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들의 블루스: 흑인 문화권 바깥에서.
〈씨너스: 죄인들〉은 호러이자 뮤지컬이며, 동시에 그 어떤 장르로도 쉽게 묶을 수 없는 영화다.
영화는 흑인 공동체의 기억과 음악의 힘, 종교적 윤리와 인간의 정욕 사이의 긴장이 팽팽하게 맞서며, 장르의 문법 바깥에서 이야기를 풀어낸다.
1932년 미시시피. 시카고의 갱단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온 스모크와 스택 형제는, 억눌린 흑인 공동체를 위한 음악의 공간, 주크 조인트를 연다.
개업 첫날 밤, 형제의 사촌 새미는 기타를 들고 무대에 올라 블루스를 연주하며 삶의 숨통을 틔운다.
그러나 그 축제의 열기 한복판에, 인종도 경계도 초월한 존재들. 뱀파이어들이 침입한다.
영화의 뼈대는 흑인 서사에 뿌리를 둔다.
식민과 노예제, 착취의 시대를 통과한 집단의 기억 위에 블루스라는 음악이 흐르고 있다.
흑인과 블루스, 이 둘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 영화를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한국에서 나고 자란, 블루스에 익숙하지 않은 나로서는 여간 곤란한 영화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에게 이 영화는 한 인종의 사적인 이야기보다는, 더 근원적인 어떤 이야기, 문화와 인간 자체에 대한 이야기로 다가왔다.
흑인적인 것. 자유로움, 즉흥성, 개인성과 육욕.
그것들은 기독교적 영성, 집단주의, 통제되고 경계 지어진 것들과 나란히 놓이고 비교된다.
〈씨너스〉는 이 두 세계를 병렬로 보여준다. 선악이나 우열로 재단하지 않는다.
주크 조인트라는. 새미와 형제들이 만든 그 하룻밤의 공간은, 음악과 춤, 사랑과 열광, 성과 돈이 직설적으로 터져나오는 장소였다.
모두가 억눌린 감정을 해방시킨다. 그곳은 흑인들이 잠시나마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유일한 찰나였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그 자유의 공간을 침범하는 뱀파이어들이 등장한다.
뱀파이어는 경계가 없다. 인종도, 문화도 구별하지 않는다.
모두를 감염시키고, 동일하게 만든다.
그들의 공동체는 얼핏 주크 조인트를 닮았지만, 실은 정반대다.
그 ‘하나 됨’은 뿌리 없는 동질감이다.
그 동질성은 언어도, 감정도, 과거도 모두 녹여 없애는 문화의 용광로다.
하지만 영화는 이 두 개의 축 중 어느 하나를 비판하지 않는다.
영화의 말을 빌어보자면, 블루스라는 음악은 뱀파이어의 얼굴보다는 주크 조인트에 살아 숨 쉬는 흑인들의 삶을 닮아 있을 뿐이다.
영화의 말미에서 뱀파이어는 새미에게 그들의 무리에 들어오라 한다.
영생을 누리면 언제나 음악을 즐길 수 있다고.
하지만 새미는 거절한다.
“형, 저는 사건이 있기 전날의 꿈을 아직도 꿔요. 하지만 그 악몽이 있던 전날 밤은 제 생의 최고의 순간이었어요.”
그는 영원보다는 찰나를 선택한다.
음악은 죄와 욕망, 죽음조차 끌어안지만, 그 유혹 앞에서 타협하지 않는 마지막 인간성의 흔적이기도 하다.
〈씨너스〉는 찰나와 영원 사이, 구속과 해방 사이, 죄와 삶 사이에서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는지를 묻는다.
장르적인 쾌감 면에서는 확실히 아쉬운 영화였다.
애매하게 공포물의 옷을 입은 탓일까.
무섭거나 박진감 넘쳐야 했을 장면들(이를테면 뱀파이어의 등장이나 대규모 액션 신)에서는 완성도를 깎아먹는 듯한 B급의 투박함이 드러난다.
KKK단을 몰살시키는, 람보 같은 스모크의 총질은 그 와중 압권이다.
잘 만든 영화였고, 곱씹을 만한 영화였고,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가 많은 영화였지만.
끝내 나는 이 이야기가 완전히 내 것이 될 수는 없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특정 문화권의 이야기가 영화의 메인 테마가 되는 작품들을 볼 때면, 왠지 모르게 심술이 난다.
그들과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세워지는 느낌.
길게 이야기하면 내가 좁아지는 것 같고, 더 말해봤자 나만 이상한 사람 될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역시 심술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