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지 못할 세상
필자는 사업을 일찍 시작했다.
31세에 법인을 처음 설립했으니 남들 보다는 빨리 시작한 것 같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하고 싶은 업종을 선택하거나 오랜 기간 근무했던 직종과 관련된 사업을 시작한다.
이외로 친구나 지인이 추천하는 사업을 시작하는 경우도 있지만 실패할 확률이 높다.
필자는 뉴욕 기업에서의 경험을 살려 겁 없이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업종은 내 경험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었다.
한국에서 사업을 시작한 솔직한 이유는 내가 선택한 업종에 이윤이 컸기 때문이고 젊었지만 사람을 다루는 게 자신이 있어서이다.
그 자신감은 뉴욕에서의 경험이 큰 몫을 했고 젊음이라는 풍족한 에너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엄마는 뉴욕에서 공부했으니까 그냥 가족 회사에 들어가라고 하셨기 때문에 사업자금 융통해 달란 얘기는 아예 꺼내지도 못했다.
그러나 두드리면 열린다는 성경 말씀처럼 내 처지를 아는 지인이 무료로 사무실 한쪽 구석을 내 준 곳에 칸막이를 치고 책상 두 개와 컴퓨터 두 대가 전부인 회사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창업한 비즈니스가 벌써 25년이 넘었으니 나는 한 우물만 꾸준히 판 셈이다.
물론 경제 상황에 따라 업종 변경은 몇 번 했지만 상품만 바뀌었지 비즈니스 자체가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헤아려 보면 내가 상대한 사람은 직접 만난 사람만 약 2,500명에서 2,600명은 될 것이다.
25년이 되는 기간 동안 일이 아니라면 상종 조차 하기 싫은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고 그중 사기꾼들은 필자와 거래한 사람의 10% 정도로 가늠한다.
10%로 가늠한다는 것은 일은 진행했지만 상대를 믿지 못해서 중간에 그만뒀기 때문이고 마감까지 갔더라면 큰 손실을 볼 확률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사기꾼은 거래처가 손해를 보든 고객이 손해를 보든 돈만 벌겠다는 말종을 얘기하는 것이다.
비즈니스를 하는 동안 돈독한 관계를 맺고 지금까지 가족 같이 지내는 거래처 사장님, 회장님은 딱 3명뿐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비즈니스를 하는 동안만 서로 신용을 지키고 몇 년이 되면 호형호제(呼兄呼弟)하며 술도 자주 마시지만 상대와 거래가 끊어지고 나면 지인이 아닌 남으로 존재가 바뀐다.
거래를 하며 불협화음은 조금도 없었던 관계가 그냥 남으로 변하는 것은 흔한 일이어서 사업하는 사람들에겐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업을 하다 보면 민사소송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자주 생기는데 소송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단 하나, 돈 때문이다.
일이란 것은 견적대로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정해진 기간에 프로젝트를 하자 없이 마감하면 바로 입금이 되는 게 순서이다.
입금이 늦어지거나 나눠서 입금하는 경우는 워낙 많아서 서로 조율만 하면 되는 문제라 기다리기만 하면 큰 일은 아니다.
하지만 기한을 안 지키는 것도 계약위반에 해당되기 때문에 원래는 늦는 기간에 대한 이자를 지급해야 한다.
필자는 민사소송을 여러 번 했다.
인생을 살면서 경찰서와 법원 출입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하는데 필자는 법원 문턱을 자주 넘나들었다.
계약서에 명시된 자신의 실책이 있더라도 본인이 손해를 감수하고 합의를 하면 그만이지만 서로의 의견이 대립되어 한 치의 양보도 없다면 곧바로 민사소송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가끔 겪는 일이다.
합의가 안 돼서 법원에 소장을 내면 재판 전, 판사는 지급명령서를 발행한다.
보통 지급명령서를 받은 사람은 대부분 돈을 지급하지만 당사자가 손해 볼 수 없다고 이의제기서를 제출하면 양측 간의 소송은 곧바로 진행된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계약서가 있고 증거와 녹취기록이 있으면 재판에 승소하는 게 상식이지만 재판은 절대 그렇지 않다.
프로젝트가 크고 거래액수가 많다면 양측은 변호사를 선임하고, 의뢰인에게 소송비를 받은 양측의 변호사는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법정 싸움을 벌인다.
