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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국현 Mar 18. 2022

감정이라는 안테나

우울과 불안이라는 감정에 관하여

“우울하면 과거에 사는 것이고, 불안하면 미래에 사는 것이고, 편안하면 이 순간에 사는 것이다.” <노자>


사랑하는 가족, 혹은 연인과 함께 아름다운 여행지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으면 ‘행복’이라는 기분 좋은 감정을 느낄 수 있다. 반면 사랑하는 가족을 잃거나 실직 같은 위기가 다가온다면 우울, 불안 같은 고통스러운 감정을 느낄 것이다. 행복, 우울, 불안 등등은 모두 감정에 대한 이름표이지만 우울, 불안 같은 이름표는 나에게 붙지 않기를 바란다. 우울, 불안 등의 감정들은 ‘부정적’이라는 범주에 가두어 놓고 할 수만 있다면 종양처럼 잘라버리고 싶어 한다. ‘살아있는 것’들은 그들의 조상들이 지나오면서 선택된 누적의 결과들이다. 우리는 그 과정과 결과를 ‘진화’라고 부른다. 직관적으로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을 괴롭히는 우울, 불안 같은 감정은 살아가는 데 전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데 진화 과정에서 왜 도태되지 않았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우울, 불안은 혹독한 진화의 시험을 어떻게 통과하였을까?


랜돌프 M. 레스의 <이기적 감정>을 읽어 보면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이 잘 설명되어 있다. 책에서 저자는 불안, 우울, 슬픔 같은 감정들은 나름대로 쓸모가 있기 때문에 자연선택 과정에서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런 부정적 감정들이 유전자에 이로울 때가 많다는 것이다. 오히려 부정적 감정을 느끼지 못할 경우 막대한 비용을 치를 수도 있다고 말한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보면 대를 이어 선택되는 단위는 ‘유전자’라고 밝히고 있다. 유전자의 세습(?)을 위해 유리한 형질이 선택되어 생존에 성공한 경우를 ‘자연선택’이라고 불린다. 자연선택의 관점에서 보면 우울과 불안은 유전자의 세습에 도움이 되어서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은 것이다. 도대체 어떤 도움이 되길래 부정적 감정들은 없어지지 않은 것일까?


사는 동안 우리 인생에 ‘고통’이 없기를 바란다. 그런데 고통이 없으면 정말 행복할까? ‘무통성무한증’이라는 희귀병이 있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병이다. 고통을 느끼지 않으니 좋을 것 같지만 이 병을 앓는 사람은 20살을 넘기기가 어렵다고 한다. 뼈가 부러져도 통증을 느끼지 못하니 뼈가 부러진 것도 모르고 방치하다가 더 큰 문제를 발생시키기도 한다. 뜨거운 물에 데어도 느낌이 없으니 데인채로 있다가 옴 몸이 화상을 입기도 한다. 고통이 인간의 수명을 연장시키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고 하니 참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감정의 고통도 육제의 고통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수명을 연장시키고 유전자를 퍼트리는데 유용하다는 것이다. 


우울은 주로 과거로 향한 감정이다. 우울감을 느낄 때 주로 하게 되는 행동은 지나간 일을 자꾸 곱씹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연인과 헤어진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한동안 ‘그때 그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때 그곳에 가지를 말걸’ 등등 지나갔던 말과 행동에 대해 후회하며 반복적으로 되뇌게 된다. 하지만 후회가 누적되면 우울증으로 악화될 수 있다. 우울이라는 감정은 바둑으로 비유하자면 ‘복기’하는 기능이 있다. 복기는 바둑이 끝난 후 모든 수순을 처음부터 다시 순서대로 놓아 보는 것이다. 복기를 하는 이유는 실패했던 원인을 분석하고 승리했던 패턴을 습득하기 위해서다. 바둑을 두어 본 사람은 알겠지만 복기를 하지 않으면 바둑 실력이 결코 늘 수 없다. 인간에게 ‘우울’은 바둑에서의 복기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다. 과거의 연애의 실패를 반추함으로써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도록 도와준다. 복기하지 않으면 바둑의 실력이 늘지 않듯이 후회를 하지 않는 사람은 복기하지 않는 바둑 선수와 같다. 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우울의 또 다른 특징은 소위 천재라 불린 사람들에게 많이 발견되는 경향이 있다. 아래 그림은 독일 르네상스 미술가 알베르히트 뒤러가 그린 작품 ‘멜랑콜리아Ⅰ’이다. 멜랑은 검은색을 뜻하는 MELAN에서 유래되었고 CHOLE는 담즙이라는 뜻이다. 즉, 멜랑콜리는 흑담즙이라는 뜻이다.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 (BC 460~377)는 인체는 혈액, 담즙, 점액, 흑담즙으로 이루어져 있고 몸에서 흑담즙이 과도하게 분비되면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슬프고 불행한 감정이 생긴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흑담즙이라는 뜻의 멜랑콜리가 우울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이탈리아 철학자 마르실리오 피치노 (1433~1499)는 멜랑콜리한 사람은 뛰어난 정신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경향이 있고, 모든 천재는 멜랑콜리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모차르트, 베토벤, 고흐, 어니스트 헤밍웨이, 마크 트웨인 등 다수의 천재 예술가들은 우울증을 겪었다고 한다. 천재가 꼭 우울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깊은 우울감이 무언가를 창조하는 경향이 있다는 보고서도 발행된 적이 있다. (출처가 어딘지 기억이 안 난다) 만약 우울감을 심하게 느낀다면 천재일지도 모르니 아직 발견되지 않은 능력을 시추해 보아도 좋을 것이다.

