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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국현 Mar 12. 2022

인류의 사춘기

  사람은 태어나 자라다가 대략 십 대 중반 정도에 사춘기 시절을 겪는다. 사춘기 시절을 겪는 이유는 정확히 모르지만 뇌과학에서는 뇌의 급격한 변화 때문에 사춘기 시절을 겪게 된다고 한다. 흔히 사춘기의 시절을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부른다. 사춘기 시절의 특징으로는 감수성이 매우 예민해지고 정서적인 방황을 겪으며 때로는 반항심이 심해지기도 한다. 뇌가 급격히 변화하면서 혼란을 가져오는 시기가 사춘기라고 현대 뇌과학이 밝히고 있다.  

  인류도 지금 사춘기를 겪고 있다. 장구한 역사를 지닌 인류를 사춘기라 하니 동의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약 20만 년 전부터 동아프리카에서 호모 사피엔스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나이가 20만 살이나 되었는데 사춘기라 하니 다수의 호모 사피엔스들이 동의하지 않는데 이해가 된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가 멸종하지 않고 번창하여 앞으로 100만 년 더 지속된다면 지금 이 시기가 사춘기 시절이라 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필자가 인류를 사춘기로 비유한 이유는 현재 인류의 모습이 인간의 사춘기 시절과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춘기 시절에 뇌의 급격한 변화가 일어난다. 유아기 때의 1차 가지치기에 이어 사춘기 시절에 2차 가지치기가 일어난다고 한다. 1차 가지치기 시기에는 운동 및 언어 기능 발달에 집중되었다면 2차 가지치기에는 ‘인간다움’이라 말할 수 있는 사회적, 지적 기능을 발달시킨다. 일종의 ‘리모델링’ 시기인 것이다. 인류는 산업혁명 이후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인구, 상품, 정보 등등 중세나 초기 근대 시대와 비교가 불가능할 만큼 모든 것이 급격히 늘었다. 급격히 풍요로워진 만큼 급속도로 혼란에 빠지기도 했다. 뇌로 비유하면 시냅스가 엄청나게 늘어난 것이다. 새로운 가치 치기가 필요한 시점이 된 것이다.

  사춘기 시절 뇌가 급격히 변하면 우선 전두엽의 기능이 취약해진다고 한다. 상황에 대한 이해력이 떨어지고 분노나 공격성이 높아지면서 계획을 세우거나 문제를 해결할 능력도 떨어진다. 인류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상황에 대한 이해력이 떨어지다 보니 미친 듯이 물건을 만들어내면서도 만족을 모르고, 계속 공장을 돌려 물건을 찍어내고 있지만, 정작 물건을 팔 데가 줄어들자 결국 힘센 나라끼리 서로 식민지 쟁탈전을 벌였었다. 사춘기 시절 공격성이 높아지는 것처럼 결국 인류도 스스로의 공격성을 조절하지 못해서 두 번의 세계 대전을 겼었고 지금도 여기저기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게임 중독에 빠진 10대처럼 현재 인류는 ‘상품 중독’에 빠져 있다. 대부분의 상품들은 화석 연료를 바탕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상품이 많아지면 자연스레 환경이 망가진다. 환경이 망가져가고 있음에도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도 떨어져 ‘어떻게 되겠지 뭐’라는 생각으로 환경 문제를 거의 방치하고 있다. 이대로 지속되면 분명 공멸이 뻔한데도 미래를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2016년에 발효된 파리협정의 목표는 2100년의 기온이 산업혁명 이전과 비교해 2도 미만 (가능하다면 1.5도 미만) 상승하도록 억제하는 것이지만 실천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티핑 포인트를 넘어가면 더 이상 되돌릴 수 없음에도 기술이 환경을 살릴 것이라는 근거가 빈약한 면죄부를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있다. 자본주의 안에서의 대부분의 기술도 알고 보면 결국 화석 연료의 변형일 뿐이다. 참고로 전기차가 많아져도 결국 이산화탄소의 발생을 줄이지는 못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전기차를 만드는 과정에 엄청난 화석 연료가 투입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인류는 전두엽의 기능이 떨어져 문제 해결이 떨어진 전형적인 사춘기의 모습처럼 스스로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수많은 상품을 만들어낸 덕분에 인류는 풍요로워졌지만 공감 능력이 떨어지다 보니 가진 자들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지구 어딘가에는 먹을 게 없어 굶어 죽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가축이 먹을 곡물은 있어도 사람이 먹을 곡물은 없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참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늘어난 상품과 소득으로 인해 인류의 생활은 풍요로워졌지만 행복은 늘어나지 않는 ‘이스털린 역설’에 빠져 있다. 스스로 그 늪에서 빠져나올 지혜도 상실한 듯하다. 

