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고 확실한 행복

2025.07.13

by 여전히

실내화 없이 산지는 8일째. 따로 준비해온 술리퍼가 없어서 알베르게에서 양말로 다녔다. 침대에 들어갈 때면 양말에 묻은 이물질을 털고 들어갔지만 침대가 더러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또한 손도 더러워졌다. 론세스바에스 알베르게에서 5유로짜리 핑크색 쪼리를 팔았었다. 당시에는 색이 너무 촌스러워 나중에 다시 살 기회가 있겠지 하고 넘겼는데 이런. 없었다. 쪼리는커녕 슬리퍼도 안보였다. 오늘은 마트를 뒤져서라도 사야지 했는데 아니? 알베르게에서 파는 것이 아닌가!

보자마자 할렐루야가 나오더라. 숙박비와 쪼리를 결제하고 영수증을 받았다. 뭐지? 왜 한국어지? 작은 배려에 괜히 뭉클해졌다.

5번 룸에 들어갔다. 론세스바에스부터 꾸준히 마주쳤던 대만인 커플이 반겨주었다. 푸엔테레이나에서도 룸메였는데 두 번째 룸메가 되었다. 오늘 밤은 코골이 걱정은 없겠구나. 순례자가 적어서 그런지 모두 1층으로 침대 배정을 받았고 10인실을 아는 얼굴끼리 사용하게 되었다. 꼭 친구와 펜션에 놀러 온 기분이었다.

오늘이 더 좋아진 이유는 이 숙소에서 순례자들을 위한 배려가 곳곳에 보였기 때문이다. 넓은 주방, 남녀 따로 사용하는 화장실. 50센트에 이용할 수 있는 헤어드라이기. 그리고 아늑한 뒷마당까지.

이렇게 작은 것에 행복을 느껴가는 게 순례자길의 매력일까. 아니다. 이건 크고 확실한 행복이다. 나에게 주어진 아주 명확한 행복이다.


<오늘의 기록>

이동 도시 Najera 5:24 -> Santo Domingo de la Calzada 11:55

거리 22.9km

걸음 37.589

내일도 부엔까미노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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