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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국현 Mar 11. 2022

사회에게 질문하기

  내 딸이 태어나고 며칠 후 내 딸의 눈과 처음 마주쳤을 때 그 순간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내가 아님을 깨달았다. 다마스쿠스로 가던 바울이 하늘의 빛을 마주하고 계시를 받고 변화된 것처럼 말이다. 내 딸의 눈을 마주친 그 순간 난 그저 이 순간을 위해 예비되어 있었던 존재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지난날의 모든 순간들은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존재해야 했던 필연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후회로 점철되는 막심뿐인 순간들이었지만 지금을 위해 모두 없어서는 안 될 필요조건들이었다. 나의 그녀, 혹은 내 딸의 모친을 왜 그리 돌고 돌아 만나게 되었고 결혼하게 되었는지를 내 딸의 눈이 나에게 모두 설명해 주고 있었다. 과거의 어느 한순간이라도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아니 되었더라면 이 순간은 결코 오지 않았으리라. 만약 그 어떤 절대자가 나타나 내가 원하는 시점으로 돌아가 원하는 삶을, 원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능력을 준다 하더라도 정중히 사양할 것이다. 내 딸의 눈이 그동안 원망스러웠던 나의 과거를 사랑하게 만들어 주었다. 나의 과거는 이렇게 나의 딸의 눈을 통해 설명이 되었고, 나의 미래도 충분히 예상이 되었다. 내 딸의 눈에 세상의 아름다운 모습만 보여주겠노라고. 나 역시 그 준비된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겠노라고. 비록 가시밭길일 뿐이어도 나의 잔생을 사랑하며 살아가겠노라고.

  모든 부모들이 나의 마음과 같을 것이다. 자식과 가족의 눈을 볼 때마다 자기에게 주어진 숙명을 받아들이게 된다. (가족의 잠든 모습에 그런 마음을 느낀다는 사람들도 있다) 이렇게 모두가 가족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며 살아간다. 내 주위에 사람들은 모두 딸바보, 아들 바보들이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가 가족의 행복만을 바라는 선한 사람들인데, 그렇게 선한 사람들이 모인 사회인데 이상하게 우리는 각종 부조리가 가득 차있는, 하루에 서른 명 이상의 사람들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모두가 저마다의 행복을 위해 살아가는데 이 사회가 지옥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자는 말한다. 그건 극소수의 악한 사람들 때문이라고. 그 극소수의 사람을 솎아내고 처벌하기 위해 발전한 법체계가 있고 그 시스템이 완성되면 이 사회는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사회가 될 것이라 말한다. 영화 <마이너리포트>같이 범죄를 저지를 자를 미리 찾아서 처단하는 그런 사회가 온다면 정말 유토피아 같은 세상이 올 것인가? 

  15~17세기 유럽은 기후적으로 소빙하기를 겪고 있었다.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기온이 떨어져 흉작이 거듭되었고 곡물의 수확량이 떨어져 곡물 및 식료품 가격이 폭등하는 등 매우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웠다. 사회가 혼란스러워지고 지도층들의 권위가 떨어지자 이 사태를 무마하기 위해 누군가에게 책임을 떠넘기기 시작했다. 주로 사회적 지위가 낮은 여성들에게 말도 안 되는 죄를 뒤집여 씌우고 화형에 처했다. ‘마녀사냥’이었다. 여성뿐만 아니라 유대인 등 소수 종파에게도 탄압을 가하였다. 그 당시 사회적 위기의 원인이 그 누구의 잘못이 아닌 인간이 어쩔 수 없는 기후의 변화였지만 그 당시 지식으로는 그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원인을 알 수 없으니 인위적으로 그 원인을 사회적 약자를 원인으로 몰아세웠고 많은 죄 없는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지금도 뭔가 문제가 생기면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기보다는 누군가에게 책임을 씌우는 일이 빈번하다. 정확한 원인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고 누군가를 ‘마녀’로 모는 일은 쉽기 때문이다. 원인은 실체가 없어 눈에 보이지 않고 누군가는 실제로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정말 영화 <마이너리포트> 같은 세상이 온다면 미래판 ‘마녀 사냥’이 되지 않을까라는 의구심이 든다.

