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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국현 Apr 24. 2022

일체유뇌조(一切唯腦造)

뇌가 보는 세상

불교에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개념이 있다.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낸다는 뜻이다. 대표적인 일화로는 신라의 고승 ‘원효’의 이야기가 있다. 모두 알다시피 원효가 당나라 유학길에 어느 동굴에서 잠을 자게 되었는데, 잠결에 목이 말라 어둠 속에서 바가지에 담긴 물을 마셨다. 그때는 시원하고 맛이 좋았는데 아침에 눈을 뜨고 확인해보니 해골에 담겨 있는 썩은 물임을 알고 원효는 구토를 하게 된다. 모르고 마셨을 때는 참 시원하고 맛있는 물이었는데 실제 해골물을 보니 구토를 하게 된 것이다. 그때 원효는 더럽고 깨끗한 것이 사물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달려 있다고 깨달았다. 진리는 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원효는 그 깨달음을 얻고 유학을 단념하게 된다. 


현대 뇌과학도 세상은 내가 보는 대로 보이는 게 아니라 뇌가 해석한 것을 본다고 말한다. ‘일체유뇌조(一切唯腦造)’라고 해야 할까? 뇌는 세상이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아니라 오감으로 얻은 정보를 나름대로 해석한 후 보여준다는 것이다. 왜 뇌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않는 것일까? 우리가 실재를 보지 않고 뇌가 편집한 정보를 본다는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겠다.


눈앞에 빨간 사과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사실 '빨강'은 사과가 가진 색이라기보다는 우리의 눈이 700 나노미터의 빛을 지각하는 어떤 '느낌'일 뿐이다. 이처럼 색깔은 물체가 가진 속성이 아니라 뇌가 물체를 지각하는 방식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위아래가 뒤집힌 두 개의 조그만 이차원 영상에 불과하다. 그런데 우리가 실제로 지각하는 것은 똑바로 선 단일한 삼차원의 세계이다. 우리의 뇌는 이 전기화학적 신호를 해독해서 영상 신호로 바꾸는 아주 복잡한 변환 장치인 셈이다. 우리의 뇌는 모종의 방법으로 그 언어를 해독해서,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본다'는 느낌을 만들어낸다.


뇌는 이야기를 내놓고, 우리는 각자 자신의 뇌가 들려주는 이야기라면 무엇이든 믿는다. 우리는 외부 세계를 직접 경험하며 산다고 느끼지만, 우리가 상대하는 실재는 궁극적으로 어둠 속에서, 전기화학적 신호들로 이루어진 낯선 언어로 작성된다. 플라톤의 동굴처럼 우리의 뇌도 두개골이라는 어두운 동굴에 갇힌 채로 뇌가 편집한 그림자만 볼뿐이다. 왜 뇌는 스스로 두개골 속에 갇혔을까? 왜 캄캄한 동굴의 어둠 속에 갇혀 있는 걸까? 그거야 뇌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이건 부분적인 답일 뿐이다. 뇌는 감각 신호를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변형한다. 현실과 직접 대면해서 모든 정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게 생존에 유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손뼉을 칠 때 실제로는 소리가 대한 정보가 먼저 처리가 되고 시각에 대한 정보가 (거의 근소한 차이지만) 나중에 처리된다고 한다. 시각 데이터가 청각 데이터보다 더 복잡한 처리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손바닥이 서로 맞닿는 순간과 손뼉 소리가 한순간에 일어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뇌가 시차가 있는 정보를 모은 다음 절묘하게 편집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동기화 과정을 거친다는 것은 우리가 (아주 작은 차이지만) 과거에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뇌가 실재를 실제로 보여주지 않는 또 다른 예가 ‘착시’ 현상이다.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예가 ‘화살표 착시’이다. 아래 그림에서 두 개의 직선이 서로 같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의 뇌는 우리말을 듣지 않는다.

