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aul Dec 28. 2022

소멸과 생성의 시기

마감과 시작


필자는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을 미워했다.

아니 증오라 표현하는 것이 더 솔직한 고백이다.

가까이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미워했고 그리고 정치적 사상이 반대되는 사람들을 증오했으며 본분을 망각한 가톨릭 사제들을 증오했다.

상처를 준 사람은 나름대로의 원인이 있겠지만 객관적으로 생각을 거듭하고 주위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봐도 상처를 준 사람의 사유가 명백하지 않으면 미움이 증오로 바뀌었다. 

인격적인 상처를 갚기 위해 나도 그 사람을 여러 사람 앞에서 비난했고 그럴 때마다 공감해 주는 사람들을 통해 자신을 위안했다.

단순한 반응이지만 얄팍한 인격의 발로이고 보복적 언행이었다.

그리고 직접적 대면이나 접촉이 전혀 없는 정치인을 증오했다.

증오가 너무 심한 탓에 뉴스에서 그 사람들이 나올 때면 혐오감 때문에 채널을 돌렸다.

그들의 정책이 상식적이지 않고 민주적이지 않으며 말도 안 되는 포퓰리즘을 내세우는 정권을 비난했고 그 사람들이 소속된 정당도 악의 무리라고 생각했다.

나의 의견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을 향한 증오는 멈추지 않았고 공감하는 사람들과는 드러난 사실에 대한 비판도 많이 했다.

나는 정치적 문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서울 시장과 내가 사는 동네 국회의원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물론 지난 정권을 싫어했던 사유는 상식적으로 근본적으로 명백하고 민주주의란 원래 찬반의 의견이 공존하는 사회이므로 내가 그들을 미워하고 비난했다는 자체에 대해서는 후회는 없다.

그러나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사람들을 증오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본분을 망각한 성직자의 그릇된 언행을 비난하고 그 사람들을 증오했다.

사제가 신성한 교회 제단에서 정치적 강론을 계속하고 성경과 무관한 개인의 사상을 강조하며 돈을 내라는 목소리만 높이는 신부들은 격멸했으며 예상대로 임기를 못 채우고 쫓겨나는 사제에게 일말의 동정심도 없었다.

자신들이 소속된 단체에서 반대 진영의 후보가 낙마하게 해달라는 어이없는 합동 미사를 집전하는 행위를 비판했고 다행히 그들의 기도는 소용이 없었다.

물론 내가 사람들을 증오하고 비판한 사유는 타당하고 객관적이며 나의 증오와 비판은 타인을 설득하기에는 논리적이었고 공감을 하는 사람도 많았다.

사실적 행동만을 미워하고 비판했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이나 후회도 없었다.

그러나 남을 미워하고 증오하면서 내 마음은 전혀 편하지 않았고 부정적인 사실만을 보느라 부정적 시각이 부정적 사고로 변하는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그동안 합당하다는 나의 논리에 가려진 또 다른 사실은 외면하고 살았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내가 재단한 논리는 나의 지식과 통계에서만 비롯된 것이며 미워하는 사람들의 행동이 일반적 상식에 위배될 때마다 미움과 증오가 더욱 가열된 것은 사실이다.

과열된 분노를 글로 인터넷에 올리고 조회수가 늘고 공감하는 댓글이 올라올 때마다 나는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그렇다면 내가 사람들을 미워하고 증오한 행동을 정당하다고 합리화할 수 있겠지만 지금 다시 생각하면 내 자신의 얄팍한 인격의 소산이라고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하면 자신은 이미 부정의 감정에 사로잡힌 것이며 분노의 부정적 감정으로 보는 시각에는 부정적 사실만 보이기 때문에 직접 목격하고 들은 사실은 당연히 확대되기 마련이다.

긍정적 현상에 비해 부정적 감정은 쉽게 확대되고 증폭되어 전염되기 싶고 특히 공감해 주는 사람이 많을 때는 인지적 오류를 범하게 된다.

내 소신만을 강하게 내세우는 행위는 옳고 그름의 판단을 모호하게 만들 뿐 아니라 마음에 부정적 생각이 자리를 잡으면 긍정이 들어설 자리는 조금도 없다.

사실 나의 미움과 증오로 손해를 본 사람은 나 자신이었고 점점 빠져든 나의 논리는 객관적 판단을 어렵게 만들었다.

내가 범한 인지적 오류는 내가 느낀 단면의 모습을 일반화하며 상대를 더욱 증오하게 만들었고 고착된 사고는 계속 부정적으로 발전한 것이다.

사람의 부분적인 결함을 전체로 평가하는 모순이 고착되었을 때 나의 시각과 사고는 한 쪽으로만 향하고 있었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듯 사유의 그늘에 가려진 나의 교만이 직접, 간접적인 상처를 핑계로 나 자신을 망치고 있었던 것이고 증오는 곧 투사(projectuon)로 표출되었다. 

나에게 상처를 준 대상을 향한 투사는 계속되었고 의식적 증오가 소진될 무렵에 이르러서야 조금은 객관적 사고로 돌아올 수 있었다.

미움과 증오는 상처를 더욱 후벼 파 들었고 곪기 직전에 멈춘 것이다.

결국 미움과 증오의 대가는 혹독하게 나를 괴롭혔다.

나의 생각에서 촉발된 분노가 미움과 증오로 진행되기 까지는 짧은 시간이 걸렸지만 증오의 기간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시간은 나를 속박했고 나는 결코 자유롭지 않았던 것이다.

한 해가 가는 길목에서 반추라는 정서가 나를 깨게 만든 것은 결코 예정된 계기가 아니었지만 반추라는 기회를 통해 나를 보게 된 계절적 정서가 무척 고마울 따름이다.

그러나 아직은 내 자신을 직시한 상태일 뿐이므로 회한은 없다.

오랜 기간 진행된 증오의 여운이 쉽사리 매듭 되지는 않을 것이고 지금 나의 심경은 이맘때의 감성과 함께 우연히 찾아든 현상을 통해 우선은 미움과 증오의 감정을 마감하려는 마음에 충실하고 싶다.

니체는 말했다.

'도덕적 현상이란 없다. 도덕적 해석만 있을 뿐이다.'라고

이 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해석된 사실이며 해석된 사실은 서로 다른 의미로 이해할 수 있고 서로 다른 의미는 진실일 수 있지만 거짓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오류도 될 수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결국 나의 사고와 논리는 부정으로 점철된 시간을 보냈고 과열된 분노가 잠시 식을 때에 비로소 객관적 형상을 본 것이다.

2022년을 보내며 내 자신을 정화하고 싶다.

그동안 쌓였던 궂은 것들을 2022년과 함께 흘려보내련다.

상처도 미움도 증오 또한 버릴 것이며 여과하기 어려운 내 습관의 잔재까지 모두 버릴 것이다.

다 버리고 나면 빈자리에 새로운 것을 채울 것이고 그곳에 생성될 좋은 가치만 향유할 것이다.


누군가 말했다.

"이 세상에서 천국을 느끼지 못하면서 어떻게 천국에 가겠느냐?"라고


나는 천국에서 살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몹시도 추운 크리스마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