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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국현 Mar 11. 2022

교양은 공감의 밥이다

교양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

  김상욱의 과학공부를 보면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우주는 텅 비어있다. 지구가 모래 알갱이만 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태양은 오렌지 크기가 되고, 지구는 태양에서 6미터 거리에 위치한다. 오렌지 크기의 태양이 부산역 광장 분수대에 놓여 있다고 한다면 태양계의 마지막 행성인 해왕성은 부산역 플랫폼에 위치한다.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첫 번째 별인 알파 센타우리에 도착하려면 일본 홋카이도 북쪽 끝까지 가야 한다. 결국 부산역을 중심으로 반경 1,600킬로미터 이내에 오렌지 한 개랑 모래 알갱이 몇 개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셈이다. 따라서 주변에 무언가 물질이라 부를 만한 것을 발견한다면 그 자체로 기뻐해야 한다.  생명체는 지구에서만 발견되는 아주 특별한 물질이다. 내 주위에 생명체가 있다면 이것은 놀라워해야 할 일이다. 더구나 그 수많은 생명체 가운데 나와 같은 종을 만나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다른 인간을 사랑해야만 하는 우주론적 이유이다.”

  저 설명을 들으면 두 가지 부류의 사람으로 나뉠 것 같다. “산다는 건 정말 경이롭군요…” 혹은 “그래서 뭐 어쩌라고” 각 개인의 공감의 감수성에 따라 생각이 나뉘고 대답이 갈린다.

  공감의 사전상 정의는 “남의 주장이나 감정, 생각 따위에 찬성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낌”이다. 내가 생각하는 공감의 정의는 나의 범위가 어디만큼 확장되느냐에 달려 있는 것 같다. 나의 범위가 내 피부까지만 도달한 사람은 통상 이기주의자라고 부른다. 나의 범위가 내 피부를 넘어 타인까지 확장된 사람은 이타주의자라고 한다. 남도 나와 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남이 아프면 나도 아픈 것이다. 이타주의자도 그 범위에 따라 또 나뉠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범위가 내가 속한 국가, 민족까지만 해당되는 사람은 민족주의자, 국가주의자라고 부르고, 나의 범위가 자신이 속한 국가, 민족을 넘은 사람은 칸트가 말하는 코즈모폴리턴이 되는 것이다. 그럼, 그 범위가 지구를 넘어 우주까지 확장된 개념은? 아직 정립된 단어는 없는 것 같지만 메타-코즈모폴리턴이라고 해야 할까? 개인적으로 외계인이 지구를 침략하지 않는 이유는 그 멀리서 지구까지 와서 침략한 수준의 문명을 건설하려면 그 사회 구성원들의 공감이 수준이 상당히 높아야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기주의자가 많으면 전쟁이 나든 해서 그 문명이 오래 유지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높은 공감도가 형성된 사회라면 굳이 남의 행성을 침략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지구도 마찬가지다. 꼭 이기주의자들이 전쟁을 일으킨다.  

  인류는 문명을 이룬 이후부터 끊임없이 천국을 갈망해 왔다. 하지만 천국과 지옥이 따로 있을까? 모두의 공감이 범위가 넓어져 예수의 말씀대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서로 사랑하는 이곳이 바로 천국일 것이고, 나만 생각하고 각자도생 하면 홉스가 말하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되어 지옥이 따로 없을 것이다. 그 사회의 공감의 밀도에 따라 천국 같은 사회가 될지, 지옥 같은 사회가 될지를 결정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우선 나의 범위가 확장되려면 나의 사유가 넓어져야 할 것 같다. 나의 사유가 넓어지려면 언어의 세계가 넓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트겐슈타인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언어의 세계가 넓어야 사유의 세계가 넓어진다고. 언어의 사유를 넓히는 노력이 교양이다. 세상을 오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이해하는 것이 교양인 것이다.. 디트리히 슈바니츠의 <교양>이란 책에 교양의 정의가 나와있다. “교양이란 사회를 개인의 내면에 비추어보고, 또 그렇게 하여 사회를 결속시키는 도덕적 구속력을 내면에서 구성해내는 개인적인 능력을 가리킨다.”라고 되어 있다. 쉽게 말하자면 넓어진 사유의 도구로 세상을 오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관찰하여 얻어진 성찰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교양이라는 것이다. 교양의 세계를 넓혀 세상을 오해하지 않고 세상의 서로 얽힌 관계의 경이로움을 느끼면서 나의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면 메타-코즈모폴리턴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 