민사사건 하나의 재판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경우는 극히 희박하고 준비서면과 이의제기서, 증거와 녹취록 등이 총동원되어 양측의 공방은 계속되기 때문에 소송은 4~6번의 공판을 거쳐야 재판이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증거로 사용되는 자료는 사소한 양측 간의 대화 내용도 녹음이 되었다면 재판을 뒤엎을 수 있는 증거가 된다.
민사재판인 경우 1년 안에 판결이 나면 아주 빠른 것이지만 보통 2년에서 3년이 소요되는 상황이 많다.
만일 거래 액수가 어마어마하다면 고등법원에서 대법원까지 재판이 진행이 되므로 재판이 10년을 가는 상황도 있으며 이런 재판은 뉴스를 통해 종종 보도되는 사건이다.
돈을 받으려는 원고나 돈을 지불하지 않는 피고는 재판 때문에 엄청난 소송비를 부담해야 하고 몸도 마음도 피폐해지는 것이 장기간의 소송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재판을 몇 번 겪고 나면 사람을 못 믿게 되는 게 아니라 안 믿게 된다.
그러니까 돈이나 뭔가를 주고받는 상황에서는 상대를 의심부터 하고 만나야 마음이 편하다.
먼저 의심을 하면 상대와 대화에서 세심한 것 하나까지 짚어 볼 수 있고 경계를 하기 때문에 실수는 가급적 안 하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의심이 많은 필자도 사기꾼은 알아볼 방법이 없다.
'지키는 사람 열이 도둑 하나를 잡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듯이 작정하고 접근하는 사기꾼을 구별하기는 불가능하다.
많은 사람과 비즈니스를 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사람을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지 못하듯 한두 달 겪어 보고 상대를 파악할 수는 없다.
사람의 마음이란 언제나 한결같을 수는 없는 까닭에 언제 변할지 모르는 게 인간이고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세상을 살면서 좋든 싫든 많은 사람들과 접촉을 피할 수 없고 상대하는 모든 사람이 좋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특히 평판도 좋고 몇 년 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던 사람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딴 사람이 되는 경우는 부지기수라 이젠 그런가 보다 하고 살아야 마음이라도 편하다.
필자가 50이 넘으면서 체감한 사실은 인간처럼 이기적인 영장물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보호본능(protective instinct)이 있는 까닭에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에서는 피하거나 방어를 한다.
즉흥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본능이라면 본능에 더해 자신을 위해서는 거짓말도 하고 이간질도 한다.
사람을 포섭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고발도 한다.
못돼 먹은 사람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인간의 보호본능이 그런 것이며 성직자, 교수, 전문직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도 똑같다.
요즘 시대는 '눈 감으면 코 베어가는 세상'이 아니라 멀쩡하게 눈 뜨고 사는데도 사람을 속이고 사기 치는 세상이다.
실예를 들면 쇼핑몰에 등록된 개인 정보가 아무런 제재 없이 보험회사로 넘어가서 보험가입 광고 전화와 문자는 하루 걸러 자주 오는데 개인정보를 사고파는 행위는 명백한 불법임에도 근절되지 않고 여전하다.
상품을 서핑하다 장바구니에 넣어두기만 했는데 월말에 카드 값에서 쇼핑몰 가입비 몇천 원이 빠진 경우는 많은 사람이 경험했을 것이다.
확인해서 쇼핑몰에 따져야 해지를 해주고 쇼핑몰에서 대는 핑계라면 전산 오류나 고객님께서 잘못 키보드를 누른 것 같다고 죄송하다고 하면 그만이다.
이런 경우 기업 입장에서는 돈 몇천 원 돌려줬으니 불법은 아니라 할 것이고 어르신들이나 휴대폰을 자주 안 보는 사람들은 카드사용 내역을 문자 알림 처리하지 않으면 모르고 매달 쇼핑몰에서 돈을 빼간다는 사실이다.
가입회원 몇백만 명 회원 중에 1%만 계산하더라도 3,000원 × 1만 명= 3천만 원을 기업은 매달 챙길 수 있다는 것이고 따지는 고객에게는 전산오류여서 돌려줬다 하면 불법이 아니다.
