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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무개 Sep 25. 2023

유년시절 02. 왕따 방관자

고해성사

  나는 199n 여름, 소도시의 산부인과에서 태어나 산골마을에서 쭉 자랐다. 한 부락에 애들이 서넛밖에 없는 딱 옛날 전원일기에 나오는 그런 깡촌이었다. 산과 들에서 흙먼지 뒤집어쓰며 뛰놀다 인근에 하나뿐인 작은 분교에 입학했다. 유치원에서부터 자연스레 함께 올라간 친구가 나를 포함해 일곱이었다. 그중 겨우 네 명이었던 여학생 사이에 흡사 구마적 같던(?) 지연(가명)이의 독재가 시작되었다. 지연이는 자신을 제외한 여자아이 세 명 중 두 명을 번갈아 가며 왕따 시켰다. 나머지 한 명은 누구냐고?

  바로 나다.

  오로지 나만 왕따 로테이션에서 제외 됐다.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지연이가 나를 절친으로 여긴 탓이었으리라 짐작한다. 물론 절친이라 하기엔 나는 지연이를 꽤 많이 무서워했다. 소심했던 나는 다른 두 친구가 번갈아 왕따를 당할 때에 찍소리도 못하고 그녀의 뜻을 따랐다.


  지연이가 "오늘은 a가 싫어!" 하면 우리는 모두 a에게 대화를 건네지도, 눈길 한 번 주지도 않았다. a에게 보란 듯이 세 명이 꼭 붙어 다녔다. 그러다가 알 수 없는 심경의 변화로 b가 싫다고 하면 a는 가슴팍을 쓸어내리고 b의 왕따몰이에 가담했다. 지연이의 소규모 왕따놀음은 그다음 해에도 이어졌다. 그러다 지연이는 전학을 갔고 지연이의 전학과 동시에 왕따 로테이션은 끝이 났다.


  이듬해 남학생 중 한 명인 준영(가명)이가 나를 가리키며 쟤는 지연이가 친구들을 왕따 시킬 때 그냥 두고 보기만 했다며 모두의 앞에서 나를 힐난했다. 얼굴이 시뻘게졌다. 너무 수치스러운 마음에 도리어 내가 더 크게 성을 냈다. 집에 돌아와 이불을 퍽퍽 차며 생각을 해보니 준영이 그 자식도 똑같이 방관했다. 그래놓고 나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다니... 무척이나 화가 났다.


  그러나 그렇다 한들 내가 방관자가 아닌 게 되지 않았다. 나는 두 말할 것 없이 왕따 방관자였으므로 준영이가 공개저격 했을 때 얼굴을 붉히고 성낼 것이 아니라, 친구들에게 진정성 있게 사과 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 했고,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뜨문뜨문 그때의 생각이 나 마음이 무겁다.


  나는 운 좋게도 여자아이 세 명 중 지연이의 최애로 등극해 왕따 로테이션에 들지 않을 수 있었다. 만약 내가 아닌 다른 친구를 가장 애정했다면 나는 이유도 모른 채 하루 걸러 한 번 혹은 일주일 중 며칠 동안 지속되는 지연이의 눈흘김과 친구들의 등돌림에 온 세상이 무너졌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두 친구의 편이 되어주지 못했던 것이 너무 미안하고 또 미안한 마음뿐이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지 못했던 것이 너무 한심하고 후회스럽다.


  그때의 친구들과는 연락이 끊긴 지 오래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성인이 된 이후 얼굴을 본 것은 오직 지연이 뿐이다. 한 번은 스무 살 기념 동창모임에서, 한 번은 엄마 장례식장에서. 왕따를 당했던 두 친구는 엄마의 장례식에서도, 동창모임에서도 만날 수 없었다. 연락처도 알지 못한다. 뒤늦게 깨우친 잘못에 대한 사과를 직접적으로 하지 못해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래서 이렇게라도 고하여 내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빈다. 그때 정말 미안했고 지금은 행복하길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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