화살표 착시

아래의 그림은 ‘그림자 착시’이다. A와 B가 같은 밝기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눈에는 그림자 안의 B가 더 어둡게 보인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그림자 속의 물체의 색이 더 어둡다는 걸 알고 있다. 따라서 그림자 속에 있으면 그것의 색이 더 밝을 거라 생각하고, 실제로도 그렇게 본다. 그래서 A, B 두 사각형이 같은 밝기인데도 그림자 속에 있는 A사각형이 더 밝게 보인다는 것이다. 우리의 뇌는 현실을 왜 이렇게 이상하고 때로는 부정확하게 인식하는 걸까? 미국의 유전학자 도브잔스키의 명언 속에 그 답이 있을 것 같다. “생물학의 제 현상들은 '진화'의 관점을 떠나서는 이해되지 않는다.” 결국 이런 현상은 진화적으로 대물림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뇌는 주변 환경에 따라 실재를 적절하게 변형해서 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특징이 생존에 유리했을 것이고, 그렇기에 자연선택되어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이다.

그림자 착시

세계적인 뇌과학자 라마찬드란 박사의 <두뇌 실험실>이라는 책에서 공사장에서 철로 된 막대가 머리 뒷부분을 관통하는 사고를 당한 조쉬 라는 환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조쉬는 이 사고로 뇌에서 시각을 담당하는 부위가 일부 손상되어 시야의 왼쪽에 까맣게 보이는 맹점을 갖게 되었다. 조쉬는 맹정 때문에 가끔 여자화장실을 남자화장실로 착각하고 잘못 들어간다고 한다. 맹점 때문에 WOMEN의 WO를 보지 못할 때가 있어서이다. 라마찬드란 박사는 조쉬에게 그는 다음과 같이 하나의 선분을 보여주고 그 선분의 가운데가 그의 맹점 부위를 지나도록 했다. 그러면 조쉬에게는 아래 그림처럼 선분이 두 개로 끊긴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처음에 조쉬는 분리된 두 개의 선분이 보인다고 했는데 잠시 후 그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두 개의 선분이 서로를 향해 점점 길어지고 있어요! 이럴 수가!! 점점 길어져서 이제 하나의 선분이 되었어요!!!

라마찬드란 박사의 '조쉬 실험'

이처럼 우리의 눈은 때때로 없는 것을 볼 수도 있다. 라마찬드란 박사는 이것을 '채워 넣기'라고 명명했다. 우리의 뇌가 상황에 맞게 없는 것을 채워 넣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채워 넣기의 결정적 증거가 바로 맹점이다. 맹점이란 눈의 망막 안쪽의 작은 홈으로 신경세포가 한 데 모여 빠져나가는 곳이다. 이곳에는 시세포가 없어서 상이 맺히지 않는다. 그렇다면 조쉬의 예에서처럼 우리 눈에서도 검은 맹점이 있어야 할 텐데 왜 없는 걸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우리 눈이 두 개이기 때문이다. 서로의 맹점을 다른 눈이 보완해 준다. 두 번째는 아까의 '채워 넣기'이다. 맹점 부분에 맺혀야 할 상을 뇌가 주변 이미지를 토대로 채워 넣는 것이다. 라마찬드란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언제나 환각을 갖고 있다. 우리가 지각이라고 부르는 것은 현재의 감각 입력에 어떤 환각이 가장 잘 부합하는지 결정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뇌과학에서 뇌가 한정된 용량으로 수많은 데이터를 처리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 ‘효율’이다. 실제로 뇌는 눈을 비롯한 감각기관들로부터 정보를 받기 전에도 나름의 실재를 산출한다. 그 실재를 일컬어 '내부 모형internal model'이라고 한다. 정보가 입력되면 입력될 때마다 그 정보를 해석하기보다 기존에 있던 내부 모형과 비교하면서 그 모형을 갱신하고 다듬고 수정한다. 외부 세계에 대한 우리의 내부 모형은 우리가 환경을 신속하게 파악할 수 있게 해 준다. 