그러니까 일일이 따지지 않는 어르신들이나 휴대폰 잘 안 보는 기성세대의 가입비 몇천 원은 기업이 챙긴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국민들이 매일 이용하는 쇼핑몰에서도 이런 일이 빈번한데 하물며 큰돈이 오가는 비즈니스는 잠시만 방심해도 사기를 당할 확률은 높을 수밖에 없다.
사실 사기를 치는 사람들은 오랜 친구나 믿었던 지인, 수년간 같은 사무실에서 함께 일했던 직장동료도 그런 짓을 하는 사례가 있고 심지어 친척들이 사기를 치고 구속되는 경우는 유명인에게 가끔 일어나는 사건으로 뉴스에 보도된 적도 있다.
그런 뉴스를 보면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생각해 보면 세상에 그런 인간들이 너무 많아서가 아니고 관계된 사건, 사고가 자주 뉴스에 보도되기 때문에 나쁜 놈들이 많아 보이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못된 인간들보다 좋은 사람들이 훨씬 많고 사회는 좋은 사람들의 긍정의 힘으로 구동되기 때문에 오늘날 첨단시대까지 역사는 흐르는 것이다.
확률적으로는 분명 일부 못된 인간이 믿음과 신뢰를 이용해 사기를 치는 것인데 돈도 돈이지만 믿었던 사람에게 그런 일을 당하면 평생 치유되지 않는 상처를 안고 살아야 한다.
필자가 겪은 경험을 말하자면 10년 넘는 기간 동안 가족처럼 지내온 선배한테 배신을 당한 뒤로 사람을 믿지 않은 마음이 배양되기 시작했고 7개월 간 임금을 주지 않은 인간이 사업하기 전 내가 근무했던 회사의 대표였기 때문에 더더욱 사람을 믿지 못했다.
거기에다 민사소송을 4번이나 했던 비즈니스의 과정에서 사람을 안 믿게 된 것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고 내가 모든 사람을 대할 때 항상 색안경을 쓰고 보는 것은 아니다.
물론 주고받는 거래 관계에는 경계를 하지만 정서적 교류가 전부인 친구나 지인들은 의심을 할 필요가 없는 관계이다.
그런 이유에서 필자는 흉허물 없는 친구 외에는 술자리를 피한다.
술에 취하면 아무리 이성적인 사람이라도 느슨해지고 감성적으로 변하게 되어 말실수를 하기 쉽다.
몇 년 전 국회의원을 지낸 변호사이자 유명 방송인이 술자리에서 말을 잘못한 게 녹음이 돼서 아나운서 협회에서 고발을 당해 방송 MC를 하차하고 모든 명예가 나락으로 떨어진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요즘 시대는 술을 권하는 문화가 없을 뿐 아니라 사업상 술자리를 해야 한다는 사람들은 술을 좋아하는 주당들의 핑계일 뿐이므로 항상 술자리에서 사업 얘기를 하는 것은 아예 차단하고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필자가 조심해야 할 사기성이 농후한 인간을 예로 들면
첫째, 사기꾼들은 말이 청산유수이다.
사람을 설득하는데 고수이고 듣다 보면 그 사람의 말을 경청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둘째, 묻지도 않은 자랑을 잘한다.
지방에 땅이 있고 과거 대기업에서 하청을 받아서 무슨 무슨 사업을 했었다고 자랑을 하지만 시기와 무슨 사업이었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다.
셋째, 명함이 많다.
대부분 봉사 단체의 회장, 부회장 명함 및 컨설턴트 법인의 사외이사의 명함 그 외에도 비영리 단체의 명함 등 보통 명함 세 개는 있다.
넷째, 명품 슈트와 수입차는 기본이다.
다섯째, 대부분 강남에 사무실이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기꾼들은 완전 초짜라서 사업을 오래 한 사람들은 금방 알아보고 상종조차 안 하지만 이런 초짜들은 대부분 순진하고 교육 수준이 낮은 땅 부자가 타깃이다.
매스컴을 통해 투자 설명회를 유치하고 땅 부자에게는 회사의 이사로 직책을 주고 실제 거액의 월급도 몇 달간 지급한다.
그러다 투자금이 모이면 야반도주(半逃走)를 하는데 큰돈을 투자한 사람들은 매달 월급을 받은 이사와 이사가 추천한 사람들이다.