  파레토의 법칙이 있다. 이탈리아 경제학자 파레토가 개미를 관찰하면서 발견한 법칙이라고 한다. 어느 날 우연히 땅에서 개미떼를 발견한 파레토는 특이한 점을 발견한다. 모든 개미가 열심히 일하는 것이 아니라 20%의 개미만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열심히 일하는 20%의 개미만 따로 골라 놓아도 그 안에서 다시 20%의 개미만 열심히 일한다는 내용이다. (나도 개미떼를 볼 때마다 정말 그런가 하고 쳐다보았지만 도대체 어떤 개미가 일을 하는 개미인지 노는 개미인지 알 수는 없었다.) 벌집에서도 외근하는 벌과 내근하는 벌이 비율이 일정하다고 한다. 외근 나가는 벌이 외근 중에 사고를 당해 돌아오지 못해 비율이 달라지면 내근하는 벌의 일부가 외근하는 벌로 바뀌어 되어 그 비율을 일정하게 지켜진다고 한다. 외근을 다녀온 벌이 벌집 내에서 호르몬을 풍기는데 외근하는 벌의 숫자가 줄어들어 호르몬의 양이 줄어들면 내근하는 벌의 일부가 외근하는 벌로 바뀐다고 한다. 이런 예들을 보면 (꼭 20:80이라는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사회는 어떤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구조적인 사회라는 뜻이다. 개인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한 무리의 개미떼 중에 일을 열심히 하는 20% 그룹에 속했던 개미가 파레토의 장난(?)으로 인해 일을 열심히 하던 개미가 농땡이 피우는 80% 그룹으로 변경되었다고 하면 그것은 그 개미의 잘못인가? 그 개미에게 왜 일을 열심히 하다가 베짱이처럼 변했나요?라고 물으면 그 개미는 뭐라고 변경할 것인지 궁금하다. 그냥 삐뚤어지고 싶었다고 말할까?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이런 비율의 운명의 지배를 받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80%의 그룹에 속한다면 이건 나의 문제인가? 법칙의 문제인가? 구조의 문제인가? 

  만약 법칙 혹은 비율의 문제라면 앞서 말한 그 악한자 들도 어쩌면 그 비율의 희생자일 수도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하위 1%를 악한 자라 명칭 한다면 그들은 어쩌면 그저 의자놀이 게임에서 의자에 앉지 못한 사람들일 수도 있다. 의자 게임은 그들이 만든 놀이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저 순발력이 부족했을 뿐일 수도 있었는데. (아니면 남을 밀쳐내지 못할 만큼 마음이 약하거나)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이런 의자놀이와 많이 닮아있다. 능력주의라는 기치 아래 우리들은 사랑하는 가족들을 건사하기 위해 집 밖으로 나오면 의자의 한 자리라도 차지하기 위해 전사가 되어야 하고 전사들이 모인 집합체는 당연히 전쟁 같은 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 이 의자놀이 같은 사회의 구조가 딸바보, 아들바보 들을 전사로 만드는 사회인 것이다. 

  기원적 5백 년 경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급속도로 철학이 발전했다. 그 이유는 굉장히 먹고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리스에서는 필로폰네서스 전쟁이 있었고, 동양에서는 춘추전국 시대였다.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나왔으며 중국에서는 공자가 나왔다. 매일 전쟁의 연속이었고 하루하루 먹고살기 힘든 시기에 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 사람들이었다. 현대 사회도 춘추전국시대 같은 의자놀이에 내몰리고 있다. 갓 태어난 오리가 처음 보는 물건을 엄마인 줄 알고 맹목적으로 따라다니는 것처럼 자본주의에 갓 태어난 우리들은 자본주의가 가르쳐 준 ‘생각 없이 소비하는 노동자’로 별 의심 없이 살아간다. 이대로 계속 별 의심 없이 살아간다면 누군가는 계속 의자놀이에 떠밀려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제 우리는 이 의자놀이에 대해 한 번 의심을 해보아야 한다. 의심하지 않으면 우린 자본에 선동될 수밖에 없다.

  소크라테스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우리 사회의 성찰이 필요한 순간이다. 강남순 교수의 ‘질문 빈곤 사회’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성찰하는 삶'의 출발점은 '질문하기'다. 철학적 사유란 질문하기로부터 시작되며, 좋은 질문은 우리의 호기심을 흔들어 깨우면서 보다 나은 나의 삶, 보다 나은 세계를 향한 방식을 모색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게 한다. 성찰하지 않는 삶은 생존하는 것일 뿐, 사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동물적 '생존'을 넘어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결국 '질문한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살아감이란 언제나 함께 살아감이다” <자크 데리다> 혼자만 잘 사는 사회는 별 의미가 없다. 내가 나의 능력(?)으로 한 자리를 차지했다 하더라도 누군가는 내 의자를 뺏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늘 불안한 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 나의 사랑하는 자녀가 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보장이 없기에 우리는 우리 아이들은 어린 나이에 경쟁을 가르치고 있다. 불안이 세습되는 것이다. 항상 스트레스에 노출된 신체가 건강할 수 없듯이 불안에 항상 노출된 사회가 건강할 수 없다. 이제 우리 모두에게 의자놀이를 멈추고 이런 질문들을 해보야 할 것 같다.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모두의 질문이 같이 시작되면 새로운 구조를 만들 수 있는 철학적 주춧돌을 세울 수 있고, 그 주춧돌 위에 우리의 사랑스러운 자녀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불안해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자본주의 표 의자놀이는 이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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