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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국현 Apr 10. 2022

식물이 인간에게 보내는 편지

안녕하세요. 저는 식물입니다. 여러분이 주위를 둘러보면 흔히 볼 수 있는 나무, 풀, 꽃 등이 저희 식물들입니다. 저희는 약 5억 년 전에 고생대 시대부터 육지로 진출하였습니다. 우리가 동물과 다른 가장 큰 특징은 이동하지 않고 한 곳에 뿌리는 내리고 정착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동물처럼 이동을 할 수 없지만 머지않아 육지의 대부분을 우리의 뿌리와 줄기로 뒤덮었을 수 있었습니다. 그 위로 동물들의 서식지가 생기면서 동물의 역사도 시작되었지요. 


문득 오래전에 발생되었던 한 사건이 생각납니다. 약 6백만 전 지구의 기후가 건조해지면서 산림이 줄어들고 초원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기후가 좋았을 때 유인원들은 나무 위에서 먹을 것을 구하고 땅 위의 포식자를 피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 기후가 건조해지면서 삼림이 줄어들면서 유인원의 삶은 점점 힘들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유인원 한 마리가 용감하게 땅 위로 발을 내디뎠습니다. 유인원에게 나무 밑의 세상은 포식자가 가득한 위험한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용감한 유인원은 서서 걸어 다니며 땅 위를 탐험하였고, 약해 보였지만 명석한 지혜와 도구를 사용하여 점점 서식지를 넓혀갔습니다. 바로 ‘인간’의 시작이었습니다. 


인간은 참 특이한 동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덩치도 작고 날카로운 이빨도 없어서 금방 멸종될 것으로 보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실 인간이 나무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나무 위에 경쟁이 심해져 다른 유인원에게 밀려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멸종하지 않고 점점 개체수를 늘려갔고 서식지도 넓어졌습니다. 예상외의 결과에 우리는 놀랐고 우리는 인간을 보다 자세히 관찰해 보기로 했습니다. 저희가 관찰한 결과해본 결과 인간이 멸종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서로 협력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다른 유인원에 비해 아이를 자주 낳았고 그 아이들을 공동으로 키웠습니다. 그들은 공동으로 먹을 것을 구하고 얻은 것은 공평하게 나누었습니다. 비록 사자와 같은 날카로운 이빨이나 발톱이 없었지만 돌을 내리쳐 만든 석기로 없는 이빨과 발톱을 대신하였습니다. 그 석기를 이용해 육식동물이 먹다 남은 고기를 발라 먹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육식을 시작하게 된 인간은 뇌가 점점 커지더니, 커진 만큼 똑똑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똑똑해진 인간은 말을 하기 시작하였고 언어의 사용은 인간들을 더 협력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협동, 지능, 언어를 갖춘 인간은 (예전에는 할 수 없었던) 그들보다 더 큰 짐승들을 사냥하여 서식지를 넓혀 갔습니다. 이들은 더 이상 약한 유인원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도 이런 인간의 발전에 성원을 보내며 응원하였습니다. 

언어의 도구를 갖춘 인간은 세상에 없는 존재와 아직 벌어지지 않는 일들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상상력을 이용하여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능력도 생겼습니다. 이렇게 공유된 상상과 이야기는 인간을 보다 큰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커다란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게 된 인간은 놀라운 일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만 년 전 수천 명의 인간들이 모여 ‘괴베클리 테페’라는 거대한 신전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괴베클리 테페’는 터키어로 배불뚝이 언덕이라는 뜻입니다. 주변 석회암 지대에서 무려 10톤인 넘는 돌을 언덕 위에까지 끌고 올라와 신전을 세운 것이었습니다. 다른 유인원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인간들은 서로의 이야기를 공유했고 그 이야기의 완성을 위해 상상을 초월한 일을 해낸 것이었습니다.


괴베클리 테페를 지을 때 선결해야 할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대규모의 공사를 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 동안 한 곳에서 생활을 해야 합니다. 기존의 사냥과 채집 활동을 하던 이동 생활로는 그런 공사를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인간은 식물의 생활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식물처럼 정착생활을 해야 커다란 프로젝트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정착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같은 곳에서 먹을 것을 구해야 했습니다. 관찰력이 뛰어났던 인간들은 곡물의 씨를 뿌리면 곡물이 자라고 그것을 경작하면 정착하면서도 식량을 조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바로 ‘농경’이 시작이 된 것입니다. 농경이 발달하면서 인간은 처음으로 ‘잉여생산물’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잉여생산물은 인간에게 축복이자 비극을 선사하였습니다.  


