전통적 종교이다.

어떤 종교이든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모태신앙이 세습되고 정착되어 가정마다 종교로 자리를 잡는다.

사람이 어릴 적부터 배양된 습관은 평생 바꾸기 어렵고 가정은 사회의 시초가 되는 것이기에 부모에게 물려받은 신앙은 평생을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시대가 바뀌어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가는 이유는 전례를 통한 신과의 교감과 세속이 주지 못하는 평화를 느끼고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신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지만 신앙이란 꼭 성전의 예식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진실한 믿음은 기도를 통해 신께 의탁하는 마음의 안식이고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고 사랑과 평화를 실천하는 것이며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야 할 의무는 성경에서도 강조하듯 종파를 떠나 모든 교회가 동일하다.

그러나 사람은 언제나 유혹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종교적 의미 외에도 자신의 내면을 정립하고 마음을 신성하게 가다듬는 것이 다름 아닌 영혼의 정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모태신앙이란 출생 전 어머니의 태(胎)에 있을 때부터 가지게 되는 신앙으로 태어나면서 어머니로부터 물려받는 신앙을 말하며 유아기에 받는 세례를 뜻한다.

어릴 때부터 배양되고 교육된 신앙은 선택의 여지가 없이 자연스럽게 길들여지는 세뇌 교육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가기 싫은 교회를 부모의 성화에 못 이겨 가는 자녀들이 많았고 교회에서도 학생회, 청년회 등 활발한 젊은 단체가 있었으며 철저한 교리에 익숙한 학생들이 부모의 뜻에 따라 신학교에 가고 사제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제는 교회 오빠, 교회 누나가 보고 싶어도 교회에 가지 말고 공부하라고 엄마가 말리는 시대이지만 요즘 교회에서 젊은 사람 보기가 힘들고 신자가 3,000명이 넘는 대형 교회도 활동하는 학생이나 청년들은 몇십 명이 전부이며 성당의 자리를 메운 신자들은 노년층과 중년이 대부분이고 가뭄에 콩 나듯 어린아이와 함께 오는 젊은 부부가 참으로 기특해 보이는 게 오늘 교회의 현주소이다.

세상이 변하면 사람도 문화도 변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제는 종교의 의미마저 달라지고 있는 현실은 한 마디로 온 세상을 경제적 가치가 지배하기 때문이다.

조물주보다 건물주가 최고라는 말은 이제 어린아이도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영원히 변치 말아야 할 신앙의 의미가 자본주의의 물결에 수몰된 지는 꽤나 오래되었다. 이런 현상은 선진국일수록 강하게 나타나는데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경제적 가치가 나날이 상승하고 삶의 질이 높아지면 그에 비해 사람들의 신앙심은 그 깊이를 잃기 마련이다.

어떤 종교이든 교리와 전례는 다르다 해도 신에 대한 순명과 사랑과 평화, 인류애를 기본으로 선과 악의 개념은 공통적이다.

신에게 의지하는 믿음과 기도를 통해 세속에서 얻을 수 없는 내면의 평화를 느끼는 것은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체험하는 것이기에 사람들은 교회를 찾는다.

과거 모든 종교는 기복 신앙이었고 종교마다 강한 율법을 강요했으며 종교법을 지켜야만 신자로서의 자격이 주어지는 것처럼 교리를 가르쳤다.

특히 중세 가톨릭 권력은 모든 유럽을 지배했고 유럽 각국의 국왕들도 교황의 인가가 있어야 정책을 집행할 수 있었다.

결국 비만해진 가톨릭교회는 부패했고 개신교가 등장하게 되었다.

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모두 알고 있는 역사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까지 중세 가톨릭의 잔재는 현존하고 있다.

실증이라면 종교의 특성상 미사복인 제의(祭衣)는 전통을 따른다 해도 교황과 주교의 의상은 중세 때 그대로이며 성당 미사 때 사제의 제의(祭衣) 또한 변하지 않았고 다른 종교인들의 의복에 비하면 너무 화려하다.

특히 스님들과 원불교 교무님들의 모습과는 크나큰 대조가 된다.

물론 어느 종교나 거룩한 예식을 올리는 자세는 경건해야 하지만 단정한 의복과 화려한 의복은 의미가 다르며 제사장의 모습에 따라 종교의식의 깊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중세, 가톨릭의 제의(祭衣)는 가톨릭 사제들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과거 부패한 가톨릭교회의 전형적 상징이었고 사제직에 대한 도전은 신성모독으로 인정되어 처형을 받았다.

그러나 오늘날 국경이 없는 글로벌 시대에도 성당 사제들의 제의(祭衣)는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사제는 미사를 집전하는 제사장일 뿐 교회가 인정하는 성사권 외에 교회법으로 인정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교회는 신성한 성역(sanctuary)이지만 사제의 역할은 결코 성역이 아니며 교회 내에서 신자들에게 명령할 수 있는 직책도 아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제들의 행동을 보면 교회 내에서 권력을 이양 받은 인물로 착각하는 신부들이 많다. 이런 현상은 수도권이 아닌 지방 교회에서 흔하게 나타나는데 자신이 교회의 총수로서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어이없는 행태를 부리는 신부들이 아직도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첨단과학과 자본주의 국가인 한국에서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만연할수록 교회의 역할은 무엇보다 중요하고 특히나 코로나 사태와 경제가 최악인 상황에서 교회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영적인 위안을 전달해야 할 의무와 사명이 있는 것이다.