문제는 그 회사의 이사로 몇 달 월급을 받은 사람은 공범으로 몰려서 재산도 다 날리고 구속되는 사건은 잊을만하면 뉴스에 나온다.
상식적으로 이런 사기꾼을 믿을 사람은 없을 것 같지만 속아 넘어가는 피해자들이 많이 발생하는 것은 사실이다.
공자의 가르침에서 유래된 교언영색(巧言令色)은 교묘하고 화려하게 말을 꾸며 얼굴빛을 곱게 하는 사람 중에 어진 이는 드물다는 뜻이고 예나 지금이나 사기꾼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사기꾼 중에 고수들은 유명 인사들과 친분이 있고 심지어 정계에도 손이 닿는 작자들이 있다.
정당의 당원으로 입당해서 후원금을 많이 내고 후보 선거운동에 앞장서서 방송에 얼굴을 스캔한다.
실제 정당 활동에 참여하고 그렇게 정치인과 친분이 쌓이면 그 자체로 광고가 되는 것이므로 그가 하는 사업은 업종을 몰라도 신임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메가(mega)급 대형 사기를 치는 작자로 몇 백억 내지 몇천억을 사기치고 해외로 도피하는 수법을 쓴다.
나중에 피해자가 생기면 후원금을 받은 정치인은 공범으로 몰려 정치 인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 처럼 방송에 대 놓고 자신을 홍보하고 대중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 인간을 일반인이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의심 많은 필자도 사기를 당할 뻔한 적이 두 번 있었다.
7년 동안 친분이 쌓인 S사장님이 메가(mega)급 사업에 참여할 생각이 없냐고 제안을 했고 디테일(detail)한 사업계획서를 보여 주면서 며칠 검토해 보고 연락을 달라고 했다.
그 S사장님은 매일 새벽 헬스클럽을 6년이 넘는 기간 동안 같이 운동을 했고 가끔 식사도 하고 술도 자주 마신 사이이며 특히 그분은 12층 건물의 소유주라 일단 의심은 하지 않았다.
서류를 꼼꼼히 검토해 보니 실제 가능성은 있었지만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그리고 예상 견적에서 이익금이 투자금의 5배가 넘었기 때문에 다시 서류를 검토하고 확인에 확인을 거듭했지만 사업계획서대로라면 진행만 힘들지 내 판단에 가능성은 있었다.
아무래도 액수가 너무 커서 자문을 구해야 할 것 같아서 50 page 제안서를 핵심만 정리해서 10 page로 줄이고 20년 넘게 하청을 주신 김 회장님께 상의를 드렸다.
서류를 검토하신 김 회장님은 기획실장을 불러 업무를 지시했고 며칠 후 답변을 주시겠다고 했다.
사무실로 돌아가서 하던 대로 일을 하고 퇴근을 하려는데 김 회장님한테 전화가 왔다.
며칠 검토해 보겠다고 하신 분이 당일날 전화를 주시니까 서류에 하자가 있나 생각하고 전화를 받았다.
김 회장님은 'S사장이 사기 전과 2 범이고 조그만 구멍가게하던 사람인데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몇 년 전에 S사장 사무실에 칼 들고 찾아와서 내 돈 내놓으라고 소동 피운 사람이 2명이나 있었다.'는 것이다.' 사업계획서를 보시고 김 회장님도 참여하고 싶은 생각에 뒷조사를 하신 것인데 혹시나 내가 곧바로 일을 시작할 것 같아 급하게 전화를 주신 것이다.
나는 즉시 그만뒀고 전과 있는 사람이 무슨 해코지라도 할 것 같은 생각에 며칠 후 웃으면서 인사를 하고 헬스클럽을 옮겼다.
그런 일을 겪고 나니 사람은 오랜 친분이 있어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앞으로 술자리도 가려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몇 년 후 5년가량 사귄 친구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즐겁게 술을 같이 마셨다.
강사장이란 그 친구는 이해관계는 전혀 없는 사이였고 5년 전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됐는데 사람이 호탕하고 성격이 좋아서 한두 번 술자리를 함께 하다가 친구가 된 사이다.
술자리를 같이 한지 며칠 안 됐는데 오늘 꼭 할 말이 있다며 저녁에 만나자고 했다.
