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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ul Mar 30. 2023

간사한 것도 능력이다

감자의 슬픈 역사

과거 학생들이 검은 교복을 입었던 아날로그 시대에는 성당에 외국 신부님들이 많았다.

대부분 외국 신부님들은 선교 활동에 주력했던 사제였으며 가난하고 힘들었던 시기에 한국 가톨릭의 정착과 지역 발전을 위해 노력했던 사제들이었다.

그들은 신앙의 전파 외에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랑의 실천과 봉사 활동을 일과로 삼았던 마더 테레사 수녀와 같은 성직자의 사명을 몸소 수행한 사제였다.

외국 신부님 중에는 특히 아일랜드 사제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콜롬반(Columban) 외방선교회를  소속이었다.

한국 사제들이 드물었던 당시에 신앙뿐 아니라 한국의 문화 발전에도 많은 기여를 했던 아일랜드 신부님들을 우리 부모님들은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아일랜드는 선진국이 아니었으며 경제적으로 매우 낙후되었던 나라였다.

700년 동안 영국 식민지로 힘겨운 삶을 이어갔던 가난한 나라였고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경제 발전은 매우 뒤처진 생활을 했다.

과거 유럽의 생활사를 단적으로 표현하면 정제된 흰 빵은 귀족들이 먹었고 통밀빵은 서민의 주식이었으며 유럽의 천민들은 통밀빵도 먹지 못해 감자가 주식이었다.

아일랜드는 감자를 주식으로 먹었던 나라이고 가축인 돼지를 목돈을 위한 귀한 자산으로 키웠으며 미국이 적극적으로 이민을 받아들였던 시기에 돼지를 판 돈으로 자식의 미국행 여비를 마련했던 힘겨운 역사가 있는 나라이다.

마치 한국의 가난했던 시절에 소를 팔아 자식을 서울로 유학 보냈던 우리의 과거와 비슷한 역사라 할 수 있다

아일랜드는 서기 500년에 선교사들에 의해 기독교가 전파되었고 600년 이후 켈트교(Celtiic Church)확산되었다.

800년부터 1530년까지 노르만 바이킹의 침략을 받았고 1169년 노르만 왕조의 리처드 드 클레어가 아일랜드를 침략하고 아일랜드는 노르만 왕조의 직할령이 되었으며 이후 700년간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종교 개혁자들에 의해 성공회가 로마 가톨릭에서 분리되는 종교개혁 이후 성공회의 잉글랜드는 아일랜드인에게 로마 가톨릭을 버릴 것을 강요했다.

그로 인해 1534~1691년까지 아일랜드에서는 숱한 저항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17세기 영국의 장로교 얼스터 (Ulster, 북아일랜드)개신교 신자들이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다.

잉글랜드는 로마 가톨릭을 철저히 배척하는 정책으로 잉글랜드의 공직에 로마 가톨릭 신자를 제한했다.

1660년 이후 잉글랜드는 아일랜드의 무역을 금지하고 아일랜드에서 생산한 곡식 대부분을 잉글랜드로 수탈한다.

그때부터 아일랜드는 식량부족이 나라 전체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17세기 초반에 남미의 감자가 전래되었고 아일랜드는 감자를 재배하고 주식으로 먹게 되면서 잉글랜드의 수탈로 시작된 식량난을 대처할 수 있었다.

1801년 아일랜드는 1800년 합병령에 이어 그레이트 브리튼 아일랜드(Greaten Britain and Ireland)로 합병된다.

아일랜드가 합병된 후 1845년에 감자 역병이 발생했고 이로 인한 아일랜드의 기근은 1852년까지 계속되었으며 이 시기에 무려 250만 명이 넘는 아일랜드인들이 기근으로 사망했다.

가뭄과 감자 역병으로 발생한 기근은 물론 자연재해이지만 아일랜드 국민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주역은 분명 영국 황실과 빅토리아 여왕이라는 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아일랜드의 독립운동은 계속되었고 영국은 1914년에 '아일랜드 정부법(Government of Ireland Act)'을 제정하였지만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효력이 정지되었으며 그 후 1920년에 아일랜드 정부법이 새롭게 상정됨에 따라 아일랜드는 북아일랜드와 남아일랜드로 분리되었다.

과거 아일랜드인들은 영국의 식량 수탈로 감자를 먹고 연명해야 했으며 감자 줄기와 잎을 먹인 돼지를 가정마다 길렀고 생활고 때문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 젊은이들은 돼지를 판 돈으로 뱃삯과 여비를 마련해  미국으로 떠났다.

그렇게 미국으로 도착한 아일랜드 이민자들은 대부분 보스턴에 정착하여 노동자로 일하며 생활을 하였다.

오늘날에도 보스턴 시민은 아일랜드계가 많고 시민의 50%가 가톨릭 신자이며 최초의 아일랜드 출신의 시장을 배출하기도 했다.

