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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신익 Sep 07. 2017

[스포일러有] 놀란이 전쟁과 기적을 바라보는 시선

<덩케르크>를 통하여

본 리뷰는 <덩케르크>의 스포일러를 함유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내용이 조금 산으로 가는 느낌이 있습니다.   

                                       

1. 시내를 걸어가던 병사들은 기습 공격을 당하고 단 한 명만이 탈출한다. 간신히 탈출한 후에는 아군에게 총격을 받다가 간신히 신원 확인을 해내고 방호벽을 넘어 해변으로 간다. 탈출을 기다리던 해변에서는 공습을 받는다. 그 때 한 병사가 외친다. "망할 우리 공군은 어디있지?" - 1주일

2. 전쟁터 밖, 바다 건너의 항구. 일반인 가족과 그의 어린 선원은 군으로부터의 징발을 받아 배에 구호물품을 싣고 있다. 군인들에게 배를 건내줘야 하는 순간 선장과 어린 선원은 전쟁터로, 자진해서 향하게 된다. - 1일

3. 출격한 공군 전투기 세 대. 리더는 양 옆의 전투기들에게 복귀까지의 연료를 확인하라고 지시한다. 연료는 그리 넉넉하지만은 않아보인다. 그들은 지시를 확인하고 전장으로 향한다. - 1시간

  <덩케르크>를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위의 세 문단은 오프닝을 요약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영화의 진행 방향을 요약한 것이기도 하다. 영화는 향후, 세 개의 각기 다른 사람들(혹은 집단)의 이야기를 교차로 진행하며 마침내 그들은 영화 후반부에 만나게 된다. 이러한 연출 방식은 영화의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이 이 전쟁, 그 속의 이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는 지를 아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우선 영화는 앞서 말한 세 이야기의 순서로 진행이 된다. '육-해-공'이다. 당연히 눈에 띄는 것은 공간에 따른 차별적인 상황이다. 육지와 바다, 공중이라는 개념을 넘어서 육군과 민간인, 공군으로 요약이 된다. 단순히 공간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에 있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앞에 요약한 오프닝을 다시 곱씹어보자. 첫 번째, 육군의 이야기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날아온 총알을 피해 달아나던 병사는 해변을 지키는 프랑스 군과 조우해 방호벽 뒤로 넘어가 해변에 진입한다. 아비규환이긴 하지만 많은 아군 병사들이 대기를 하던 해변은 마치 안전지대와도 같다. 그 때 적군의 공습이 닥치고 해변은 폭격을 당한다. 공포스러운 한 순간이 지나간다.

  보통 육군은 전시에 전쟁을 가장 직접적으로 체감하게 되는 사람들이다. 전쟁터 한복판에서 직접 활동하는 사람들이며 목숨을 위협하는 요소들이 주는 공포를 직접적으로 체감하게 되는 사람들이다. 언제 어디에서 적들이 습격할 지 모르는 곳에 떨어져 작전을 수행한다. 그래서 영화에서는 절대 적군의 모습이 그들의 시선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 전쟁터에서 대다수를 이루는 사람들이지만 가장 약자로 꼽힌다.

  그 다음은 바다의 민간인들이다. 전쟁터의 아비규환을 보여준 후 이를 벗어나 보여주는 전쟁터 밖이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전쟁터를 향한다. 얼핏 보면 전쟁과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지만 영화 속에서는 군이 징발하는 모습을 통해 이를 간접적으로나마 보여준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 전쟁이 꼭 상관 없는 일이 아니라 분명 그들에게도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주는 사건임을 보여준다. 전쟁터 밖도 전쟁으로부터 자유롭지는 않다.

  다음은 공군이다. 다시 오프닝 첫 번째, 육지 시퀀스의 마지막을 돌이켜보면 이런 대사가 나온다. "망할 우리 공군은 어디 있지?" 이 대사로 말미암아 생각해보면 육군은 이 상황의 약자라면 공군은 강자로 제시된다. 그러나 공군에게도 복귀라는 자신들만의 사정과 한계가 있고 적기와 교전한다는 위협이 존재한다. 분명 육군에게는 강자지만 그렇다고 공군이 절대자는 아닌 것이다.

  이 세 가지 시퀀스를 순서대로 배치한 오프닝은 이 영화가 전쟁을 바라보는 시선을 그대로 보여준다. 오프닝은 영화가 이 상황에서 담아낼 수 있는 가장 다양한 스펙트럼의 인물과 상황을 제시했고 이를 통해 전쟁은 그 자체로 누구에게나 지옥이고 고통임을 드러낸다. 특히 영화는 적군의 공격을 묘사하는 방식에서 총을 쏘거나 발포를 하는 액션을 배제하고 폭발과 총성, 그리고 그에 대한 병사들의 리액션만을 드러낸다. 사람과 사람이 싸우는 것으로서 전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나를 죽일 수 있다는 공포의 시선에서 전쟁을 담아낸다. 그리고 그 상황에 있는 인물들에게 어떤 개인사도 부여하지 않아 영화는 그 대상이 누구나 해당될 수 있다는 것을 빠르게 요약한다.

