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자신의 저서 <이기적 유전자>를 통해 인간은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프로그램된 로봇 운반자라고 주장했다. 진화의 선택의 기본 단위는 종도, 개체도 아닌 바로 유전자라는 것이다. 유전자는 단지 단백질을 제조하는 매뉴얼일 뿐인데 말이다. 유전자는 진화를 거듭하면서 홀로 복제하는 것을 포기하고 커다란 군체 안에 안전하게 들어서게 된다. 개체가 커지고 복잡하게 되면서 유전자에 있는 매뉴얼만으로는 그 개체가 치열해지는 환경에서 생존하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신경과학자 이대열 교수는 인간 사회에서 복잡한 법률문제는 변호사에게 대리권을 위임하듯이 진화의 어느 시점에서 유전자가 모든 권리를 뇌에게 권리를 양도했다고 한다. 이것이 뇌의 탄생인 것이다. 뇌는 유전자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대신 해결하기 위해서 등장한 일종의 대리인이다.
유전자로부터 생존에 대한 모든 위임권을 부여받은 뇌는 학습이라는 도구를 통하여 생존을 도모하게 된다. 학습이란 누적된 경험의 결과로 행동이 수정되고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행동을 말한다. 그리고, 학습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지능이라 한다. 따라서 지능은 생명체가 자신의 생존과 번식을 위해 나날이 변화하는 환경에서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인 것이다.
‘뇌’라는 대리인은 유전자가 미리 예상하지 못했던 환경 속에서 유전자를 무사히 복제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학습을 개발하게 된다. 동물이 뇌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유전자가 동물의 행동을 실시간으로 관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구의 과학자가 화성에 있는 큐리오시티를 실시간으로 제어할 수 없기 때문에, 탐사 로봇에 인공지능을 장착하여 스스로 학습하고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만든 것과 마찬가지다. 과학자가 큐리오시티에게 일종의 대리권을 위임한 것이다.
한 개체가 무사히 생존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 에너지는 어디서 얻어야 할지, 포식자를 어떻게 피해야 하며, (유성 생식을 한 이후로부터는) 짝을 어떻게 만나야 할지 등 산적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오징어 게임처럼 말이다.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면 그만큼 생존이 연장되었다.
초기 로봇 개발 단계에서는 모든 상황에 맞춰 프로그래밍을 했다고 한다. 이럴 때는 이렇게 해라, 저럴 때는 저렇게 해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아무리 수 만 가지를 프로그래밍을 해도 제대로 걷는 것조차 매우 어려웠다고 한다. 2015년 DARPA(미국국방고등연국계획국)에서 로보틱스 챌린지를 개최했었다. 그 당시 참가했던 대부분의 로봇들도 마찬가지였다. 혼자 걸어가다 넘어지고, 혼자 문 열다가 넘어지는 등 인공 지능의 발달은 매우 더디어 보였다. 특히 문 열고 계단 올라가는 것이 최대 난제였다고 한다. 카이스트 뇌과학자 김대식 교수는 “만약에 지금(2015년도) 터미네이터가 우리를 잡으러 오면 그냥 문 닫고 2층으로 올라가면 된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다 획기적인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구글이 보스턴 다이내믹스사를 인수하고 아틀라스라는 로봇을 개발하게 된다. 제어시스템을 기존의 규칙 기반이 아닌 학습 기반으로 바꾼 뒤 엄청난 변화가 생기게 된다. 로봇이 넘어져도 혼자서 일어서고 더구나 문도 열고 2층으로 올라갈 수도 있게 된 것이다. 이제는 공중제비돌기도 하고 구불구불하고 험한 산에서 조깅도 할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하였다.