시대가 변해도 교회의 역할은 변함이 없지만 권위적 착각 속에 현실과 동떨어진 강론과 오만한 사제의 태도는 신자들의 발걸음을 돌리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이며 젊은 세대들은 그들의 목소리에 관심조차 없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신자들의 미성숙한 과거의 습관과 연관이 깊다.

성직자에게 복종하는 것이 신앙인의 도리이며 사제의 권위는 존엄하다고 믿었던 가난했던 시절, 교육이 부재되었던 과거 신자들의 습관이 아직도 남아있기 때문이고 성직자, 수도자에게 잘해야 복을 받는다는 어리석은 믿음은 사제들의 권위적 모습에서 자연스럽게 강요당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루가 복음 6장 31절에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라고 말씀하셨고 마태오 복음 20장 26절에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라 하셨다."

종교를 떠나 아무리 성공한 사람도 겸손하지 못하면 비판의 대상이 되고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법이다.

문제는 종교인으로서 본분을 망각한 직업 사제들이 증가한다는 사실로 사랑과 복음을 전달해야 할 그들의 사명이 상업 기관의 대표이사로 변모하고 있는 오늘의 가톨릭교회를 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 봉독과 복음 전달만을 해야 할 신성한 제단에서 어설픈 정치 강의를 하고 중세 시대의 면죄부를 팔듯 교회에 돈을 많이 내는 사람이 훌륭한 신자라는 강요를 한다.

사실 이러한 강론은 교회가 금지하는 신성모독임에도 제한이 없는 그들의 발언은 거침이 없다.

독재의 총칼에 온몸으로 대항했던 일부 사제들은 이미 종북 집단이 된지 오래됐는데 정의를 내세우면서 노동자의 편에서 분열만을 조장하고 종북, 친북 강조하며 죄 없는 우리의 아들들이 불구가 되고 사망한 연평해전을 북한의 정당한 행위라는 망발도 서슴지 않았다.

서강대학 총장을 역임한 고 박홍 신부는 TV 방송에 출연해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를 북한에서는 김일성, 김정일, 주체사상을 그들의 삼위일체로 신봉하고 있으며 세계에서 유일한 독재 세습인 김정일 일가의 만행을 비판하면서 공산주의는 세계에서 반드시 사라져야 할 악의 무리라고 강하게 주장한 적이 있었다.

집회 현장에서 정의를 부르짖던 사제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탄핵에서 풀려나자 노무현을 부활한 천주님으로 모시겠다는 망발을 하고 북한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찬양하는 소리에 동참했다.

이때 국무총리를 지낸 이회창 총리는 당 대표 시절 친북을 외치며 시위 현장에서 선동하는 사제들에게 “사제들이 정말로 하느님 말씀과 정의를 위해 순교할 용기가 있다면 안방에서 활개 치듯 안전한 서울광장 촛불시위에 앞장서지 말고 북한에 가서 정의를 구현하고 순교하라. “라고 비판했다.

그 이후 북한에서 활동하는 사제의 이야기는 한마디도 들은 바 없다.

이러한 그들의 선동 행위는 민주주의 국가의 반사회적 행위임을 스스로 시인하는 행동이며 미사를 집전해야 할 사제의 본분을 완전히 망각한 모순의 합창이 아닐 수 없다.

가끔 세계 곳곳에서 테러가 발생하고 목숨까지 불사하는 테러리스트를 뉴스로 보게 되면 사상이란 종교마저 왜곡할 수 있는 무서운 위력이 있는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집회 현장에서 선동을 하고 종북, 친북 외치는 사제들도 사상에 감염된 것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사실 그들은 그들의 사상에 대한 신념도 없고 종교에 대한 의미도 모르는 협잡꾼일 뿐이다.

고 김수환 추기경처럼 불의에 대항할 용기도 없으며 힘 있는 자 앞에서는 똑바로 설 수조차 없는 비열한 위선자들임을 증명하는 사례를 들자면 가난한 사람들과 노동자를 위한다는 주장을 하지만 돈 많은 신자들과 골프를 치고 사우나를 즐기고 고급 식당, 고급 술집을 자주 출입한다.

친북, 종북을 노래하면서도 힘겹게 사는 탈북자들이 어떻게 사는지 관심이 없고 신자들에게는 겸손을 강요하면서 어떤 모임에서나 상석에 앉기를 좋아한다. 충분한 월급을 받으며 사제관 도우미인 식복사를 상주시키면서 살지만 그들의 사제 단체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기부한 내용은 들은 바가 없다.

주목해야 할 사항이라면 성당은 기독교와 달리 장로회와 같은 직책이 없어 사제를 견제할 시스템이 없고 사제의 비리가 불거지면 임기를 못 채우고 이직을 시키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많은 신자들은 구역 교회의 대표는 사제이지만 교회의 주인은 당연히 교무금을 내는 신자들이고 영세를 받은 신자들로 인해 교회가 운영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 모든 교회의 주인은 세례를 받고 그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교회를 방문하는 모든 사람이며 교회 앞을 지나는 흉악한 범죄자도, 외국인도, 그리고 종교가 다른 사람들도 교회에 들어가는 사람은 누구나 주인이 될 수 있는 따뜻한 공간이 모든 교회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마태오복음 11장 28절에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렇듯 가톨릭교회와 종파가 다른 모든 교회도 언제나 모든 이의 안식처가 되어야 하며 성직자의 할 일이란 교회의 문으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을 언제나 따뜻하게 맞이하는 일이다.


오늘도 데모 현장에 계신 신부님과 제단에서 십의 일조를 강요하는 성직자는 모든 것을 버리고 초기화로 돌아가기를 진심으로 심으로 희망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 안다.

퇴색된 낙엽에 새싹이 돋지 않는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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