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나무는 왜 고추나무여야했나.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는 언제나 거대한 남근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의 영화 전반에 흐르는 남근에 대한 집착적이고 끈질긴 인력은, 메워지지 않은 근원적 결핍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욕망의 좌표에는 언제나 공백의 자리가 있습니다.
유아가 어머니의 세계와 분리되어 나올 때, 그 사이에는 결코 메워질 수 없는 공백이 생깁니다.
이 공백이야말로 모든 인간 욕망의 근원입니다.
프로이트적으로 그것은 성욕이며, 라캉적으로는 결핍, 그리고 그 결핍을 향한 추동인 ‘대상 a’입니다.
영화의 시작점에서 만수는 모든 상징계적 욕구를 충족시킨 인물로 등장합니다.
그는 성공한 직장인이며, 사랑받는 남편이자, 능력 있는 가장입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모든 결핍을 봉합한 그는, 현대 사회 속 완전무결한 인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라캉이 말하듯, 상징계의 충족은 곧 결핍의 은폐에 불과합니다.
그의 완전함은 실재계의 구멍을 덮는 얇은 상징의 막에 지나지 않습니다.
곧 만수는 자리의 상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회사에서 해고되고, 남편으로서의 권위도 흔들립니다.
딸의 레슨비조차 감당하지 못하며, 아들은 가족을 위해 범죄를 저지릅니다.
그는 더 이상 대타자의 욕망에 응답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때 만수는 상징계 속 자신의 기표를 잃은 주체, 즉 라캉이 말하는 ‘결여된 주체’로 전락합니다.
복직의 욕망, 즉 상징계로의 복귀를 위해 만수는 경쟁자들을 살해할 계획을 세웁니다.
그 계획의 중심에는 ‘고추나무’가 있습니다.
그가 세운 가상의 회사 이름은 ‘레드페퍼 제지회사’입니다.
왜 하필 고추일까요.
고추는 프로이트적으로 리비도의 상징이며, 라캉적으로는 아버지의 이름, 즉 상징계의 권위를 상징하는 ‘남근의 기표’입니다.
만수는 상징계에서 박탈당한 자신의 남근적 위치를, ‘레드페퍼’라는 가짜 남근을 통해 되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그가 손에 쥔 것은 진짜 권위의 복귀가 아닌, 환상의 복제물입니다.
그의 욕망은 상징계로 복귀하지 못한 채, 상징의 폭주와 환상의 과잉으로 치닫습니다.
상징계의 그물은 단단합니다.
가장의 자리, 직업인의 자리는 모두 사회가 미리 규정한 상징적 좌표입니다.
그 속에서 개인의 특수성은 삭제됩니다.
그 억압된 욕망은 ‘사적 공간’의 형태로 재등장합니다.
만수는 온실을 만들고, 범모는 LP감상실을, 선출은 별장을 짓습니다.
이들은 모두 상징계의 외부에 세운 작은 ‘실재의 방’입니다.
온실과 감상실, 별장은 사회가 부여하지 않은, 각자의 리비도적 충동이 만든 고유한 자리이며,
그곳에서만 인간은 대타자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을 욕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수는 온실이라는 자기만의 공간이 아닌, 대타자의 자리 자체를 차지하려 합니다.
그 집착은 결국 살인으로 귀결됩니다.
그의 광기는 폭발적인 히스테리가 아니라, 음험하고 관음적인 사슬처럼 시체를 휘감습니다.
죽은 사체는 묶이고, 비닐에 감싸지며, 땅속에 묻힙니다.
살인의 형태로 드러난 주이상스는 여러 겹의 봉합으로 위장됩니다.
그러나 그 봉합은 결코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 사체들은 실재계의 잔여물로 남아, 만수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결핍의 자리를 끊임없이 응시합니다.
그의 살인은 욕망의 충족이 아니라, 결핍의 영원한 재현입니다.
영화는 시작과 끝에서 모두 ‘집’을 비춥니다.
초반에는 평범한 가장의 공간으로,
마지막에는 공장과 자동차 행렬의 부감 쇼트로 마무리됩니다.
그 공장은 끊임없이 욕망을 생산하는 상징계의 기계장치입니다.
인간은 과자 부스러기를 좇는 개미처럼, 그 기계가 생산하는 결핍을 향해 다시 달려갑니다.
수미상관의 구조는 결핍과 욕망의 순환, 즉 “어쩔 수 없이 욕망으로 되돌아오는 인간의 구조”를 영화적으로 시각화합니다.
박찬욱 감독은 이 영화에서 인간을 결코 채워질 수 없는 공백을 향해 달려드는 존재로 그립니다.
〈어쩔 수 없다〉의 만수는 결핍을 부정하고, 상징계의 권위를 복제하려 한 주체입니다.
그의 살인은 결핍을 지우려는 시도이자 그 결핍을 다시 불러오는 라캉적 욕망의 순환 구조입니다.
‘어쩔 수 없다’는 말 속에는 인간의 실존적 한계가 숨어 있습니다.
결핍은 사라지지 않으며, 욕망은 언제나 다시 그 공백으로 되돌아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영화는 모순됩니다.
만수는 상징계의 질서에 가장 단단히 포획되어있기때문에 되려 초자아의 명력이 가장 강력히 금지하는 살인이라는 범죄를 저지르게된겁니다.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행위를 했는데, 그 폭발이 결코 자유로운 초자아의 해방이 아니라, 오히려 상징계의 요구를 가장 충실히 수행한 결과라는 점에서
영화의 블랙코메디는 완성됩니다.
그는 살인을 ‘자기 욕망의 폭발’로 착각하지만 사실은 상징계의 명령을 내면화한 가장 모범적인 주체가됩니다.
말하자면 그는 ‘결핍을 인정하지 말라’는 사회의 명령에 끝까지 복종한 셈입니다.
10/7 추가분.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입장에서 자폐증은 상징계로의 진입 실패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주체는 대타자의 규율(언어, 법, 제도, 사회적 상징 체계)속으로 들어가며 그 안에서 자신을 상징적으로 자리매김합니다.
그러나 자폐적 아동은 이 진입이 보편적 선만큼 일어나지 않습니다.
언어와 의미의 세계, 즉 상징계가 그들에게는 열리지 않은 채, 실재의 밀도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라캉은 이러한 상태를 병리로 단정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자폐는 결핍이 아니라, 다른 방식의 존재 양식(타자의 언어를 거부하고, 자기 고유의 실재적 리듬 속에서 세계를 경험하는 하나의 주체성)으로 이해됩니다.
따라서 그는 만수의 딸 리원이를 문제 삼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를 통해 ‘언어 이전의 순수한 발화’를 긍정하는 듯한 뉘앙스가 감지됩니다.
리원이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녀가 내뱉는 언어는 반향어이거나, 음악입니다.
그녀가 쓰는 글자는 세상의 문법을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형식과 질서를 지닙니다.
리원이는 영화의 말미에서 자신만의 악보를 통해 가장 실재적인 형태의 언어인 음악을 발화합니다.
자기 고유의 언어로 세계에 응답하려는 리원이의 시도는 이어플러그를 귀에 꽂고, 공장 안에 홀로 갇혀 종이를 두드리는 아버지 만수의 모습과 뚜렷하게 대비됩니다.
그는 그 질서에 갇혀, 언어와 노동, 제도의 틀 속에서 스스로의 목소리를 상실했습니다.
라캉적으로 말하자면, 아버지의 이름에 타폐된 만수의 상태는, 리원이의 자폐보다 더 자폐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