동물도 이와 같이 시스템의 운영의 주체가 유전자에서 뇌로 바뀌면서 아틀라스 로봇과 같은 획기적인 변화를 맞이했다. 약 5억 5천만 년 전 바다에는 현재의 창고기와 비슷한 물고기가 살고 있었다. 아무런 감각 기관도 없이 바다 밑에서 입만 벌리고 있다가 먹이가 들어오면 그저 삼키는 일만 했다. 그러다 약 5억 4천만 년 캄브리아기에 접어들어서 특이한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감각기관이 발달한 개체들이 등장하더니 다른 생물들을 감지하고 능동적으로 움직여 ‘사냥’을 하게 된 것이다. 사냥이 시작되자 지구는 이제 위험한 곳이 되었다. 그야말로 먹고 먹히는 삶이 시작된 것이다. 먹기 위해서, 또 먹히지 않기 위해서 각 개체들은 조금이라도 더 발달한 감각기관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로서 포식자와 피식자의 군비 경쟁이 시작된 것이었다.
최초의 생명 루카가 출현한 후 수 십 억년의 진화의 시간을 거쳐 인간이 등장하게 된다. 인간이 진화의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은 이유는 탁월한 지능 덕분이다. 사자와 같은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도 없고, 매머드 같은 커다란 피지컬을 보유하지는 않았지만, 협력하고 도구를 사용하고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지능을 갖춘 덕에 현재에 와서는 경쟁 상대가 없는 최상위 포식자가 되었다.
생명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캄브리아기 시대에 피식자와 포식자가 섞여 있던 시절에는 뇌가 갖춰야 할 덕목 중 하나는 빠른 판단이었을 것이다. 저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이 포식자인지 피식자인지 빠르게 구별해야 했다. 포식자라면 재빨리 도망가야 했고 피식자라면 얼른 잡아먹어 에너지를 보충해야 했다. 이젠 예전보다 움직임이 더 빠르고 복잡 해져야 했고 뇌는 점점 더 복잡함을 잘 조정해야 했다. 뇌의 초창기 시절에는 아마 수많은 뇌 버전들이 있었을 것이다. 아마 그중에서 가장 빠르고 정확한 판단을 하는 뇌를 가진 생명들이 살아남았을 것이다. (포식자가 되었든 피식자가 되었든 간에) 그렇게 발달된 본능이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싸움-도피 반응 fight or flight이다. 어떤 상황이 발생했을 때 싸울지 도망갈지를 찰나의 순간에 결정하는 것이다. 포식자와 피식자가 애매하게 뒤얽힌 복잡한 상황에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는 이런 이분법적 판단이 가장 효율적이었을 것이다.
학습을 하기 위해서는 기억이 필요했다. 어제 포식자에게 잡아 먹힐 뻔한 사건이 있었다면 그 상황을 잘 기억해야 했었다. 포식자가 어떻게 생겼지, 어디에서 만났었는지, 그때 어떤 방법을 통해서 도망을 쳤었는지 말이다. 과거에 있었던 사건의 내용을 기억하고 서로 다른 사건들 간의 내용을 비교할 수 있는 것이야 말로 지능의 가장 기본적인 요구 조건이다. 기억을 잘하지 못한 개체들은 어제의 그 위험한 상황이 반복되었을 것이고 포식자의 든든한 저녁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이렇듯 원시 시대에는 빠르고 정확한 판단이 필요했고 그 빠른 판단을 위해 지난 기억들에 대해 어떤 목차를 붙여 주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의 뇌는 지난날의 목차를 빨리 스캔해서 그에 맞는 신호를 보냈다. 그 신호를 ‘감정’이라 부른다. 대표적인 감정이 행복과 두려움이다. 우리의 뇌는 행복과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이용하여 우리 몸에게 신호를 보낸다. 행복은 직진, 불안은 멈춤, 두려움은 좌회전 이런 식으로. 그렇게 진화의 미로에서 길을 잃지 않고 지금까지 적자생존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들의 조상 원시인들은 무척 감정적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감정에 충실한 자가 생존에 유리했을 것이고 자손도 보다 많이 낳았을 것이다. 감정이라는 도구가 생겼다는 것은 그 기원을 만드는 매뉴얼 즉 유전자 풀에 감정에 관한 유전자가 생겼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개체들의 자손들이다 보니 자동적으로 감정적이 되었을 것이다.
