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를 받고싶어 하는 오래된 나의 마음에게
가족과 다 함께 저녁을 먹던 그날, 그날따라 유독 가족들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고개를 내려 숙인 채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내게 무슨 일 있느냐고 어머니가 물으셨다. 아무 일 없다며 힘없게 이야기하고 그대로 방으로 들어왔다.
잠시 후 어머니가 뒤 따라 들어와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을 부탁했다. 이제는 더 피할 길도 없어 털어놓아야겠다 생각되어 설명하려 했지만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도무지 머릿속에선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최대한 나의 감정을 그대로 전하려 애썼고 끝내 부모님과의 관계 때문에 내가 너무 지치고 힘들다고 전했다. 내 감정은 없고 부모님의 감정만 살피느라 하루하루를 보내왔으며 집안에서도 나는 가족들의 감정은 어떠한가 눈치를 보며 지낸다고 하소연하듯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리고 어머니의 반응을 보려 고개를 들었을 때 어머니의 눈시울이 붉어져있었다. 금방이라도 미안하다라며 사과를 할 것 같은 그 표정에선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대답이 먼저 나왔다.
"다음 생엔 좋은 부모 밑에서 태어나길 바랄게,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래도 내 아들로 살아가며 이겨내줄 수 없을까?" 어머니를 몰아가려던 건 아니었지만 이 상황은 누가 봐도 나의 감정이 갑이고 어머니의 감정이 을이었다. 적어도 방금 전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전세는 역전되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은 오묘했다.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의 틈 사이로 왠지 모를 분노와 화가 밀려오면서 이윽고 무력감이 찾아왔다. 여러 감정들이 뒤죽박죽 섞여버린 이 마음은 굉장히 불편하고 이해하기 힘든 그런 것이었다. 왜 방금까지 힘들다고 토로한 것은 나인데 내가 금방이라도 사과해야 할 것만 같은 분위기지? 그런데 왜 이 상황에서 나는 화가 나는 것일까?
어머니가 왜 그런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는지 나는 왜 화를 느낄 수밖에 없었는지 그제야 이해하게 된 건 상담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난 후였다.
어머니도 할머니에게 같은 태도를 받아오셨다. 명절 때 일이 너무 바빠 명절 연휴가 끝나고 찾아뵌다는 어머니의 연락에 할머니는 요즘 자신의 몸이 얼마나 안 좋은지 혼자 늙은 몸으로 집안일을 다 도맡아 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털어놓기 급급하셨다. 결국 어머니는 죄책감을 한가득 얻은 채 전화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 한평생 어머니도 할머니에게 받아온 감정이 그러했고 이 힘듦의 연속은 이제 내게도 대물림되고 있었다.
어머니 앞에서 저녁을 먹을 때면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인 채 늘 고개를 숙이고 밥을 뜨곤 했다. 나도 어머니만 보면 반자동적으로 나오는 나의 이러한 태도가 가끔 의아하긴 했지만 이렇게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를 약 반년 정도 반복해왔을 무렵 순간 깨달았다.
아, 나는 지금 불쌍해 보이려는 거구나. 이렇게 안쓰럽게 밥을 뜨는 내 모습을 보며 미안해하기를 바라는 거구나.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사람의 마음을 힘들게 하는 것인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처는 나를 불쌍하게 보여 미안한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구나를 깨달았다.
그렇게 할머니는 어머니에게 죄책감을 유발해왔고 어머니는 내게 죄책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 누구도 어떻게 하는 건지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자연스레 나 역시 부모님에게 똑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보세요. 당신들의 무관심으로 내가 얼마나 처량하고 불쌍한지"
그리고 그 말속의 이면엔 나의 이 힘듦을 알아주고 이해해달라는 간절한 마음이 담겨있었다. 그동안 어떻게 무엇이 힘들었는지 알아주고 참아왔던 인내에 대한 노고를 인정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 그동안 미안했다"라는 대답을 기어코 듣고 나면 마음이 좀 풀릴까? 아마 '한번 대답을 들었으니 계속 들어야 직성이 풀리겠어'하는 마음으로 계속해서 죄책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게 먹히는구나라는 것을 느꼈으니 성공률이 높아진 이 방법을 무를 일은 없다.
그러나 결국 내가 알아줘야 한다. 타인의 마음을 알아주고 공감하느라 바빴던 시선을 이제는 나에게 돌려주며 나의 힘듦도 보이고 느껴질 때까지 충분한 시간을 가져줘야 한다. 내 마음을 살피고 느껴주는 것이 어색하고 익숙하지 않겠지만 나 스스로와의 시간을 충분히 가지며 내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마음에서 외치는 말이 스스로에게 들릴 때 비로소 더 이상 쭈그려 숙여 앉아 밥 먹는 나의 허리를 세워주고 미안했고 고생했고 또 너무 고마웠어라며 정말 바라던 위로와 사과를 해줄 수 있다.
"상대방에게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게 능사는 아닐 거야. 지금까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 내가 너무 잘 알아 하지만 너 스스로를 불쌍하고 가엽게 여기지 마. 네가 마땅히 받아야 할 태도에 당당해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래. 너는 충분히 그럴 자격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