  지금의 인류를 한 명의 사람으로 이미지화한다면 질풍노도 하는 사춘기 시절의 모습과도 너무나 닮았다. 사춘기 시절의 질풍노도는 가지치기로 인해 안정되고 인간다워진다. 이렇듯 현 인류도 새로운 가지치기가 필요한 시기이다. 과연 인류에게 어떤 가지치기가 필요할까? 필자가 우선 두 가지 이슈에 대한 논의가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환경’과 ‘평등’이다.

  우선 환경 문제가 시급하다. ‘환경’은 우리의 무대이다. 무대가 있어야 (재미가 있든지 없든지) 연극이 상연될 수 있다. 지구라는 무대가 문제없이 유지되어야 인류의 연극도 (일단은) 유지될 수가 있다. 희극이 될지 비극이 될지는 나중 문제다. 

  현재 문명은 약 1만 2 천경부터 시작된 홀로세의 기후에 의존하고 있다. 빙하기가 끝나고 간빙기가 시작되면서 현재와 같은 기후가 시작되었고 이 기후에 인류가 적응하면서 문명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산업혁명 이후 화석연료를 이용하여 공장을 돌리고 물건을 생산하면서 이산화탄소를 비롯한 온실가스를 발생시키게 되었고 온실효과로 인한 지구 기온 상승은 이런 홀로세의 기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기후가 바뀌게 되면 생활에 영향을 미친다. 지금의 기후가 바뀌면 이 기후에 의존하여 발생된 현재의 문명이 붕괴될 수도 있다. 하지만 상품을 계속 만들고 소비되어야 유지되는 자본주의 속성 때문에 상품 만들기를 멈출 수가 없다. 물론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상품은 생산되어야 하지만, 문제는 필요 이상으로 과잉 생산이 문제인 것이다. 앞 단락에도 얘기했듯 인류는 과잉생산 때문에 서로 갈등하다 두 번의 세계 대전을 일으켰고 많은 사람들이 전쟁으로 희생당했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공황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 이런 식으로 진행되면 자본주의는 결국 멈출 수밖에 없다. 자본은 무한한 가치 증식을 목표하지만 지구는 유한하기 때문이다. 화석 연료를 이용한 자본주의식 상품 증식에 대한 논의가 시급하다.

  자본주의의 또 다른 문제점은 빈부격차의 확산이다. 자본주의의 특성이 승자에게는 ‘자본의 선순환’이, 약자에게는 ‘가난의 악순환’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그 순환들의 결과에 의해 빈부격차가 확산되고 있다. 프랑스 파리 경제대학 ‘세계 불평등 연구소(World Inequality Lab·WIL)’의 보고서에 의하면 세계 상위 10%의 부자가 전체 소득의 52%와 자산의 76%를 점유했다는 내용의 보고를 내놨다. 각종 보고서에 따라 숫자 및 비율은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소수의 사람이 대부분의 재산을 차지하고 있다는 내용은 동일하다. 문제는 빈부격차가 큰 사회가 건강하지 않다는 것이다.