알베르히트 뒤러의 '멜랑콜리아' 

반면 불안은 미래로 향한 감정이다. 앞으로 닥쳐올 위기를 느낄 때 느끼는 감정이다. 학창 시절 시험이 다가오면 주로 느꼈던 감정이다. (우울도 마찬가지이지만) 불안은 정말 불쾌한 감정이다. 불안하면 심장 박동수 증가, 호흡곤란, 발한, 타는듯한 갈증, 소화불량 등을 겪고 심하면 공황장애까지도 일으킨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우리 몸은 코르티솔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되어 전투태세를 갖추게 된다. 자주 불안하면 우리 몸은 항상 전투 준비 중인 셈이다. 


이렇듯 불안이란 감정은 우리를 매우 힘들고 지치게 만든다. 하지만 불안이란 감정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불안을 느끼지 않는 수험생은 시험 보기 전 날에도 푹 자게 될 것이고 성적은 좋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불안감을 느끼는 개미는 겨울을 앞두고 식량을 준비하지만 불안감을 느끼지 못한 베짱이는 매일 놀기만 하다가 겨울이 닥치면 먹을 게 없어 결국 굶어 죽고 만다. 옛날 원시시대에 두 부류의 조상이 있었을 것이다. 자주 불안을 느끼는 조상들은 사자가 나타날 것 같은 장소에는 얼씬도 하지 않아서 사자와 마주칠 기회를 애당초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불안감이 없는 조상들은 사자가 자주 나타나는 지역에 걱정 없이 다니다가 행여 사자를 만나더라도 반갑게 인사를 건네었을 것이고 결국은 그의 유전자를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사자의 유전자 증식에는 도움을 주었겠지만) 


문제는 이런 우울, 불안의 감정이 긍정적인 요소도 있지만, 일정 임계치를 넘으면 사람에게 악영향을 끼친다. 우울, 불안이 너무 심하면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경우도 발생된다.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유용하지만 고통스러운 우울, 불안의 감정을 슬기롭게 잘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다스릴 수 없다면 친구처럼 사이좋게 지낼 수는 없을까?


감정에 대한 수많은 자기 계발서가 꾸준히 나오는 걸로 봐서는 아직까지 획기적인 방법은 없는 것 같다. 많은 자기 계발서에서 부정적인 감정에 맞서 긍정적인 생각으로 극복하라는 얘기가 많은데 그건 칼에 찔렸을 때 아프지 않다고 생각하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가장 좋은 방법은 전문가에게 상담을 받고 필요한 조치를 처방받는 것이다.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적절한 약물을 복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 중 하나다. 그런데,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이 방법이 일시적이라는 단점이 있는 것 같다. 영양제도 아닌데 오랜 기간 약물을 복용하는 게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야생마처럼 날뛰는 감정을 잘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생각해 보면 야생마가 계속 날뛸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날뛰면 야생마도 힘들기 때문이다. 야생마도 쉬어야지. 그래서 로데오 경기는 야생마가 지칠 때까지 버티는 경기이다. 감정도 야생마와 같이 지속적으로 날뛸 수 없다. 롤러코스터처럼 오르락내리락할 수는 있어도. 