횟집에서 싱싱한 도미회에 소주를 마셨는데 회가 너무 싱싱한 탓에 소주가 워낙 달았다.
테이블에 빈 병이 세 병 쌓이자 할 말이 뭐냐고 내가 물었다.
강사장이 시작한 본론은 지금 괌(Guam)에서 진행할 국정 사업이 있는데 그 프로젝트에 참여할 의향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바로 "사업하는 동생이 있다고 들었는데 동생하고 같이 하지 왜 나한테 그런 얘기를 하느냐?"라고 물었다.
강사장은 "미국에서 공부하시고 해외 업무 경험이 많으신 데다 영어로 진행해야 되는 일이어서 제안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국가에서 하는 국책사업이라 확실하고 만일 실패하더라도 대표님이 손해 보실 일은 없습니다. 일이 잘 안 돼도 사전에 계약한 금액은 그대로 지급됩니다."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사무실에서 하기로 하고 금요일이어서 편하게 술을 마시고 헤어졌다.
다음 주 월요일 오전에 나는 강사장 회사로 갔다.
사무실은 아담하고 깨끗했다.
사무실 벽에는 전직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 있었고 그 옆에는 현직 법무부 장관과 웃으며 악수하는 사진이 걸려 있었다.
이 사람 하는 말이 거짓말은 아니구나 생각하며 말을 꺼냈다.
"무슨 사업에 대한 말씀입니까?" 하고 내가 먼저 묻자 "아직 공개되지 않은 프로젝트여서 보안이 필요합니다." 이어 "수락하시면 이번 주에 시청에서 담당 공무원과 함께 자세한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며칠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고 강사장 회사를 나왔다.
좀 있다 점심 함께 하자는 강사장의 권유를 뒤로 하고 나는 곧바로 고문 변호사 사무실로 향했다.
가는 내내 '실패해도 돈은 준다. 보안이 필요하니 아직 공개 못한다 '라는 강사장의 말이 계속 귓전을 맴돌았고 일단은 법적인 자문이 필요했기 때문에 변호사 사무실로 들어갔다.
내용을 자세히 들은 변호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무슨 프로젝트인지 모르지만 대표님은 손실이 없을 것이라고 말은 그렇게 해도 국책사업은 워낙 여론이 들끓고 말들이 많은 사업이고 일이 잘못되면 책임을 반드시 져야 합니다. 이번 정권에서는 어떻게 고위급 공무원이 힘을 쓰면 일이 잘못돼도 그냥 넘어갈 수 있겠지만 정권이 바뀌면 실패한 국책 사업은 반드시 감사를 통해 실무자는 구속될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잠시 후 변호사가 말했다.
"이번 일 참여 안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점심시간이 되자 변호사와 점심을 같이 들고 나는 사무실로 돌아왔다.
급하게 강사장이 말한 내용을 보고서 형식으로 정리하고 김 회장님 회사로 향했다
경험 많은 김 회장님과 상의를 하고 싶었다.
오후 늦게 도착해 김 회장님께 인사를 드리고 이런저런 안부, 인사도 하지 않고 곧바로 보고서를 보여 드렸다
3분쯤 보시고 나서 돋보기를 벗으시고는 "자네 나중에 쇠고랑 찰래? 이런 뉴스 한두 번 봤어. 일이 잘 돼도 정권이 바뀌면 없는 트집도 만들어서 실무자만 구속시키는 거 몰라." "일을 일이 년 한 사람도 아니면서 왜 이런 걸 몰라. 아예 생각도 하지 말아."
시간이 7시가 넘자 필자와도 여러 번 거래를 한 이 회장님을 불러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바쁜 하루를 정신없이 보내고 김 회장님께 꾸지람을 한바탕 듣고 나니 소주가 달기만 했고 시원하게 잘 넘어갔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2차를 갔고 술집 사장은 눈치가 엄청 빨랐다.
내 옆에 앉아서 "대표님! 오늘 안 좋은 일이 있으셨나 봐요. 오늘 유난히 얼굴이 많이 상하셨어요." 하고는 두 분 회장님은 뒤로 하고 내 술 시중만 계속 들었다.
아마 김 회장님이 가기 전에 술집 사장한테 미리 언질을 주신 것 같았다.