선사시대에는 하루하루가 위험의 연속이었다. 주변에는 포식자가 득실 되었고 배고프다고 아무거나 따먹었다가 독버섯이라도 먹은 날에는 영원히 잠들어야 했다. 그래서 어떤 사물을 있는 그대로 계속 관찰하는 것보다 눈앞에 보이는 저것이 위험한 것인지 아닌지의 빠른 판단이 필요했다. 길바닥에 놓은 가늘고 긴 물체가 있다면 저게 뭔지 판단이 될 때까지 계속 관찰하는 것보다 뱀이라 빨리 판단하고 (실제는 나뭇가지라 할지라도) 그 자리를 피하는 게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는데 더 유리했을 것이다. 뇌 안의 있는 내부모형으로 비교해 빠른 판단을 했던 선조들의 후손이다 보니 착시일지언정 빠른 판단을 내리는 시스템이 자연선택에 더 유리했던 것이다. 


뇌과학이 발달하면서 뇌가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외부 실재에 대한 의심은 커져만 갔다. 그래서인지 플라톤은 현실은 동굴에 비친 그림자 일뿐 실재는 이데아에 있다고 주장했다. 장자는 이 세계는 나비가 꾸는 꿈일 수도 있다고 했다. 칸트는 내 앞의 사물은 나의 인식 과정을 통한 심상일뿐 외부의 세계, 물자체를 알 수 없다고 했다. 데카르트는 우리가 보는 세상은 사악한 악마가 인간의 오감을 장악하여 만든 허상일 수도 있다는 사고 실험을 고안했다. 그 사고 실험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방법적 회의론이 힐러리 퍼트넘이 제시한 ‘통속의 뇌’라는 사고 실험이다. 우리는 그저 통속의 뇌가 보내는 전기신호를 현실로 믿는 것은 아닐까? 바로 영화 ‘매트릭스’처럼 말이다. 


외부의 물자체는 에너지와 물질로만 구성되어 있고 우리의 뇌는 그것을 있는 대로 보여주지 않으며 해석된 영상만 보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뇌가 정보를 좀 더 잘 해석하고 외부의 물자체를 더 왜곡하거나 착각하지 않아야 우리는 그나마 이 세계를 덜(?) 오해할 수 있다. 우리의 뇌를 건강하게 잘 관리해서 하는 이유인 것이다. 성능 좋은 망원경이 더 멀리 보며 고장 나지 않은 현미경이 더 자세히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성능 좋은 뇌를 가질 수 있을까? 그건 다음 세 가지 방법을 꾸준히 단련하면 우리의 뇌를 건강하게 잘 가꿀 수 있다고 많은 전문가들이 조언하고 있다. 바로 운동, 독서 그리고 명상이다.


운동이 뇌에게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세상의 모든 존재는 나름 이유가 있다. 뇌도 마찬가지다. 뇌는 몸을 '움직이기' 위해 생겨난 것이다. 그것도 ‘아주 잘 움직이기’ 위해서다. 듀크 대학의 진화인류학 교수 허먼 폰처Herman Pontzer는 '인간은 운동하도록 진화했다.'라고 말한다. 그 적절한 예로 우렁쉥이(멍게)가 있다. 멍게는 유충 시절에는 헤엄치면서(움직이면서) 산다. 그러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으면 기이한 행동을 한다. 바로 자신의 뇌를 먹어 치우는 것이다. 더 이상 움직일 필요가 없으니 뇌가 필요 없어진 것이다.  