서양의 세계 패권은 로마에서 스페인으로 전환되었고 영국에 이어 미국으로 옮겨졌다

그 과정에서 비참한 식민지의 참상은 여러 나라에서 시작되었 비참한 식민지의 역사는 유럽과 아프리카에서 지속되었다.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드 2세는 벨기에의 식민지 콩코의 국민들을 1,000만 명이나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으며 가장 잔악한 콩고의 살육자라고 불리게 되었다.

나치는 600만 명이 넘는 유대인을 학살했으며 아시아에서는 식민정권은 아니었지만 킬링 필드의 주인공 캄보디아 붉은 크메르의 지도자 폴포트가 캄보디아 인구 1/4인 200만 명을 살육했다.

아무리 지난 과거라 해도 총과 칼로 정권을 장악하고 식민지에서 자행한 범죄에 관련된 인물들은 가능한 모든 국제법을 동원해 처벌해야 하며 어떤 보상과 사죄로도 희생자와 유가족, 그 후손들이 대를 이어받은 고통은 보상이 불가능하지만 그 자손들만이라도 선대가 저지른 만행과 범죄는 깊이 반성하는 공식적 사죄는 반드시 필요하다.

식민정권의 공식적인 사과와 보상은 현대에 이르러 몇몇 국가에서 미미한 수준으로 이뤄졌지만 실상은 자국의 국제적 이미지 쇄신과 보상차원의 명목으로 산업시설 인프라를 식민지였던 가난한 나라에 구축하고 자국의 자본과 기술을 투입하여 현지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는 경제적 이익에 목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식민지의 참혹한 역사는 지나간 과거사의 흔적일 뿐 그들의 희생을 어떤 수단으로도 보상할 수는 없다.

한국도 식민지 역사를 통해 많은 고난을 겪어야 했으며 조선시대에는 형제국이라는 명분으로 명나라와 청나라의 지배를 받았고 백성들도 온갖 치욕의 수난을 겪어야 했다.

인조는 청태종에게 삼배구도두(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를 하는 치욕을 당했으며 소현 세자가 볼모로 끌려갔다.

청의 협박과 요구로 국고는 바닥이 나고 백성들의 고초는 말할 수 없을 만큼 힘들었다.

조선의 처녀들을 중국에 보내야 했고 그로 인해 환양년과 후레자식이란 말이 등장했으며 청나라의 수탈로 백성들의 가난과 굶주림은 지속되었다.  


1910년 시작된 일제강점기는 1945년 8월 15일까지 계속되었고 일본의 만행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지속되었다.

조선의 식량과 재산, 귀한 특산물들을 수탈했고 조선의 은이들을 징집해  일본의 총알받이로 희생시켰으며 조선의 처자들을 일자리를 다고 속여 위안부로 데려갔다.

창씨개명으로 일본의 성과 이름을 쓰게 했고 조선의 언어와 한민족의 정신과 정서까지 말살하는 정책을 펼쳤다.

일본은 아직도 역사를 왜곡하는 행위를 그치지 않고 교과서에 잘못된 사실을 기술하고 여전히 독도를 일본의 영토라는 망발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는 총과 칼로 전쟁을 하는 시기가 아니라 자본과 경제로 전쟁을 하는 시기이고 첫째도 국익이며 둘째도 마지막도 국익이고 경제적 이익이 없다면 국가는 존재할 수 없다.

과거 피로 얼룩진 유럽의 역사가 존재하지만 유럽은 유럽연합(EU)을 결성해 같은 화패를 쓰고 서로 교류하며 익을 나누고 있으며 유럽 국가 간의 화합이 없다면 유럽의 경제는 성립할 수 없는 구조가 되었다.

아무리 아프고 비참한 가의 역사가 있더라도 이 시대에는 과거사가 국가의 이익에 장애가 돼서는 안 된다.

아픈 역사는 잊지 말아도 국익과 나라의 경제에 득이 되는 실리는 반드시 챙겨야 하며 단절되었던 국가 간의 교류는 재가동돼야만 한다.

우리가 억하심정으로 일본에게 보복을 할수록 국가의 경쟁력은 뒤쳐지고 손해만 늘어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한일 간의 외교가 단절되자 명동에서 현찰을 마구 써대던 일본 관광객들자취를 감췄고 지난해 자동차용 일제 반도체를 수입하지 못해 울산 자동차 공장이 정지되었던 사태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천연자원이 없는 한국은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이고 한국과 미국, 일본의 교류가  없다면 우리나라의 경제는 성장할 수 없다.

지난해 한국을 방문한 바이든 대통령이 공식 외교 절차를 생략하고 삼성 반도체 공장을 먼저 방문한 유래 없는 세일즈 외교를 기억한다면 조조의 간교함 보다 더욱 간사한 정책도 필요하며 국익을 위한 간사한 외교도 동원해야 한다.

요즘 시대가 지향하는 능력주의(meritocracy)는 간교한 처세도 포함될 수 있고 간사한 전략도 뛰어난 능력이다.

예나 지금이나 역사를 통해 볼 수 있는 사실은 국익을 위해서라면 대를 위해 소는 과감히 버려야 하며 작전상 후퇴는 어느 때나 필요한 법이다.

유럽연합에서 보듯 국가 간의 교류와 협력이 없다면 국가의 성장은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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