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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무개 Sep 27. 2023

명료한 사람

   엄마에게는 수십 년 우정을 다져온 절친한 친구들이 여럿 있다. 옥자, 은자, 명덕, 귀옥 등 세대가 다른 내 귀에 영 촌스럽기만 한 이름들 틈에 유일하게 촌스럽지 않은 수현(가명) 이모가 있다. 수현 이모는 우리 집과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어 아픈 엄마를 보러 자주 집에 들렀었다.

  이모의 직업은 보험설계사다. 청록색 SUV 차량에 보험설계 사은품을 한가득 싣고 다녔다. 엄마가 떠난 뒤로 종종 이모와 둘이 만남을 가졌는데, 이모 차에 타기 위해선 먼저 조수석 치우는 일을 기다려야 했다. 이모는 아마 mbti 'p'일 것이다. 하하.

  그렇게 사은품 더미를 트렁크에 몰아넣고 드라이브도 하고 이모가 아는 로컬 맛집도 탐방하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이모는 내게 엄마의 젊었을 적 이야기, 이모 자녀들 근황, 여행 다녀온 이야기, 성당 수녀님 이야기 등을 해주었다. 비워도 비워도 자동으로 채워지는 말 주머니가 있는 양 이모의 입에서는 이야기가 끊임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나는 이모가 자신의 삶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수현 이모는 그 시절 귀하다는 연애결혼으로 가정을 이뤘다. 충청도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엄마와 이모는 20대가 되어 서울로 상경해 각자 직장을 다녔다. 이모는 일을 하는 동시에 야학을 다녔는데, 그때 사제지간으로 만난 남편과 서울에서 살림을 꾸렸고, 그 이듬해 첫아이를 품에 안았다. 야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던 남편은 결혼하자마자 일을 그만두었단다. 그러고는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다시 일을 시작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이모가 가장 노릇을 하며 생활전선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다시 고향으로 내려와 인쇄소를 차렸다. 디지털 시대 이전이니 그 시절엔 인쇄소가 흥했다. 그러던 중 아이가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인쇄업의 쇠퇴로 가게도 폐업하게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이모는 차를 몰고 보험 일을 시작했다. 보험설계사는 사무실에 붙어 있어야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시간을 비교적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 월초에 실적을 바짝 채워놓고 아이의 치료를 위해 서울 병원을 수시로 오갔다. 그렇게 오롯이 혼자 생활비를 벌며 살림에 아이 간병까지 도맡았다.

  이모의 남편은 매일같이 친구의 가게로 출근 도장을 찍었다. 그곳에서 특별히 일을 하는 것도, 월급을 받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매일 드나들 뿐이었다. 그는 성격이 매우 불같았다. 돈을 벌어오지도 않으면서 아내에게 온갖 잔소리를 늘어놓고 폭언도 일삼았다. 가정불화가 심했다. 이모의 정신은 야금야금 갉아먹혔다.

  이모는 신앙의 힘으로 견뎠다. 힘에 부친 지 오래인 고된 현실을 타파하려 성당을 찾았단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늘 그래왔듯 스스로 이겨낼 궁리를 했다. 주저앉는 법이 없었다. 동이 트면 눈을 뜨고, 눈이 떠지면 몸을 일으켜 주어진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애초에 포기는 선택지에 없었다. 그 덕에 이모의 두 자녀는 모두 멋지게 장성했다. 백혈병을 이겨낸 첫째는 의사가 되었다. 육체와 정신을 모두 갈았던 그녀의 희생이 빛을 발휘했다.

  언젠가 이모는 내게 말했다. "남들이 봤을 때 나는 얼마나 불행한 여자야. 남편은 일을 안 하지, 애는 아프지.." 이모는 내가 자살시도를 했고, 여전히 우울증에 허덕이고 있음을 잘 안다. 그런 내게 자기 연민에 빠지지 말고 남들이 뭐라 생각하든 내 중심 잡고 긍정적으로 살아내라 했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고민 없이 시도하고, 여행이 가고 싶으면 당장 짐을 싸고, 몸이 아프면 치료를 받으면 되는 거다. 무엇이든 꼬아서 생각하지 말자는 이모다.

  명료한 사람, 수현 이모는 내게 그렇다. 늘 해답을 가지고 있으며 멈칫 주저함 없이 답을 말한다. 물론 그 해답이 내 삶에도 백 프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자신과 그 자녀의 삶에는 매우 긍정적이다. 이모를 만나고 오는 날에는 엄청난 용기를 얻는다. 꼬여버린 실타래가 맥없이 탁 풀리는 것처럼 무겁게 짓누르던 생각과 고민들이 솜사탕처럼 가벼워진다. 어렵게만 느껴졌던 것이 단순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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