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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국현 Mar 29. 2022

사피엔스의 이야기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보면 현재 문명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는 집단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능력 때문이라고 말한다. ‘던바의 수(※)’를 넘는 사람들이 대규모 사회를 이룰 수 있는 이유가 이런 집단적 상상력이라는 것이다. 원시시대 그들은 어떻게 상상력을 얻게 되었을까? 원시인들은 언어를 사용하게 됨으로써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나 존재하지 않은 대상을 머릿속으로 그려볼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었다. 그렇게 얻은 능력으로 무엇을 상상했을까? 아마 철학에 대한 해답을 구하지 않았을까? 원시시대에도 철학적 질문은 있었을 것이다. 번개는 왜 치는지,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계절은 왜 바뀌는지, 다음 사냥을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등. 혼자서 밤하늘을 보며 별에 대해 궁금해하던 그 당시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있었을 것이다. 그럼 그 당시 원시 철학(?)의 도구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이야기였다. 이야기란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했는지의 대한 내용이다. 예를 들어 번개가 치는 이유는 하늘 위의 그 누군가가 분노해서 창을 던지면 그런 것이라고 이야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 누군가는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능력이 있으니 추후에는 그 존재를 신이라 불렀을 것이다. 그 가상의 존재의 이야기를 믿었고 그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같은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이 같은 미래를 꿈꾸며 자기들의 이야기를 지키기 위해 협력하며 살았던 것이다. 


    ※ 던바의 수(Dunbar’s number): 인류학자 로빈 던바(Robin Dunbar)가 주장한 것으로, 진정한 사회         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최대치는 150명이라는 주장


간혹 상상하기 어려운 고대의 건축물들이 있다. 그중에 피라미드는 현대에서도 불가사의한 건축물로 불린다. 피라미드를 건설하기 위해 약 2만 명의 사람들이 20년 동안 작업한 것으로 추정이 된다. 무엇을 위해 그 웅장한 건물을 지었는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 동안  피라미드 건축에 동원할 수 있는 원동력이 바로 같은 ‘믿음’을 믿는 상상력인 것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그들의 이야기, 그들의 믿음, 그들만의 신화를 믿었고 그들의 이야기를 완성하기 위해 그 많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 동안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협력한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믿는 호모 사피엔스의 특성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우리가 속해 있는 국가도 사실의 이런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존재이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는 영토, 국민, 주권이라는 3요소로 이루어져 있지만 내가 발 딛고 서있는 한 줌의 땅을 가리켜 국가라고 말하면 대부분 동의하지 않는다. 그 한 줌 위에 서있는 한 개인을 가리켜 국가라고 해도 역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는다. 주권은 실체가 있는 존재도 아니다. 하지만 인류는 이런 가상의 존재를 위해 오랜 역사 동안 협력해 왔고 또 서로 싸워왔다. 그리고 지금도 현재도 진행 중이다. 


기업도 상상력의 결과물이다. 국가와 마찬가지로 기업의 건물이나 직원을 기업이라 부르지 않는다. 역시나 사업자 등록증을 기업이라 부르지 않는다. 구석기 시절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것은 돌을 깨뜨려 만든 주먹 도끼, 자르개, 찍개 등이 전부였지만 지금은 핸드폰, 자동차, 심지어 우주로 나갈 수 있는 우주선도 만들 수 있다. 그 원동력은 기업이라는 가상의 실재를 믿고 협력하는 능력에 있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같은 이야기 아래 협력할 수 있으니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물건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우리가 들고 다니는 스마트 폰도 이러한 인류의 위대한 협력의 결과인 것이다.


어떤 이야기를 믿느냐에 따라 국가 혹은 기업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이야기는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야기를 좋아한다. 5세 아이들은 10분 동안 집중하기도 힘들지만 이야기를 들을 때는 제법 긴 시간도 집중력을 발휘한다. 이처럼 사람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원시시대의 철학, 생존에 대한 매뉴얼은 이야기를 통해서 전해졌다. 이야기가 생존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남의 이야기를 귀담아듣지 않았던 원시인들은 그의 후손을 남길 확률이 낮았을 것이다. 우리가 남의 이야기를 신경 써 들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호모 나랜스 Homo narrans’는 이야기하는 인간이라는 뜻으로 인간은 누구나 이야기 본능을 가진 존재라는 뜻이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 이야기에는 인간의 삶과 세계에 대한 이해가 담겨 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 이야기에는 인간의 삶과 세계에 대한 이해가 담겨 있다.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Joseph Campbell)은 우리가 ‘이야기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은 세계와 관계를 이루기 위해, 우리 삶을 현실과 조화시키기 위해서라고 했다. 인간의 짧은 생애에서 이룰 수 있는 경험치는 한정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보다 많은 간접 체험을 통해 세상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자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러시아 철학자 미하일 바흐친(Mikhail Bakhtin)은 인간의 삶 자체가 결국 나의 이야기와 남의 이야기가 서로 섞여 가는 상호 교차적인 대화의 과정이라고 말했다. 이렇듯 이야기는 인간의 본능인 것이다.