이런 감정의 등락을 이용한 나의 개인적인 감정 관리법을 소개해보려 한다. (내용은 여타 자기 계발서에 나온 내용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이긴 하지만) 우선 우울, 불안의 감정을 부정적으로 인식하지 않는 것이다. 칼에 찔렸는데 아프지 않다고 생각하라는 거랑 뭐가 다르냐고 물을 수 있다. 우선은 감정을 부정하지 말고 객관적으로 인식하라는 뜻이다. 감정은 뇌가 보내는 신호이다. 신호를 신호로서 해석하고 판단하면 된다. 운전할 때 파란 신호등에는 주행하다가 빨간 신호등에는 멈추면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멈추어서 빨간 신호가 주는 의미를 해석하고 대비하면 된다. 우울은 과거의 일을 복기해서 반복하지 말라는 신호이고, 불안은 앞으로 안 좋은 일이 발생할 것 같으니 대비하라는 신호인 것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면 된다. 신호를 신호로써만 인식하면 조그만 눈덩이가 눈사태로 커지는 것처럼 과대하게 해석하고 반응하는 것을 줄일 수 있다. 


감정은 폭풍우와도 같다. 감정을 신호로만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은 심한 폭풍우를 동반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야생마의 날뜀과 폭풍우의 소용돌이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소멸된다. 시간이 지나면 소멸되는 특성을 이용해 보자면, 우선 감정이 순식간에 밀려올 때 심호흡을 하며 열만 세어본다. ‘아… 감정이 밀려오고 있구나…이 감정은 뇌가 나에게 보내는 신호이다…무슨 신호일까…’ 10초 정도가 지나면 야생마가 숨을 고르듯이 감정도 숨을 고르려 잠시 쉰다. 이때 종이와 펜을 꺼내 밀려오는 감정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는 것이다.


‘안녕, 너는 무슨 감정이니?’ 

‘너의 이름은 우울이니?’ 

‘왜 우울이가 날 찾아왔을까?’ 

‘아~ 지나간 사랑이 아쉬워 나보고 복기하라고 찾아왔구나…’ 

‘이런저런 일들을 내가 잘못했구나’ 

‘앞으로 새로운 사랑을 만나게 되면 다시는 지난 일을 반복하지 않을게’


‘안녕, 너는 불안이 이구나’ 

‘오늘은 왜 안 오나 싶었다’ 

‘우리 불안이는 오늘은 무슨 일로 찾아왔을까?’ ‘가만히 생각해보자…’ 

‘불안이 가 나한테 원하는 게 무엇일까?...’ 

‘아~ 시험이 다가오고 있으니 놀지 말고 공부하라고 왔구나’ 

‘알았어, 안 놀고 열심히 공부할게’ ‘그럼~ 안녕’ 

‘공부 열심히 할 테니까 내일을 안 와도 돼~’


폭풍 같이 밀려오는 감정에 직면할 때는 나를 집어삼킬 것 같지만 감정은 막상 실체가 묘연한 구름과도 같다. 생각해 보면 감정의 실체를 목격했다는 사람을 들어본 적이 없다. 사진처럼 찍을 수 있는 실체가 없는 것이다. 멀리서 보면 번개를 동반한 먹구름이지만 막상 접해보면 안개와도 같은 것이다. 그냥 좀 젖으면 그만인 것을. 근데 으레 익사할까 봐 겁부터 먹는다. 허리케인 같은 감정도 종이를 꺼내어 자세히 묘사해 보려 하면 막상 별게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심호흡 열 번, 그리고 펜으로 감정과 대화하기. 우울증, 불안증을 친구처럼 30년째 잘 지내고 있는 나름의 노하우다. 병원에서 상담도 받아보고 약도 먹어봤지만 이 방법이 더 좋은 것 같아 필자는 이 방법을 애용하고 있다.


우울이 없으면 좋을 것 같지만 막상 없으면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는 바보가 된다. 불안이 없으면 마냥 행복할 것 같지만 마냥 놀다가 결국 굶어 죽는 베짱이 신세가 된다. 다시 생각해 보면 우울, 불안의 감정을 남들보다 잘 느낀다면 이는 오히려 축복받을 일이다. 남들보다 성능 좋은 안테나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먼 옛날에 성능 좋은 안테나를 지닌 조상들이 살아남았고 우린 그들의 후손이 되었다. 이것이 부정적 감정이 도태되지 않은 진화학적 이유이다.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이렇게 말했다. “불안을 잘 다룰 줄 아는 사람은 궁극의 진리를 배운 것과 같다.” 과거로 향한 우울이라는 안테나, 미래로 향한 불안이라는 안테나. 이 쌍둥이 안테나들이 인생이라는 험난한 바다에서 나라는 배가 좌초되지 않고 행복의 섬으로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궁극의 진리와 신호를 제공해 줄 것이다. 그러니 이 안테나들은 철거할 대상이 아니라 성능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잘 관리해야 할 궁극의 인생 아이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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