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시를 진정으로 받아들인 지점에서
마이클 래드포드 감독의 1996년 작품이지만 국내에는 무려 20년이 지난 지금 최초로 개봉하게 됐다. 해외 유수의 영화제에서 상을 받고 호평을 받으며 많은 화제를 모았던 작품이지만 아쉽게도 국내에는 당시에 소개조차 되지 않은, 한국 관객들에게는 비운의 작품이라면 비운의 작품이다. 영화는 예술, 영화 속의 시를 진중하게 받아들이는 태도가 돋보이는 영화다. 낭만적인 이탈리아의 풍경과 더불어 시에 대한 진중한 태도는 단순히 평순행적인 드라마의 플롯에 비해 더 묵직한 메시지를 남긴다.
본 리뷰는 <일 포스티노>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얼핏 보면 평범한 성장 영화와 크게 다르지가 않아보인다. 작은 세상에서 좁은 시선(혹은 능력)을 가지고 살아가던 한 청년이 어떤 멘토를 만나며 성장하게 되는 이야기는 지금까지 많이 있었다. 이 영화는 마리오[마시모 트로이시 분]가 좁은 시선의 청년이 되고 파블로[필립 느와레 분]가 멘토가 된다. 파블로의 우편 배달부로서 마리오는 파블로와 지속적인 접촉을 하게 되고 그에게 시를 배우게 된다. 시를 바탕으로 마리오는 의욕 없던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아내를 만나게 되고 정치에 저항할 줄 알게 된다. 영화에서 파블로가 떠나는 순간, 얼핏 보면 영화는 성장을 마친 마리오의 이야기로 끝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영화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멘토가 사라진 후 마리오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시를, 예술을 받아들인다. 한정적인 의미로 시를 쓰던 것과 글자라는 한정된 범위에서 예술을 받아들이는 것과는 달리 마리오는 그를 이루는 주변 요소들을 모두 담아낸다. 기존의 성장 이야기의 플롯에서 하나의 에피소드를 추가하여 완전히 다른 느낌을 만들어낸다. 그 느낌은 영화의 마지막에서 빛난다. 5년만에 돌아온 파블로는 마리오의 죽음을 알게 되고 그가 남긴것들을 보면서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중요한 것은 파블로의 표정과 이 장면을 어떻게 담아내는지라 생각한다. 영화는 이 마지막을 파블로의 바스트 샷에서 롱 숏으로 넓게 잡았다가 사실상 파블로가 보이지 않는 익스트림 롱 숏으로 담아낸다. 어떤 깨달음인지 후회인지 모를 의미심장한 표정에서 시작해 급격하게 넓은 앵글로 빠지는 이 구성은 파블로의 감정을 극대화함과 더불어 영화 전반을 크게 환기시켜주고 영화의 핵심 감정을 길게 유지시켜준다. 평범한 구조에 딱 하나를 더했을 뿐인데 굉장히 광범하고 깊이있는 메시지를 만들어낸 것은 아닌가 싶다.
영화 초반, 마리오 역할의 마시모 트로이시가 하는 연기를 보면 어딘지 모르게 답답한 구석이 있다. 웅얼거리는 듯한 특유의 목소리 때문도 있겠지만 극 속에서의 마리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마리오의 말이나 행동이 굉장히 분명해진다. 앞서 말했듯 이후에는 부당한 정치에 저항하기까지 한다. 영화 속 배우들은 이렇게 변화를 잘 표현하지 않았나 싶다. 파블로 역할의 필립 느와레도 마찬가지. 멘토로서의 근엄한 모습으로 극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가 파블로가 변화를 겪는 마지막 장면에서의 무표정은 영화의 메시지를 하나의 이미지로 담아낸 것 같은 정도의 존재감을 가진다.
물론 영화가 완벽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과도하게 직설적인 연출로 쉽지만 어색하게 넘어가는 장면이 일부 있어(특히 마리오와 베아트리체[마리아 그라지아 쿠시노타 분]와의 첫 만남) 조금은 쉽게 넘어가려는 시도를 하는 느낌이 조금은 든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가 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대해서는 깊으면서도 부담스럽지 않게 잘 그려냈으며 평범한 플롯에 아주 조금을 더함으로써 더 묵직하고 새로운 느낌의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