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如
창을 뚫고 들어오는
화사한 아침 햇살의 속삭임
만족과 기쁨, 희망과 사랑으로 부푼
나는 누구인가
창가에 서성이는
무거운 잿빛 하루의 무게
갈등과 슬픔, 절망과 증오에 헤매는
나는 누구인가
아름다운 선율을 타고
사뿐사뿐 춤을 추는 관계들
마음의 밭에 자부심과 환희, 관대함과 너그러움이 뿌리 깊은
나는 누구인가
끓는 태양의 대지 위에
투쟁으로 몸부림치는 갈등들
관념의 벌판에 자존심과 좌절, 옹졸함과 아집이 두텁게 경계 지은 나는 누구인가
그렇게 멍든 나는
황야에 펼쳐진 무상(無常)의 무대 위에서
열연하는 배우인가, 그를 바라보는 관객인가
아니면
그 모두를 연출하는 감독인가
진정한 나는
나인가, 나의 주인인가
나는 누구인가
* 감각과 감각에서 비롯된 감정, 관념, 사유는 모두 육체의 작용이 만들어 낸 결과다. 양자물리학자 김상욱 교수는 그의 저서 『떨림과 울림』에서 '인간의 사유조차도 몸에서 일어난 결과'라고 기술하고 있다. 실제 뇌과학에서는 사유의 작용도 전기 신호의 흐름(소듐과 칼륨 이온이 시냅스를 경유하여 뉴런과 뉴런를 넘나드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감각에서 비롯된 사물의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육신도 사물의 세계에 존재하는 미진한 구성 요소 중 하나로 끊임없는 변화에 동참하고 있다. 이것은 육신의 일부인 뇌와, 뇌의 작용인 감각과 감정, 관념, 사유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는 흔히 육신의 작용으로 양산되는 감각과 감정, 관념, 사유를 '나'라 규정하곤 한다. 그러나 이것들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이것들은 실재한다고 할 수 없다. 사실상 모두 허상이고 가짜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것에 매여 산다.
플라톤은 육체를 영혼의 감옥이라 하였다. 훈련을 통해 영혼의 눈이 육체의 감옥을 벗어나 사물의 세계(현상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면, 육체적 자아의 변화를 알 수 있고 나아가 조화롭게 작동하는 이데아 세계도 알아챌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을 인식할 수 있는 주체를 필자는 '진정한 나', '주인된 나', '영혼의 자아'라 말하고 싶다. 주인된 나인 영혼의 자아가 육체로 하여금 조화롭게 움직이는 선(善)의 이데아에 동참하도록 하는 것이 인간이 꿈꾸는 참 삶이고 최종 목표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 '현재'를 규정해 보라고 하면, '지금 마주하는 시점으로 찰나의 순간이며 시간 축을 따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속성을 띄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나'라고 규정하는 것은 끊임없이 흐르는 찰나의 현재를 스쳐 지나는 육체(뇌) 작용의 결과이다. 따라서 감각에서 출발하는 나의 반응은 이미 지나가 버리고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 대한 그것에 불과하다. 미래에 대한 망상과 사유도 이미 과거가 돼 버린 감정과 관념이 나를 과거에 붙들어 매는 작용이라 할 수 있다. 이것들을 인식하지 못하게 되면, 존재하지 않는 '과거'에 붙들려 감정과 관념의 파도가 일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파도는 내 삶에 대립과 충돌, 다가오지 않은 걱정을 몰고 올 것이다.
* 상常은 '항상 그러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상無常은 그와 반대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을 뜻한다. 현대에 '없다.'라는 뜻으로 알려져 있는 무無자는 고대 한자에서는 불不이나 비非의 의미로 쓰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