운동을 하면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효과가 있다. 기억력을 강화하고 학습 능력을 향상한다. 노화를 늦추고 치매를 예방하고 스트레스와 우울증을 날려 버린다. 신체활동은 무엇보다 뇌세포 생산을 촉진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기억과 관련된 '해마'의 뇌세포 생산이 활발해진다고 한다. 신경세포들이 서로 손을 잡은 네트워크의 생성이 다름 아닌 '학습'이고, 이러한 네트워크가 지속되는 게 바로 '기억'이다. 학습이 머릿속에 생긴 새로운 길이라면 기억은 자주 다닌 길에 한다. 운동은 바로 이러한 뇌세포 사이의 연결을 강화시켜 손을 더 꽉 마주 잡게 한다. 열심히 길을 달리면 우리의 뇌에도 길이 닦인다는 이야기다. 활발한 신체활동은 계속해서 새로운 뇌세포를 만들어 뇌의 노화를 극적으로 둔화시킬 수 있다. 일주일에 5일 매회 30분 이상 걸으면 치매 발생률이 40% 감소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운동을 하면 도파민, 세로토닌, 엔도르핀 등 소위 행복 호르몬이 마구 분비된다. 그리스 의학자 히포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기분이 좋지 않으면 산책을 가라. 그래도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으면 다시 산책을 가라.”


두 번째로 뇌에게 중요한 것은 독서이다. 책을 펴고 문자를 보는 순간 뇌에서 시각을 담당하고 있는 후두엽이 활성화된다. 문자는 다양한 조합으로 여러 가지 뜻을 나타내므로 언어와 관련된 영역인 베르니케와 브로카 영역이 활성화된다. 그리고 글과 그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 기존에 내 배경지식, 즉 곳곳에 저장된 기억과 그에 관련된 뇌 영역이 활성화되고, 그런 감각 정보들을 통합하기 위해 전전두엽과 시상이 활성화된다. 이처럼 뇌과학에서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글을 읽고 이해하는 과정이 아니라 뇌의 많은 영역들을 동시에 활성화시키는 뇌의 운동이라 표현할 수 있다. 즉, 근력 운동이 몸의 근육들을 자극하듯이 독서는 뇌의 여러 영역을 자극하는 활동인 것이다.


초보 독서가의 경우에는 언어 이해의 필수적인 베르니케, 브로카 영역 위주로 활성화되지만 숙련된 독서의 단계에 이르게 되면 뇌의 자동화의 영역과 운동의 영역까지 활성화된다. 결국, 독서로 인해 뇌가 훈련된 사람들은 초보 독서가보다 더 많은 뇌 영역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 결과 정보처리속도와 학습 능력이 더 향상된다. 결국 이 말은 독서는 단순히 지식만을 쌓는 행동이 아니라 정보처리와 학습능력 즉 쉽게 변하지 않고 타고난 재능이라 불리는 유동성 지능까지 향상된다. 이 것이 영상이나 다른 매체로 얻는 지식과 독서의 가장 큰 차이라 볼 수 있다. 쉽게 말해 독서는 지능 자체를 높여준다.


언어가 있음으로 현재 눈앞에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이야기할 수 있게 되고, 언어가 있음으로 만약에, 혹시 같은 가정을 할 수 있다. 그러고, 이런 가정들은 가설을 만들 수 있는 연역적인 추론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언어를 통한 추론은 우리 문명과 인간의 사고를 확장시켜 주었다. 그리고 책이란 언어를 문자 화하여 종이에 집약한 것인데 문자는 언어 사용을 더 극대화하기 위한 하나의 발명품이며 책은 문자를 집약한 발명품이다. 그래서 책을 읽는다는 것은 우리의 사고를 무한대로 확장시켜준다.


세 번째 방법으로는 ‘명상’이 있다. 명상은 호흡을 통해 자신의 마음에 집중하는 것이다. 정상적인 뇌 교감신경 활성도는 60%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현대인의 뇌 교감신경 활성도는 80% 정도이다. 이렇게 교감신경이 과잉 흥분상태일 때를 우리는 '스트레스'라고 부른다. 흥분된 교감신경을 달래는 방법은 '호흡'뿐이다. 명상이 흥분된 교감신경을 달랠 수 있는 것이다.


미국 뇌신경학회 ‘NEW ENGLAND FRONTIER SCIENCE GROUP’은 달라이 라마 등 티베트 고승을 대상으로 뇌파 측정 등 검사를 해보았더니 보통 사람들에게는 볼 수 없는 뇌파가 발견되는 등 명상에 대한 뛰어난 효과를 검증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명상은 동양의 신비가 아니라 증명된 과학’이라고 명상을 인정하였다.

