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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무개 Oct 12. 2023

유년시절 03. 소심한 아이

  매년 석가탄신일마다 부모님은 나를 데리고 절에 갔다. 시내버스를 두 번 갈아타 꼬불꼬불 산길을 오르면 도착하는 절에는 또래아이들이 여럿 상주했다. 그 아이들은 매 해 만나는 데도  말 붙이기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해서 그 애들이 먼저 내게 손을 내밀어주지도 않았다. 내가 스스로 틈을 노려야 했다.
  나는 커서 멀쩡히 사회생활을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자신감 없고 수줍음이 극강에 달하는 내성적인 아이였기에, 매번 절 아이들이 없는 방의 한가운데 멀뚱히 앉아있었다. 그때마다 엄마는 내게 왜 친구들이랑 어울리지 못하고 여기서 청승맞게 혼자 앉아있냐며 소리를 바락바락 질렀다. 엄마의 샤우팅에 나는 튕겨져 나가 듯 아이들이 노는 옆방으로 쭈뼛쭈뼛 들어갔다. 아이들이 내가 혼이 나는 소리를 못 들었으리 만무하니 여간 창피하기 이를  없었다.
  그렇게라도 등 떠밀려 아이들 곁에 가면 나는 또 종일 잘 논다. 참 웃기게도. 하루나절 하하 호호 같이 뛰논 친구들에게 "다음에 또 봐~ 또 놀자~" 하며  세상 친근하게 작별인사를 한다. 그리고 다음 해, 그다음 해에도 도르마무처럼 똑같이 혼이 나고 쭈뼛쭈뼛 아이들 틈으로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유치원에 다니던 대여섯 살 무렵에도 나는 무척 소심했다. 당시 나는 보건소에 예방접종을 하러 가야 했다. 엄마가  근처의 중학교에 급식 조리 도우미로 일하러 갔기에 어린 나 혼자 로 10분 넘게 걸리는 거리를 이동해야 했다. 유치원 등원할 때 오빠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 시내버스를 자주 타봤지만 혼자서 멀리 면에 있는 보건소를 가기 위해 탄 것은 처음이었다.     

  종점에 하차했을 때 당연히 엄마가 정류장에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엄마는 없었다.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대다 우체국 앞 보도블록에 쪼그려 앉아 엄마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시간이 지체될수록 두려움은 커졌고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를 빤히 쳐다보며 지나가는 사람이 눈에 보였지만, 창피한 줄 모르고 동네가 떠나가라 꺽꺽 울어댔다. 한참을 울다 엄마를 발견했다. 나를 달래며 꼬옥 안아줄 것이라 생각했지만, 예상과는 달랐다. 엄마는 미간을 한껏 찌푸린 채 왜 길바닥에서 울고 있냐며 다그쳤다. 어휴! 한숨을 푹 내쉬며 혼자 저만치 멀어져 갔다. 그런 엄마를 놓칠세 꺼이꺼이 울면서도 다급히 뛰어갔다. 나는 뒤따라 걷는 내내 꾸중을 들어야만 했다. 바보 아니냐, 주변에 길을 묻든, 우체국에 들어가 기다리든 하면 될 거 아니냐, 입은 뒀다 뭐 하고 답답하게 왜 길에서 울고 앉았냐 등의 말들이었다. 퉁퉁 불은 눈을 하고 보건소에 들어갔는데 아니나 다를까 유치원 친구와 친구의 누나가 있었다. 엄마는 그 아이들 앞에서 내 흉을 보았다. 수치스러운 기억이 아직까지 마음 한 켠에 남아있다.


  나는 어릴 때 유독 많이 울었다. 외할아버지 회갑연에서 과자봉지를 빼앗아 가는 아저씨 때문에, 동네 언니와 블록 쌓기 놀이를 하다가, 유치원 급식실에서 밥 먹다 오빠가 자리를 뜨기만 하면 우는 등 별의별 일로 울기 바빴다. 엄마가 얼마나 답답했을지 유감을 표한다. 물론 요즘 같았으면 오은영 박사의 솔루션대로 내 마음을 먼저 헤아리는 일부터 했겠지만, 그 당시엔 그런 교육이 없었다. 외향적이고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없던 엄마는 소심하고 수동적인 내 정서와 행동이 타고난 기질이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었고 어떻게 교육하는 것이 옳은지도 알 수 없던 시절이었으니 충분히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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