약 1만 2천 년 전 인류가 농업을 시작하게 된 이후 철제 농기구의 발달과 함께 농업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달하게 되면서 잉여 생산물이 발생하게 되고 이 잉여 생산물에 대한 소유권을 다투는 과정에서 계급이 발생하게 되었다. 평등했던 인류는 이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나뉘게 되었다. 피지배 계급은 다수이고 지배계급은 소수에 불과했다. 소수의 지배 계급이 다수의 피지배 계급을 지배하기 위해 필요한 건 이데올로기, 즉 새로운 이야기였다. 지배계급은 신과 인간의 중개인이자 신의 대리인이기 때문에 다수의 민중을 다스릴 수 있는 권리가 있으며 다수의 민중은 지배 계급에 대해 복종해야 한다는 그들 만을 위한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런 이야기를 대중이 믿음으로써 대중은 언제나 다수였음에도 늘 지배를 받아왔다. 밤하늘의 별을 보며 이야기를 만든 그는 지배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불행하게도 모두가 공감하고 동의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지배계급이 만들었고 폭력으로 강요한 이야기였다. 사피엔스의 역사는 그 폭력의 기록이라 해도 무방하다. 


지금 현대의 이야기의 주제는 무엇일까? 자본주의 특징은 과잉생산이다. 과잉된 상품을 누군가 계속 사지 않으면 자본주의는 파산한다. 그래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중심 주제는 ‘소비지상주의’가 되었다. 소비로써 나를 표현하고 소비가 천국으로 이르게 한다는 이야기다. 그럼으로써 돈을 숭배하게 된다. 사실 돈도 그냥 종이에 불화하다. 그 종이에 가치라는 믿음을 공유한 현대인들은 소비로써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노동에 헌납한다. TV 속 광고 주인공의 이미지를 따라 하기 위해 나도 모르게 ‘생각 없이 소비하는 노동자’로 길들여져 가는 것이다.


현대의 소비지상주의 이야기가 우리 모두를 행복으로 이끌어 주는 이야기인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스털린의 역설’이라는 이론이 있다. 경제학자 리처드 이스털린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GDP가 꾸준하게 상승했지만 미국인의 행복감은 상승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소득이 일정 수준을 넘어 기본 욕구가 충족되면 소득이 증가해도 행복은 더 이상 증가하지 않는다는 이론이다.

김태형 교수의 <풍요중독사회>에서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는 다층적 위계로 이루어져 있어서 다양한 불안을 유발한다고 말한다. 다층적으로 이루어진 사다리 구조에서는 한 층이라도 더 올라가려고 하고 그 욕구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개인은 파편화되고 각종 불안이 발생한다고 말하고 있다. 아무리 높은 사다리에 위치하고 있더라도 내 위의 사다리에 존재하는 사람은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이며 내 사다리를 뺏으려고 올라오는 사람도 끝없이 밀려오기에 거의 무한에 가까운 불안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풍요로운 상품으로 둘러 쌓인 우리의 이야기는 풍족하고 행복해 보여도 실상 한 꺼풀을 벗겨보면 아수라장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지금의 이야기가 수정되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면 결말은 정해져 있다. 그것은 ‘인류의 공멸’이다. 현대의 대부분의 상품은 화석 연료를 기반하거나 변형하여 생산하기에 필연적으로 지구 온난화를 유발한다. 지구 온난화를 멈출 수 없으면 현대 문명은 공멸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이야기꾼들은 자본주의의 기술과 시스템이 해결해 줄 거라는 또 다른 이야기로 우리를 현혹하고 있다. 그리고 현대 사회는 ‘정보의 홍수’라 불리듯 너무나도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지고 유통되고 있다. 도대체 어떤 이야기가 맞는 이야기인지 어느 이야기를 믿어야 하는지도 알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선택하기가 너무도 어려우니 자본주의 이야기꾼들이 아름답게 꾸민 이야기에 불속에 날아드는 곤충같이 우리도 모르게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고대의 노예들은 귀족들이 만든 이야기를  믿은 대가로 그들의 후손도 출생과 동시에 노예가 되는 운명이 되었다. 현대의 우리는 무엇이 다를까? 현대 우리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가 공감하고 동의한 이야기는 분명 아니다. 각종 미디어와 광고, 교육 등을 통해 자본주의 이야기꾼들에게 길들여진 이야기이다. 이제 잠시 멈추어서 무엇이 진정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이야기인지 성찰이 필요하다. 


먼 옛날 한 조상을 떠올려 본다. 지금으로부터 약 삼백만 년 전 어느 날, 밤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던 최초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그(혹은 그녀)가 만든 허구의 상상력이 펴져 후대에는 그 종족의 삶을 결정하는 이야기가 되었다. 지금 우리가 어떤 미래를 상상할지에 따라  우리 후손들이 살아갈 이야기로 만들어질 것이다. 이야기가 문화를 만들고, 문화가 우리의 역사를 바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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