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리에리를 갉아먹은 원흉은 질투가 아니라. 모차르트가 아니라.
중학교, 고등학교.
중간고사나 기말고사가 끝나면 음악 선생님들이 어김없이 이 영화를 틀어주곤 했다
.
하지만 언제나 중간까지만. 몇 번을 반복해보다 결국 끝을 보지 못했던 영화.
언젠가는 제대로 봐야지, 그렇게 마음에만 품었던 영화 아마데우스가 재개봉했다.
영화는, 사람이 무너지는 과정을,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라는 두 인물의 이름으로 보여준다.
이야기는 재능과 질투의 구도처럼 시작되지만, 그 안에는 훨씬 더 복잡하고 모순된 감정의 지층이 켜켜이 쌓여 있다.
18세기 빈. 늙은 작곡가 살리에리는 자살을 시도하고, 고해성사 속에서 자신이 모차르트를 죽였노라 고백한다.
이야기는 살리에리의 시선을 따라, 천재 모차르트와 그의 파멸, 그리고 그 곁에서 서서히 무너져간 살리에리 자신의 이야기를 교차하며 펼쳐진다.
모차르트의 찬란한 음악과 함께, 인정받지 못한 자의 분노와 고통, 신의 침묵 속에 빠져드는 인간의 얼굴이 드러난다.
질투의 이야기로 시작된 이 영화는, 결국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우리를 어디까지 데려가는지를 묻는다.
모차르트에게 아버지는 세계의 질서였다.
전통이었고, 규칙이었고, 무조건 복종해야 했던 절대적 권위였다.
그는 그 질서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했고,
왕의 명령조차 장난처럼 흘려보내며 자유를 택했지만,
가장 인정받고 싶었던 존재, 가장 두려워했고, 가장 애정했던 대상 또한 바로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린 자신.
그리고 자신이 없는 잘츠부르크에서 외롭게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부고는 모차르트를 서서히 무너뜨린다.
그는 자신의 오페라 돈 조반니 속에서 죽은 아버지를 되살려낸다.
그리고 그 앞에서, 주인공은 끝내 무릎을 꿇지 않고 죽는다.
화해를 종용하는 신의 음성 앞에서,
모차르트는 자기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저항한다.
그 무대 위의 죽음은, 모차르트 자신의 것이었다.
그런 모차르트를 바라보는 살리에리는
함께 무너져간다.
모차르트의 재능 앞에서 질투가 자신을 갉아먹기 시작했지만,
그를 진짜로 무너뜨린 건 질투 그 자체가 아니었다.
그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경애하면서도,
그를 시기하는 자신을 견딜 수 없었다.
신에게서 선택받지 못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고,
자신의 타락을 바라보는 자기 눈을 견딜 수 없었다.
아버지와 화해하지도,
아버지를 완전히 전복하지도 못한 채
끝내 무너지는 모차르트의 모습은
모차르트를 파멸시키면서도
그의 음악을 사랑하고,
그의 죽음 이후에도 수십 년을 죄의식 속에 살아가는 살리에리의 모습과 겹쳐진다.
사람들은 그렇게 산다.
자신을 통제하는 누군가의 목소리,
그 오래된 명령 속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그 명령의 테두리 안에서 안정을 느낀다.
그리고 그 테두리가 사라질 때, 우리는 오히려 더 불안해진다.
자유를 원하면서도 안정에 매달리고,
해방을 갈망하면서도 그 해방 이후의 공허를 두려워하는 것.
그렇게, 인간은 언제나 위태로운 존재다.
이러한 위태로움을 정말로 다독여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였을까.
모차르트에게는 아버지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아버지의 권위에서 벗어나기 위해 끝내 무너질 때까지 달아났지만,
사실은 단 한 번이라도 아버지의 따뜻한 인정을 원했을 것이다.
살리에리에게는 모차르트였을까.
그는 자신이 증오한 이를 통해,
자신이 끝내 갖지 못한 무언가를 이해하고 싶어했을것이다.
단 한 사람, 단 두 사람쯤의 진심 어린 사랑과 인정이 있다면.
우리는 스스로의 오래된 죄를,
그 누구도 모르게 짊어진 자기혐오와 죄의식을
그래도 세상을 열심히 살아갈 수 있을 만큼만은, 용서할수 있을것만같다.
[덧붙임]
《아마데우스》는 액자식 구성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늙은 살리에리가 신부 앞에서 고해성사를 하는 장면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사실 신을 향한 고백이 아니다.
청자는 신이 아니라 관객이고, 우리는 그의 고통과 변명, 사랑과 죄의식, 그 모든 무너짐을 듣는다.
살리에리는 끝내 신에게 용서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대표하여, 병동의 환자들 하나하나에게 죄사함을 내려준다.
신이 침묵한 세계에서, 인간이 인간을 용서하는 장면이다.
그는 신이 되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자신과 닮은, 인정받지 못한, 사랑했지만 미워했던, 결국 자기 자신을 닮은 사람들에게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용서는 누가 하는가.
이 영화는 그 질문을 끝까지 붙잡고 있다.
신이 부재한 자리에서, 이해하려는 인간만이 남는다
그 이해가, 감독이 말하고자하는 식의 용서였던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