  김태형의 <풍요중독사회>에 나오는 단락을 인용해 보겠다. “인류는 물질적으로만 풍요로운 사회를 이상 사회로 여기지 않았다. 즉 어떤 사회가 제아무리 풍요롭더라도 노예나 농노를 노예주나 지주가 지배하고 착취하는 사회, 사람들이 서로를 미워하여 갈등하는 사회는 이상 사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인류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동시에 화목한 사회를 이상 사회로 여겼고 그런 세상을 꿈꿔왔다. 이것은 기독교가 묘사하는 천국의 모습에서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기독교에서는 천국을 ‘젖과 꿀이 흐르는 세상’, 그리고 ‘사자와 어린양이 사이좋게 뛰노는 세상’으로 묘사한다. 젖과 꿀이 흐르는 세상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사회를 의미하고, 사자와 어린양이 뛰노는 세상은 화목한 사회를 의미한다. 최근 여러 연구들은 인간이 건전한 삶을 영위하고 행보해지려면 물질만이 아니라 관계와 공동체가 반드시 필요하며, 전자보다 후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최후통첩 게임이라는 경제학 실험이 있다. 첫 번째 사람에게 일정한 돈을 주고 두 번째 사람과 이를 나누도록 하는데, 두 번째 사람은 첫 번째 사람의 제안을 수락할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A에게 10만 원을 주면 A는 본인 임의로 B와 돈을 나눌 수가 있다. 절반씩 나눌 수도 있고 자기가 9만 원을 가지고 1만 원만 줄 수도 있다. 그러면 B가 수락하면 A가 정한 비율대로 받을 수가 있지만 B가 거절하면 A와 B 모두 받지 못한다. 실험을 진행해 보면 대체로 40~50% 비율을 B에게 준다고 한다. 하지만 20% 미만이 되면 대부분의 B가 거절을 한다는 것이다. 단 돈 만원이라고 받으면 본인에게 이득일 텐데 사람의 마음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공정하지 못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이 들면 자기의 이득을 포기할 수 있는 게 사람이다. 불평등은 사회를 불편할 뿐만 아니라 사회를 매우 불안하게 만든다. 불안한 사회 속에서 불편하게 나만 재산을 움켜쥐고 사는 것이 과연 현명한 생각인지 고민해보아야 한다. 

  자본주의의 풍요로 인해 지구의 시냅스가 많아졌다. 시냅스가 많아졌다는 것은 앞으로도 많은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것이다. 그 가능성에는 인류의 공멸도 포함되어 있다. 인류의 공멸로 가지 않기 위해 적절하고도 올바른 가지치기가 필요하다. 올바른 가지치기를 위해 우선 성찰이 필요하다. 잠시 멈추어 서서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 과연 이대로 가도 좋은지를. 이대로 가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지금의 옳고 바람직하다는 것을 과연 누가 만든 생각인지를. 멈추어 서서 인류에게 필요 없는 것들을, 너무 과잉되어 있는 것들을 잘라내 주어야 한다.

인류가 20만 살에서 멈출지, 앞으로 백만 살, 이백만 살 지속할지는 지금 어떠한 방향으로 어떠한 방법으로 가지치기할지에 달려 있다. 사람은 사춘기 시절 주변 어른들이 사춘기를 잘 극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도 있지만 인류에게는 그런 충고를 해줄 어른이 없다. (어디서 현명한 외계인이 와서 도와주었으면 좋겠다.) 인류 스스로 성숙해져야 한다. 인류가 성숙해지기 위해서는 우선 나부터가 성숙해져야 한다. 생각 없이 자본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소비하는 좀비’가 아니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자본을 전염시키는 좀비가 아니라 자비를 전파하는 꿀벌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각 개인의 성찰이 있어야 ‘인간다운’ 가지치기가 가능하다. 우리 모두는 이 지구를 이루는 시냅스들 이니까. 인류가 현재의 질풍노도의 시기를 잘 극복하여 우주의 어른으로서 성장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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