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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무개 Sep 30. 2023

자존감 도둑

  기가 죽어살았다. 지척에 사는 외할머니의 영향이 컸다. 외할머니는 남존여비에 입각한, 남아선호사상의 결정체였다. 그녀는 다른 손자녀보다 차로 5분 거리에 사는 나를 유독 미워했다.
  3남 1녀 중 혼자 딸로 태어난 엄마는 어려서 많이 아팠다. 엄마는 할머니의 아픈 손가락이었고, 그 아픈 손가락을 더없이 아프게 하는 이 바로 외손녀인 나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십 대 초중반, 아빠에 대한 분노가 나름 컸던 시절 엄마, 외할머니, 나 셋이 밥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던 중 아빠 얘기가 나와 그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았다. 싸늘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못할 말도 아니었으니.
  집에 돌아와 엄마는 할머니가 나를 두고 어떻게 딸년이 지 아빠에 대해 그렇게 말할 수 있냐 저년 기가 너무 살았다. 기를 죽여놔야 된다고 했단다.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욕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엄마와 나를 힘들게 하는 아빠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말에 저런 반응이 돌아오다니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양반이 오빠가 아빠에 대해 비난하면 깔깔 웃는다. 손녀가 내뱉는 비난의 말은 기 살은 년이 지껄이는 못돼 처먹은 소리이고, 손자의 비난은 귀여운 투정으로 들리는 듯하다.

  아빠가 밥 먹는 모습은 잘 먹어 보기 좋다며 종일 냉장고 문을 열어 이것도 저것도 더 내오려 안달인데, 내가 뭘 먹거든 저렇게 살이 쪄서 어쩌냐는 둥, 네가 알아서 갖다 먹으라며 소리를 빽- 지른다. 어떤 날은 탕수육을 먹다 소리를 꽥 지르고 어떤 날은 선물을 가져온 내게 또 성질을 꽥 낸다. 외할머니는 전생에 오리였을까...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빠가 아들인 줄 알 것이다. 살아생전 엄마를 가장 힘들게 한 사람이 아빠인데, 어째서 외할머니는 아빠에 대한 원망은 눈 씻고 봐도 없고, 도리어 그를 떠받들 듯하는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지점이다.

  반면에 나는 밥을 먹으면 무조건 설거지를 해야 했고, 나 대신에 외삼촌들이 반찬을 나르는 날에는 온 집안이 난리가 났다. 쟤를 시키지 왜 외삼촌인 너희가 그걸 하고 있냐며 야단이었다. 거실바닥에 아들이며 사위, 손자들이 수두룩 빽빽 앉아있는데, 굳이 굳이 기 살은 손녀년을 시켜야 마음에 안정이 오나 싶었다. 심지어 외숙모 댁에 손님으로 방문했을 때에도 내가 설거지를 하도록 닦달을 하기까지 했으니 원.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라는 양반이지만, 나는 그 땅에도 속하지 못하고 그냥 밭고랑이나 가는 쟁기나 호미인 듯했다.


  저렇게 모질어도 다정한 손녀가 되어보겠다고 옆에 붙어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늘어놓으면 뱁새눈을 하고는


"네가 잘못해서 그렇게 됐지?"

"네가 친구가 있어? 어딨어 네가?"

"너랑 살기 싫다고 친구가 집을 나간 거지?"

"네가 외숙모한테 안 좋게 얘기했지?"

"너 좋다는 머시마들 하나 없지?"


  무슨 말을 해도 다 내 탓이오, 세상에 나 좋다 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고, 멀쩡한 친구 하나 없는 사람이 돼버린다. 평범한 대화는 불가능이다.
  

  애증이라고 애써 포장한 지난 30년을 돌아보니 그냥 미움이었으리라. 여든이 훌쩍 넘은 그녀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안다. 그럼에도 나는 그녀에 대한 원망을 지울 수 없다. 상처 속 깊이 박힌 뾰족한 유리조각들이 수시로 나를 괴롭게 한다. 너덜너덜한 살갗은 아물지 못하고 자꾸만 염증을 낸다. 완벽히도 나는 미운 손녀이고, 그녀는 두말할 것 없이 내게 못됐다.
  싸늘한 눈길과 책망으로 키워진 나는 자존감이 다 갉아먹혔다. 고집이 세네, 저 년 기가 살았네 등의 말들로 인해 나는 무의식 중에도 그렇지 않은 인간이 되려 부단히 애를 썼다. 그렇게 나는 주체의식도, 고집도, 자아존중감은 물론이고 취향도 뭣도 없는 인간으로 길러졌다. 사회생활을 하고 인간관계를 넓히며 순간순간 자존감의 부재를 체감하며, 착한 아이 콤플렉스로 버무려진 삶이구나 느낀다.


  텅 빈 속을 쓸어내리며 구태여 나 아닌 누군가가 정해둔 효손의 도리는 이제 그만두고자 한다. 외할머니는 나의 자존감 도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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