  이 넓은 범위를 보충하는 또다른 요인은 시간이다. 전쟁이라는 공통된 상황으로 묶인 사람들이지만 그들 사이의 연관성은 그리 크지 않다. 얼핏 봐서는 독립된 세 이야기가 나열된 것으로 보이니까. 그 연관성을 보충하는 것이 시간이다. 영화에서 세 가지 상황에 부여된 영화 내적 시간은 모두 다르다. 육지는 1주일, 바다는 1일, 공중은 1시간이다. 각기 다른 시간을 부여받지만 영화는 점점 공통된 시간을 향해서 나아간다. 그 과정에서 상황 1에서 영화 타임라인 상 과거에 나왔던 것이 상황 2에서는 현재가 되는 등 시간을 공유함으로써 생기는 접점이 점점 늘어난다. 이러한 시간의 차등 분배는 각 이야기마다 깊이를 부여하면서 이야기 간의 연관성을 확보한다는 장점과 더불어 관객들에게 건조한 이야기를 따라가는 흡인력을 제공하기도 한다. 미스테리 영화나 세계관이 큰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보이듯 일종의 떡밥, 암시가 은연중에 드러나는 것인데 그 암시로 인해 어떤 충격을 주거나 강한 인상을 주는 트릭까지는 아니지만 그 상황을 다르게 볼 수 있음을 수긍하게 만드는 근거이기도 하다. 그렇게 해서 각기 다른 상황에서 출발한 모든 경우들에 같은 상황임을 드러내고 그 중간에서는 시간의 차등으로 인한 플롯 분배가 그 연관성을 크게 확보해내지 않나 생각한다.

  놀란이 전쟁을 바라보는 시선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지옥이라면 다이나모 작전은 모두가 있었기에 가능한 기적이다. 이를 암시하는 작은 장면이 초반에 등장한다. 오프닝 직후, 다른 두 상황에 비해 유독 길게 잡히는 상황이 있는데, 이는 바로 해변(육지)에서 부상자를 이송하는 장면이다. 돌아가는 배에 승선하지 못한 병사가 부상자를 발견하고 다른 병사와 함께 이를 배로 옮기는데 다른 두 상황이 짤막한 대사와 함께 지나치는 한편 육지의 시퀀스는 들것을 들고 달려가 부서진 가교를 지나 배까지 옮기는 과정이 길게 등장한다. 유일하게 어떤 행동을 구체적으로 하는 시퀀스이기도 하지만 그 과정을 살펴보면 다른 식으로도 이해가 가능하다.

  누군지도 모르는 병사와 함께 누군지도 모르는 부상자를 옮기고 이를 보던 병사들은 자진해서 길을 비키고 부서진 가교를 건너자 환호한다. 비록 그 포커스는 부상자를 옮기는 두 병사에게 향해있지만 상황은 그 주변의 모든 병사가 참여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결국 부상자를 옮기는 데는 성공하고 작은 기적을 만들어내지만 배가 폭격을 당해 실패한다. 결국 폭격으로 인해 전쟁의 공포감과 무차별성을 드러내지만 이 상황에서 영화는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죽이는 전쟁'이 아니라 '살아남고 살리는 전쟁'임을 드러낸다. 살아남고 살리는 것에 조금이라도 도달한 이 순간은 모두의 협력이 일어난 순간이었다. 야간에 배가 어뢰에 공격당했을 때 문을 열어준 병사가 있어 많은 병사가 탈출했고, 분쟁이 일어났던 어선에서는 모두가 죽을뻔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더욱 분명하다.

  그리고 그 기적은 모두가 교차하고 협력할 때 일어난다. 육지의 살고자 하는 노력과 바다와 공중에서 살리고자 하는 노력이 만나 기적이 일어난다. 개인의 생존 욕구를 통해 살아남는 것을 넘어 서로에 대한 협력을 통해 살아남는 것이 이 영화가 말하는 기적이다. 그래서일까, 살려야 하는 대상인 육지의 군인들 중 최고계급자는 해변에 남아 프랑스 군을 돕겠다고 한다. 세 상황의 사람들 모두 각자 살고자 하는 의지와 더불어 살리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내고 결국 살아남는다.(돌이켜보면 영화의 메인 캐릭터들 모두 누군가를 살리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한 적이 있다.)

  <덩케르크>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전작들에 비해 비교적 단순하고 건조한 작품이다. 이전까지 인간에 대해 다양한 상황을 통해 탐구하고 그 변화 과정을 따라갔다면 <덩케르크>는 확고한 방향을 가지고 있다. 살고자 하는 의지와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 이것 하나만으로 영화를 이끌어나간다. 이를 조금 확장해서 바라보자면 기존 놀란의 영화에서 제시하는 개념이 확고하게 그려져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다크 나이트>의 보트 시퀀스, <다크나이트 라이즈>에서 배트맨의 선택, <인터스텔라>에서 제 1안에 대한 집착 등, 이 영화와 마찬가지로 다수와의 공존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때 영화는 기적을 맞이했다. 아마 놀란이 생각하는 이 세상에서 진짜 기적은 모두가 모두를 위하는 순간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영화에서 구현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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