  앞 단락에서 본 것처럼 교양은 관찰, 성찰, 행동, 이렇게 3단계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무언가 알고자 할 때 ‘관찰’을 한다. 보다 정밀한 관찰을 하기 위해 현미경이나 망원경 같은 도구를 사용한다. 이 세상 미시적으로 관찰해보면 모든 것들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원자는 원자핵과 주위를 도는(?) 전자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간단한 수소 원자는 원자핵 하나와 전자 하나로 구성되어 있다. 수소 원자핵 크기를 축구공 크기만 하다고 가정한다면 전자는 대략 어디쯤 위치하고 있을까? 흔히 원자의 이미지로 알고 있는 러더퍼드의 원자 모형 이미지를 보면 전자들이 핵으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져 있을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약 10km 바깥에 있다고 한다. 물론 그 사이로는 아무것도 없다. 99.9999%가 비어 있다는 뜻이다. 사물이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는 셈이다. 게다가 양자 역학에서는 전자는 관찰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원자핵은 보통 점으로 표현된다. 유클리드의 기하학의 첫 번째 정의는 “점은 부분이 없다”이다. 그러면 점(원자핵)은 실체가 존재한다는 뜻인가? 없다는 것인가? 다채롭고 충만하게 보이는 이 세계가 공간으로 채워져 있거나 아니면 실재가 의심된다고 하다니… 인간의 직관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이 이렇게 말했나 보다. “세상은 사물의 총체가 아니라 사실의 총체이다”

  거시적으로 우주를 관찰해 보아도 마찬가지다. 앞서 김상욱 교수의 설명처럼 이 우주도 거의 공간으로 채워져 있다. 김상욱 교수는 빛은 어둠의 부재라고 얘기한다. 우리 지구는 태양에 가까이 있다. 지구와 태양의 거리가 약 1억 5천만 km이니 지구인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멀어보일 수 있겠지만 앞부분에 언급한 태양 다음으로 가까운 별인 (태양은 별이다) 알파 센터우리는 4.3광년 떨어져 있다. 빛이라는 측량 도구(?)를 사용하면 태양은 지구에서 약 8분 정도 떨어져 있고, 알파 센터우리는 태양보다 282,510배 멀리 있다. 알파 센터우리에 누군가 있어서 통화를 시도한다면 “안녕하세요” 이 한마디를 교환하는 데 약 8년이 넘게 걸린다는 뜻이다. 이렇듯 우리가 태양(별) 가까이에 있어서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지구의 별의 빛으로 둘러싸인 상황이 우주의 평균적인 모습이 아니라는 얘기이다. 별이 없는 ‘어둠’이 평균적인 우주의 모습이고 지구처럼 특별히 별 주위에 가까이 있는 모습이 특별한 상황이니 빛이 어둠의 부재라는 것이다.

  이런 관찰의 결과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성찰은 무엇이 있을까? 세상은 빈 공간과 어둠으로 이루어진 세상이라면 과연 이런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하지만 과학은 과학적 사실만을 말할 뿐 그 이상의 가치나 의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형이상학적 문제들은 주로 철학이나 종교가 해답을 제시해 왔다. 