저녁 식사 때 소주 3병을 비웠지만 나 혼자 2병은 마시고 자리를 옮겨 위스키를 절반 이상 비우고 나니 술꾼인 나도 취기가 귀까지 올랐다.
옆으로 오라고 김 회장님이 부르셔서 옆으로 갔다.
위스키 한잔을 맥주컵에 따르시더니 나에게 건네며 말씀하셨다.
"요즘 자네 회사 매출이 안 좋은 거 잘 알아. 그렇다고 앞 뒤 생각도 없이 아무 일이나 덥석 물면 어떡해. 오늘 실컷 마시고 잊어버려." 하셨다.
잠시 후 술이 반이나 남았는데 한 병이 또 들어왔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내일 오전에 미팅이 있어서 이 회장이랑 먼저 일어날게. 계산 다 했으니까 편하게 놀다 가. 오야봉이 하루 출근 안 했다고 뭐라고 할 사람 없어. 자네 오늘 몸 고생 마음고생 많이 했으니까 실컷 마시고 가서 푹 자." 그리고 일어나셨다.
나가시면서 "오늘 대표님. 잘 모셔라" 하는 당부도 잊지 않으셨다.
나는 밖에 까지 나가서 차 타시는 거 보고 고개 숙여 인사를 드리고 다시 술 집으로 다시 들어갔다.
윗 분들 없는 자리에서 편하게 마시고 노래도 불렀다.
그날은 집에 어떻게 왔는지 몰랐고 택시 기사가 "손님. 다 왔습니다."하고 깨어 보니 새벽 4시가 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숙취가 안 깬 상태에서 멍하니 어제 일을 생각했다.
너무 바빴던 하루를 떠올렸다.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회장님 말씀처럼 앞 뒤 안 가리고 일 욕심에 너무 서두른 자신이 창피했다.
며칠만이라도 생각할 여유를 가졌어야 하는데 강사장에게 말려 든 것 같은 생각에 속이 상했다.
강사장은 미끼를 던지고 내가 물기를 바란 것인데 강사장의 계획대로 내가 미끼를 문 것이다.
무슨 사업인지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일이 잘못돼도 약속한 대금은 지급한다는 말에 마치 약장사 말을 듣고 약을 산 시골 할머니와 같은 행동을 했던 것이다.
사실 어제 변호사 말은 안 들은 게 아니라 나는 그 국책사업을 진행할 마음이었다.
김 회장님을 찾아간 것도 응원해 주시기를 바란 것이고 어쩌면 김 회장님이 참여하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무슨 사업인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시기적절하게 회사 사정이 안 좋을 때 제안이 들어왔고 나는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강사장의 의도는 책임은 피하고 떡고물만 먹으려는 속셈에 가족 대신 나를 선택한 것이고 하마 터라면 나는 expendable(소모품)이 될 뻔한 것이다.
책 꽤나 읽었다는 내가 논평도 쓰면서 뻔한 사실을 부정한 나 자신을 후회했다.
그렇다.
사기를 당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오랜 친분이 있는 친구나 지인에게 당한다.
믿음과 신뢰를 이용해 사기를 치는 것이고 곁에서 타이밍을 노리는 것이다.
자세히 보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에서 사기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탐욕 때문에 사기를 당하는 것이고 그 탐욕의 주체는 결국 돈이다.
우리는 그 돈 때문에 공부하고
그 돈 때문에 일하고
그 돈 때문에 행복하지만
그 돈 때문에 비참하고
그 돈 때문에 싸우고
그 돈 때문에 이혼하고
그 돈 때문에 생활하고
그 돈 때문에 하루를 보내고
심지어 그 돈 때문에 목숨도 끊는다.
그러나 그 돈은 아무도 영원히 소유하지 못한다.
우리는 매일 산을 오릅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지만 때론 숨 가쁘게 올라야 하는 급경사도 있고 포기하고 싶은 절벽도 있지요.
기분 좋은 화창한 날씨보다는 산은 종잡기 힘든 궂은날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한 걸음, 한 걸음 올라야 하는 게 산이요. 인생입니다.
함께 걷는 사람이 있다면 훨씬 고단함이 덜하지만 누구도 대신 걸어주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찍은 수많은 발자국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산에 있는 시간은 아무도 모르지요.
다만 그 발걸음을 멈추는 날까지 계속 걸어갈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