뇌는 평상시엔 주로 베타파를 방출하고, 수면 직전처럼 심신이 안정된 상태에선 알파파를, 잠이 들었을 땐 잠재의식을 활성화하는 세타파를, 그리고 깊은 잠에 빠졌을 땐 델타파를 방출한다. 스님들이 명상을 할 때 뇌파를 측정하면 베타파 방출이 줄어들고 몸을 이완시켜주는 알파파가 크게 증가한다. 명상이 깊어지고 세타파나 알파파가 증가되게 되면 심신의 긴장이 풀리고 상당히 이완된다.


신경세포의 접합 부분인 시냅스 소포 속엔 약 50여 종의 신경전달물질이 들어있다. 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노르아드레날린과 흥분 전달 역할을 하는 도파민이 분비된다. 하지만 명상을 하면 전전두엽의 왼쪽이 활성화되면서 긍정적인 상태로 유도하는 베타 엔트로핀과 행복한 감정을 전달하는 세레토닌이 분비된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이드레날린같은 스트레스성 신경전달 물질이 분비되고 부신에서도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티졸이 분비된다. 코티졸이 체내에 단백질과 만나면 혈당을 높이고 혈압도 증가시킨다. 혈류의 움직임이 빨라지면서 심장 박동도 빨라지고 심한 경우 뇌신경까지 손상된다. 반면 명상을 하면 부교감신경이 활성화되고 코티졸 분비가 줄어들면서 혈관이 넓어지고 뇌신경도 안정된다. 명상이 스트레스를 감소시킨 것이다. 


미국 위스콘신 대학에선 명상을 하는 사람과 명상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 독감 백신을 접종해 항체 변화를 알아보는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그 결과 명상을 하는 사람이 대조군에 비해 더 많은 항체를 보유했다. 명상을 하면 집중력이 높아지는 이유는 뇌의 특정 부분 활성화와 관련이 있다. 뇌 무게의 80%를 차지하는 대뇌는 인체의 모든 정보를 종합하여 판단하고 인식하는 기능을 한다. 대뇌는 호두껍질처럼 주름진 피질로 둘러 쌓여있는데 대뇌 피질 안쪽에는 변연계가 자리 잡고 있다. 변연계는 감정과 기억, 심박과 호흡, 신진대사 등을 관장하는 기관이다. 이 변연계는 크게 해마와 편도체로 구성되어 있다. 뇌신경세포가 모이는 곳인 해마는 언어적 기억, 의식적 기억, 쾌감을 관장하고 편도체는 무의식적 기억으로 공포나 분노를 담당한다. 명상을 하면 변연계에서의 혈액 흐름이 활성화되고 결국 해마와 편도체의 활동을 발달시켜 정서, 인지능력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게 되는 것이다.


나의 뇌를 잘 관리해야 한다. 왜냐하면 내 마음대로가 아닌 ‘뇌 마음대로’ 보기 때문이다. 즉 뇌는 신경세포의 활성으로 세상을 인지하므로, 실제 외부 세상보다는 뇌가 이를 어떻게 인지하느냐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외부 세계는 투영된 이미지이다. 당신이 그곳에 투영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곳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라 당신 머릿속에서 일어난다. 사실 그것은 일종의 꿈이다. 잠들었을 때 꾸는 꿈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보고, 인식하고, 능동적으로 꿈을 꾸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이 거대한 우주를 수용해 아주 작은 머릿속에 집어넣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로돌포 이나스>


우리는 뇌가 그리는 세상 안에서 산다. 그곳이 천국이 될지 지옥이 될지는 우리의 뇌가 결정할 수 있다. 건강하고 똑똑한 뇌를 만들어 이 세상을 멋지게 그리며 그 안에서 행복한 꿈을 꾸어 보도록 하자. 행복한 뇌들이 모여 꿈꾸는 곳이 바로 ‘유토피아’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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