농경과 정착 생활의 발전은 거듭되어 기원전 약 2~4천 년 전에 인간은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그때부터 인간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초원으로 진출한 이후 나약했던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서로 협력하고 아껴주며 살았습니다. (이웃 부족과는 가끔 싸우기도 했지만) 이제 포식자에게 잡아 먹힐 걱정도 없고 먹고 살만 해지니(?) 잉여생산물의 소유권을 두고 서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툼에서 이긴 자들은 지배자가 되어 패자들을 착취하기 시작했습니다. ‘계급’이 탄생한 것이지요. 소수의 계급이 다수의 민중을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식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들은 인간에게 과거의 협력하며 살아가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권했지만 그들은 우리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인간과 식물의 소통 방법은 다릅니다. 저희는 향기와 냄새로 소통합니다. 사실 근본적으로는 식물과 인간의 소통은 불가능하지요. 그래도 예전에는 어느 정도 통하는 부분은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인간은 우리 식물에게도 영혼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식물을 멸시하지 않고 존중해 주었습니다. 어떤 부족은 우리에게 신성시하기도 했고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인간은 우리들의 언어를 들을 수는 없었지만 소통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꽃이나 나뭇잎에서 나는 향기를 맡으며 우리의 생각에 공감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인간들은 변했습니다. 변한 인간들은 우리의 향기를 맡기보다 우리를 베어 더 화려한 건물을 지으려 했습니다. 예전에는 나무에 열린 열매를 그저 감사하는 마음으로 따먹었던 인간은 이제 씨를 뿌려 강제로 키우고 거두어 갔습니다. 우리 식물에 대해서도 착취가 시작된 것입니다.


인간들은 약 2백 년 전에 과거 우리 조상들이 묻혀 만들어진 석탄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기준으로 보면 명백한 도굴 행위입니다) 석탄을 발견하고 사용하면서 인류의 문명은 비약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했습니다. 공장이 생기고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다양하고 많은 상품을 만들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자본주의’가 시작된 것입니다. 문명이 커져가는 만큼 욕망도 커졌습니다. 아니 욕망이 커져서 문명이 커진 것입니다. 이제 인간들은 그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과거에 이름을 붙여주고 목소리에 귀 기울이던 우리 식물들을 무자비하게 벌목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장에 동물들을 ‘가축’이라 부르며 상품 만들듯이 무자비하게 찍어내고 학살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매우 거만 해졌습니다. 우선 자신들이 지구의 지배자라고 생각합니다. 식물의 입장에서 보면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바이오매스biomass를 기준으로 보면 지구의 99%가 식물입니다. 인간의 바이오매스는 티도 안 납니다. 인간 말로 그저 ‘새발의 피’ 일뿐입니다. 지구는 온통 식물로 뒤덮여 있으니 지구의 생태계가 식물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것은 누가 봐도 명백한 사실입니다. 식물이 사라지면 동물도 살 수 없습니다. 동물이 없어도 식물은 사는데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인간은 우리 식물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식하면 자유로운 법입니다. 우리 식물도 보고 듣고 서로 대화합니다. 심지어 중력, 습도, 자기장도 계산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식물 입장에서는 인간의 감각 능력은 그저 어린아이 같아 보일 뿐입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인간은 알지만 인정하지 않는) 식물의 우수한 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식물의 가장 큰 장점은 광합성을 한다는 점입니다. 광합성은 빛 에너지를 화학 에너지로 바꾸는 능력입니다. 우리 식물들은 햇빛만 있으면 스스로 에너지를 만들어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을 비롯한 동물들은 이런 능력이 없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는 다른 존재로부터 에너지를 가져와야 합니다. 쉽게 말하면 초식동물은 우리 식물을 뜯어먹어야 하고 육식 동물은 그런 초식 동물을 잡아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 다른 존재를 죽여야 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모든 비극의 시작인 것입니다. 인간도 살기 위해 우리 식물을 비롯한 다른 동물들을 죽여서 만든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다 잘 살기’ 위해 타인으로부터 무언가를 빼앗아 욕망을 채우고 있습니다. 독일의 사상가이자 경제학자인 마르크스는 자본가가 노동자의 시간을 빼앗아 이윤을 착취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지배 계급이 피지배 계급을 착취하고 서로 그 지배 계급이 되기 위해  투쟁하는 과정일 뿐입니다.


우리 식물은 광합성을 하는 덕분에 다른 존재를 해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식물이야 말로 진정한 평화의 상징이지요. 초식 동물은 살기 위해 우리 식물을 뜯어먹습니다. 우리도 고통스럽지만 그런 심정을 이해합니다. 그래서, 이동할 수 없는 우리 식물이 선택한 것이 ‘모듈화’입니다. 모듈은 분산 기능입니다. 인간은 특징 있는 장기들이 모여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고 있지만 우리 식물들은 동물의 장기 같은 기능을 온몸으로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비롯한 동물들은 만약 하나라도 장기가 손상되면 살아가기가 매우 어렵지만 우리 식물들은 한 부분을 상실하여도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습니다. 현재 인간들이 사용하고 있는 인터넷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인간도 이런 식물의 특징에 아이디어를 얻어 인터넷을 만들었습니다. 미 국방부가 개발한 아르파넷arpanet도 대규모 핵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모듈식으로 개발되었습니다. 모듈화는 네트워크 대부분이 파괴되어도 기능을 유지할 수 있는 점이 가장 큰 장점입니다.