  이 질문에 대한 (개인적으로) 가장 근접한 해답으로는 기원전 560년 경 히말라야 기슭에서 태어난 현자가 이미 일깨워 주었다. 그 이름은 모두가 알다시피 ‘석가모니’라 불리는 고타마 싯다르타였다. 석가는 고정 불변하는 나, 즉 고정된 실체로서의 아트만은 없다고 말했다. 나를 포함한 이 세상 모든 존재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흩어지고 모이는 임시 상태일 뿐이다. 이런 잠시 모여있는 임시 상태를 ‘오온(五蘊)’이라 말한다. 이런 사상은 150~250년 경에 살았던 인도 승려 나가르주나에 의해 공사상으로 발전하게 된다. 공은 단순히 허무나 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의미다. 마치 꿈처럼 말이다. 장자가 나비 꿈을 꾼 건지 나비가 장자 꿈을 꾼 건지 알 수 없다는 것처럼 말이다. 좀 더 나아가 보면 데카르트의 ‘통속의 뇌’처럼 이 세상은 사악한 마법사가 만들어낸 세상일 수도 있는 것이다. <화엄경>에 ‘일체유심조’라는 중심 사상이 나온다. 세상의 모든 것이 마음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는 뜻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사물은 공간으로 채워져 있다’ 등등 과거의 현자들과 현대의 과학이 뛰어난 관찰과 성찰로 지혜를 남겨주었지만 인간은 그 공간에 욕망이라는 인간만의 의미를 채우려 한다. 석가가 이미 말했듯 실체가 없는 허상에 욕망을 채우려 하다 보니 고통이 발생하고 있다고 하였고 그것을 ‘갈애(渴愛)’라고 표현하였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프랑스 철학자 라캉의 말이다. 우리는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타인이 강요하는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살아간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 대한 욕망에 직면하는 법을 배워보지 못했다. 내가 태어나자마자 자본주의라는 사회에 던저져 그저 소비하는 노동자로 길들여졌을 뿐이다. 타인의 욕망을 위해, 혹은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우리는 끝없이 노동하고 소비로서 자신을 증명해 내려하고 있다.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일한다고 하면서 가족들과 지내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우리는 욕망에 대해 서로 합의해야 한다. 사람의 욕망은 무한하되, 자원은 유한하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능력 있는 자(?)가 욕망을 쟁취하는 것이 정의라고 정의하는 사회는 천국보다는 지옥에 더 가까울 것이다. 욕망을 합의하기 위해서 서로의 양보가 필요하다. 그 양보를 위해서는 공감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 공감을 키우기 위해서는 우선 교양의 성장이 필요하다. 

  교양이란 우리 모두의 성찰이 모이고 행동으로 실현되는 능력이다. 그 능력으로 우리 사회에 대해 우리는 교양해야 한다. 혹자는 교양이 밥 먹여 주냐고 말하지만 교양은 이 사회의 밥은 될 수 없어도 꼭 필요한 비타민 같이 필요한 필요조건이다. 초기 대항해 시대에 대부분이 선원들이 항해 중 괴혈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괴혈병의 원인은 비타민 부족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발견한 군의관 제임스 린드의 건의를 제임스 쿡이 받아들여 그는 항해 시 신선한 채소와 소금에 절인 양배추를 준비했고 선원들이 육지에 정박하게 되면 무조건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먹게끔 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는 항해 중 괴혈병으로 죽은 선원은 없었다고 한다. 이렇듯 교양은 행복의 섬으로 먼 항해를 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 좌초하지 않게 버티게 해주는 비타민 같은 존재이다. 뭐 어쩌라고 식의 사고는 자본의 힘만 길러줄 뿐이다.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다는 경이로움을 사회적 공감으로 승화시킨다면 우리 지구라는 운명공동체는 좌초 없이 행복의 섬 (유토피아)에 도착할 것이고, 또 먼 훗날 (아주 먼 훗날이긴 하지만) 태양이 적성 거성으로 변하기 전에 다른 행성으로 대항해를 떠날 능력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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