뇌가 탄생한 시점부터 지금까지 진화의 길을 걸어오면서 그동안 축적된 기억과 경험은 매뉴얼화되어 우리에게 물려주었다. 우리는 그것을 ‘본능’이라 부른다. 그 본능 덕분에 치열한 경쟁에서 빠른 판단을 하고 투쟁, 도피를 선택적으로 반복하면서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았다.
하지만 산업 혁명 이후 환경이 급격히 변화하면서 그 매뉴얼들이 일상생활에 맞지 않는 경우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원시 시대에는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우선 먹어 두는 것이 생존에 유리했다. 하지만 현대 시대에서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닥치는 대로 먹어 대면 비만, 당뇨, 심장병 등 성인병으로 단명할 확률이 매우 높아지고 생존에 매우 불리하게 된다. 사회생활할 때 나도 모르게 내 편, 남의 편으로 나누는 경향이 있다.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적’으로 간주하여 경계한다. 내가 나도 모르게 낯선 사람을 경계하고 비난한다면 나의 본능이 나의 행동에 관여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진화의 시계는 매우 느리게 지나간다. 우리의 뇌는 아직 석기시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원시 시대에 길을 가다가 사자를 만났을 때 비판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는 매우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그래서 빨리 감정을 활용하여 ‘두려움’이라는 과거의 기억과 학습의 카드를 꺼내어 그 상황을 타개해야 한다. 싸울지 도망갈지를 말이다. (웬만하면 도망가는 게 좋았을 것이다.) 원시 시대에 사자를 만나는 일 등 스트레스는 흔히 발생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싸움-도피 반응은 매우 유용했다. 하지만 스트레스가 일상인 현대에서는 잦은 싸움-도피 반응은 우리를 매우 힘들게 한다. 그래서 만성 스트레스가 발생한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우리 몸은 코르티솔을 분비한다. 코르티솔의 기능은 단백질을 분해해 포도당을 빠르게 연료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근육은 포도당을 태우고 재빨리 에너지를 만들어서 싸우거나 도망을 치는 것이다. 코르티솔이 분비되면 당장 필요하지 않은 면역, 생식, 소화 활동은 억제된다. 사자를 만난 위급한 순간에 갑자기 성적으로 흥분하거나 배가 고파지면 참으로 곤란해질 것이다. 문제는 생존 본능이 뇌를 지나치게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만성적인 스트레스에 노출되다 보면 코르티솔 수치가 계속 높아진 상태로 유지되고 치명적인 결과가 생길 수 있다. 앞서 얘기했듯이 코르티솔은 싸울 준비를 하는 대신 면역, 생식, 소화 활동은 억제된다고 했다. 그래서 코르티솔 수치가 높은 수치로 계속 유지되면 면역 시스템이 억제되어 각종 질병에 걸리기 쉽고 생식 활동에도 억제되니 생존에 불리하게 된다. 우리의 생존에 유리하도록 설계된 본능이 우리의 삶에 방해가 되는 것이다. 비유를 들자면 지구인들이 오지도 않는 외계인에 침공에 맞서 모든 자원과 재화를 전쟁 준비만 하는 셈인 것이다.
생존 본능이 의사 결정을 내리도록 내버려 두면 사회생활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직장 상사가 보고서를 빨리 달라고 재촉했을 때 우리 몸은 이 상황을 스트레스로 판단하고 코르티솔을 분비하여 투쟁할지 도주할지를 결정하라고 촉구한다. 이때 투쟁의 반응이 지나쳐서 상사에게 불같이 화를 내고 퇴사해 버리겠다고 협박하면 생계를 이어갈 수 없을 수도 있다. 반대로 도주의 반응이 지나쳐서 그냥 그 자리를 떠나버린다면 그 회사를 정말로 떠나야 할 수도 있다. 아니면 스트레스를 해소한다고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서른 한 가지 종류를 다 먹어버린다면 비만 및 성인병을 얻을 수 있고 이는 심각한 건강상 문제로 발생될 수 있다.