러시아 식물학자 클리멘트 티미야제프는 “식물은 지구와 태양을 연결해주는 매개체다.”라고 말했습니다. 태양에너지를 이용하는 지구는 식물의 광합성 덕분에 동물들은 식물로부터 에너지를 얻을 수 있고 인류의 문명도 식물의 유기 퇴적물인 화석연료를 이용하여 문명을 발전시켰습니다. 식물이 없으면 동물도, 인간의 문명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우리 식물에게 전혀 감사하지 않고 있습니다. 


두서없이 말이 길어졌습니다. 인간에게 처음 편지를 쓰다 보니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제가 인간들에게 편지를 쓰는 이유는 폭주하는 인간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입니다. 저희 식물들이 보기에 인간은 지금 멸종의 종착역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있고, 게다가 점점 더 속도를 높이고 있습니다. 화석 연료를 기반한 상품의 대량 생산은 지구 온난화를 일으키고 기후를 변화시켜  지구를 더 이상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욕망에 눈이 멀어 스스로 멈추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타인과 끊임없이 경쟁하며 심지어 죽이기까지도 합니다. 잉여 생산물의 탄생 이후 인류의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전쟁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저희 식물들이 보기에 너무 안타깝습니다. 수백만 년 동안 척박한 환경에 살아남기 위해 서로 아끼고 협력하던 인간의 모습은 어디로 갔습니까? 우리 식물들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향기를 맡으며 소통하려던 그 공감의 마음은 어디로 사라졌습니까? 우리는 지구 온난화가 와도 상관없습니다. 그동안 지구의 기후가 수없이 뒤바뀌고 다섯 번의 대멸종이 왔어도 우리 식물은 살아남았습니다. 지구온난화는 지구를 멸망시키지 않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멸종할 뿐입니다. 인간이 사라져도 우리 식물들은 별 상관없습니다. 그저 조금 심심해질 뿐입니다.


당신들이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고 싶다면 우리 식물들을 보고 배워야 합니다. 인간은 우리처럼 광합성을 할 수 없어 다른 존재로부터 에너지를 가져와야 하지만 최소한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지금과 같이 공장식 축산 산업 같은 대량 살상이 아닌 최소한의 개체만 희생시켜야 합니다. 과거 수백만 년 동안 인간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공존하는 동물, 식물들과 교감했으며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살생은 최소한으로 행하였습니다. 하지만 욕망에 점점 눈이 멀더니 타 존재의 고통을 둔감해지더니 현재는 동식물을 엄청나게 살생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비록 광합성을 할 수는 없지만 광합성 같은 삶을 산 인간이 가끔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신이라 부르는 예수, 부처가 바로 광합성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부처는 신이 아니지만) 예수는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는 모든 욕망을 버리고 자비를 베풀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은 최소한의 음식을 먹었고 최소한의 옷만 걸쳤으며 철저한 무소유를 실천하셨습니다. 자신의 깨달음과 지혜를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습니다. 인간들은 그런 예수, 부처를 모시기 위해 교회, 사찰을 세우고 경전을 배우기는 하지만 정작 실천하지 않습니다. 저희 식물이 보기에 인간의 이런 이중적인 모습이 그저 어리둥절할 뿐입니다. 교회, 사찰을 세우고 그 안에서 그저 자신의 욕망을 가리기 위해 이미지로만 소비하고 있을 뿐입니다. 진정으로 믿지는 않는 것이지요. 인류가 위기에서 빠져나올 해답은 이미 2천 년 전에 위대한 성인들이 알려주었습니다. 이제는 실천해야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식물처럼 평등하게 살아야 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인류는 오래 동안 평등하게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발생된 잉여생산물을 두고 욕심이 생겨 서로 싸우다 보니 인류의 삶은 투쟁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귀엽던 기즈모가 야식을 먹고 괴물로 변한 것처럼 말입니다. 불평등한 사회는 끊임없는 불안을 촉발하게 됩니다. 서로가 그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더 욕망하게 되고 끝없는 악순환이 인간 사회를 지옥으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인간 여러분, 이제 당신들의 폭주 기관차를 멈추어야 합니다. 우린 모두 루카의 자손입니다. 아주 먼 옛날 한 부류는 정착생활을 선택했고, 다른 한 부류는 이동생활을 선택했을 뿐입니다. 우리는 인간과 같이 공존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형제를 잃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이름을 붙여 주며 향기를 맡고 공감하려는 그때의 모습으로 돌아오기를 바랄 뿐입니다. 예수, 부처의 말씀을 자신의 욕망을 가리는 도구로 이용하지만 말고 진정으로 믿고 실천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식물들의 평화로운 삶을 당신들의 삶에 접목시켜보세요. 그러면 인류는 우주의 구석에서 조용히 사라지는 문명이 아니라 우주로 나아가는 평화의 개척자가 될 것입니다. 6백만 년 탐험을 시작했던 그때처럼요.


식물에게 시간은 매우 느리게 흘러갑니다. 식물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삶은 매우 빠르게 느껴집니다. 마치 인간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삶은 우리 식물에게는 아주 재미있고 감동적인 드라마입니다.  우리는 진심으로 당신들의 휴먼 드라마가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고 바랄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신생대 플라이오세 때부터 당신 곁에 있어온 친구, 식물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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