회사 내에서 부서 별 갈등이 심하다면 원시 시절 우리 부족과 외부 부족을 나누어 경계하던 본능의 스위치가 켜진 것이다. 본능은 타인을 친근감과 호감도에 따라 적과 나로 구분한다. 이러한 구분은 과거에는 부족 바깥의 진짜 적을 파악하는 데 매우 유용했다. 낯선 사람, 특히 외모가 다른 사람을 만나면 우리 몸에서는 전면적인 스트레스 반응이 일어나면서 경계의 자세를 취한다. 괜히 위험에 처하는 것보다 조심하고 안전한 편이 나으므로 우리 몸은 스트레스 호르몬을 분비해 만반의 준비를 하게 한다. ‘이 낯선 이방인은 내 식량이나 성적 파트너를 빼앗으러 온 것일지도 몰라.' 하지만 예전과 달리 타인과의 경계가 불분명한 현대에서 이런 구분 짓는 본능은 동료 간, 부서 간에 불필요한 갈등을 조장한다.
사회생활에서 예를 하나 더 들자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할 상황이 생기면 긴장을 하게 되고,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도 든다. 옛날 원시 시대에 많은 사람 앞에 선다는 것은 좋지 않은 상황일 경우가 더 많았다. 내 앞에 갑자기 사람이 많아지는 건 타부족의 침략일 확률이 많기 때문이다.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이 침략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 몸은 스트레스 반응을 일으킨다. 이는 모두 직장에서 생존 본능의 스위치가 켜진 경우다. 이처럼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이 아닌 데도 생존 본능은 투쟁-도피 반응을 일으킨다.
약 6백 만년 전 기후가 건조해지면서 인간은 나무에서 내려와 초원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초원에서의 삶은 포식자가 우굴대는 위험한 삶이었고 인간에게는 생사의 갈림길에 선 중요한 도전이었다. 그 당시에는 아직 미래라는 개념이 명확하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래를 고민하기보다는 현재 순간마다 내리는 결정이 중요했다. 순간마다 내리는 선택은 생존에 즉시 영향을 미쳤다. 앞날을 예측하기가 불가능한 환경에서 즉시적 보상 결정이 더 적절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현대인보다 선택하기가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과거 조상들이 결정을 내리기 쉬었던 이유는 선택지가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하루에 약 3만 가지 이상의 결정을 내린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날 때 바로 일어날지, 10분만 더 자고 일어날지 고민한다. 일어나면 샤워를 지금 해야 할지 저녁에 할지를 결정해야 하고, 아침 식사는 밥을 먹을지 시리얼을 먹을지 결정해야 한다. 평소보다 약간 늦게 출근을 시작했다면 평소처럼 지하철을 이용할지 다소 비용이 들더라도 택시를 탈지도 정해야 한다. 직장 생활도 수많은 선택의 연속이다. 수많은 선택을 지나 점심시간이 되면 그 어렵다는 점심 메뉴를 또 골라야 하는 선택을 해야 한다.
인간에게는 정보를 수집하려는 본능도 있다. 이는 마약의 중독성만큼 정보를 갈망한다고 한다. 2019년 UC버클리대학교 하스 경영대학원의 연구에 따르면, 새로운 정보를 얻으면 코카인을 흡입할 때와 동일한 신경 경로가 활성화된다고 한다. 우리 선조들이 살던 시대에는 정보를 얻는 것이 중요했다. 어디에서 먹을 것을 찾을 수 있는지, 옆 동굴에 사는 루시에게 관심이 있는데 어떻게 해야 관심을 얻을 수 있을지와 같은 정보를 수집해 더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었고, 그에 따른 보상으로 생존과 번식의 가능성을 높일 수 있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너무 많은 정보가 넘쳐나는 탓에, 우리는 점점 정보에 압도되고, 우리 몸은 스트레스의 경보음이 쉬지 않고 울리고 있다. 게다가 생존 본능까지 가동하면, 우리는 모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재빠른 해결책을 제시하라는 스트레스의 압력을 받게 된다. 우리는 부정확한 데이터라도 탐욕스럽게 수집하여, 알지 못한다는 두려움을 없애려 한다. 우리는 전례 없는 정보의 바닷속에서 수많은 정보를 수집하지만, 돛을 세우고 항해하기보다는 파도에 빠져 그저 허우적 대기만 할 뿐이다.
산업혁명 이후 환경이 급속히 변화하면서 우리의 느린 뇌는 적응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저명한 영국 동물행동학자 데즈먼드 모리스는 <인간 동물원>이라는 본인의 저서를 통해 ‘인간은 결코 인간이 만든 도시에 적응하지 못했다’라고 진단했다. 그는 인간을 동물로 간주하고 도시의 인간을 ‘우리에 갇힌 동물’과 비교하며 도시 문명을 관찰했다. 그의 진단은 야생에서는 정상의 행동을 하는 동물이 우리에 갇히는 순간 비정상의 일탈로 나아가는 것처럼 인간은 인구 과밀의 도시에서 갖가지 일탈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연의 야생동물은 자해하지도 않고, 자식을 공격하지도 않고, 비만에 걸리지도 않고 자위행위도 하지 않지만, 좁은 우리에 갇힌 동물들 에게서는 이런 비정상 행동들이 관찰된다. 모리스가 바라보는 도시는 ‘거대한 인간 동물원’인 셈인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뇌가 아직 현대 문명에 적응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일들이다. 그렇다고 문명을 해체하여 야생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뇌가 현대 문명에 적응하려면 아마 적어도 수 만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인류의 문명이 수 만년이나 지속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수 만년을 기다릴 수 없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본능은 감정으로 구현된다. 감정의 호르몬이 폭풍처럼 몰아치면서 빠른 시간 안에 싸움 또는 도피의 행위를 하게끔 한다. 필자의 졸필 ‘감정이라는 안테나’ 편에서도 언급했지만 감정의 폭풍우가 닥칠 때는 잠시 멈추는 것이 좋다. 폭풍우가 잠잠해질 때까지 잠시 멈추는 것이다. 계속 허우적대면 더 깊이 빠질 뿐이다. 몸에 힘을 빼면 오히려 물에 뜬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한다.
잠시 멈추는 방법으로는 ‘명상’을 추천한다. 코로나19 이후 우울증, 홧병 등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늘면서 다시 명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명상은 야생마처럼 날뛰는 본능을 잠재울 수 있는 효능이 있다. 명상의 종류도 많다. 집중명상, 통찰명상, 초월명상, 호흡명상, 걷기명상, 위빠사나 등등이 있다. 명상의 종류는 무척 다양하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저 잠시 멈추는 것이다.
생존 본능은 성급하게 이분법적인 판단을 하기 쉽다. 우리는 매일 정말 생사의 갈림길이 달린 결정을 내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 뇌는 현실에서 실제 위협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공포영화를 볼 때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도 역시 마찬가지로 뇌가 현실과 영화를 잘 구분하지 못해서이다.
부장님이 나의 업무에 지적을 할 때 잠시 숨을 고르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이건(?) 나를 잡아먹는 사자가 아니다. 그저 뇌가 스트레스 반응을 일으키는 신호일뿐이다.’ 굳이 부장님과 싸울 필요도 없고 도주할 필요도 없다. “아~네, 다시 보고서를 수정하여 제출하겠습니다.” 그저 그 상황에 맞게 대처하면 된다.
“이 지구에서 우리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기적인 자기 복제자들의 폭정에 반항할 수 있다.” <이기적 유전자/ 리처드 도킨스>
감정의 회오리가 나의 본능을 깨울 때 잠시 멈추어서 심호흡을 하고 뇌가 보내는 신호를 해석하면 된다. 감정이란 동물들의 올바른 결정을 돕기 위해 진화의 시간 속에서 누적되어 선택된 알고리즘이다. 감정의 폭풍우 속에서는 길을 제대로 찾기가 어렵다. 괜히 허우적대다 이상한 길로 잘못 빠질 수 있다. 여러 명상법에서 강조하는 점은 감정이 치밀어 오를 때 잠시 멈추고 감정을 직시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감정은 실체가 없는 그저 신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신호를 판단하고 파란 신호등은 행복, 빨간 신호등은 불안으로 해석하고 인생의 갈림길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면 된다. 그러면 감정은 우리 인생에 아주 유용한 내비게이션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