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결국 모든 관계의 고민은 같은 원인에서 시작된단다

by 탄고

4일에 걸친 긴 출장을 마치고 토요일 아침이 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세상에서 밥 먹고 바로 설거지하는 사람과 집에 와서 바로 씻는 사람이 가장 독한 사람이라고 했던가. 그런데 공교롭게도 나는 둘 다에 해당된다. 집안일이 아직 남아있으면 편히 쉬지 못하는 성격이며 방은 깨끗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편하게 쉬는 공간이라는 생각에 가급적 집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씻는 편이다.

집안일과 샤워를 마친 후 한 주간 고생한 나를 위해 낮잠이나 자볼까 하는 생각에 누워봤지만 불과 1시간 전까지 호텔에서 푹 자다 와서 그런지 좀처럼 잠에 들지 못하고 이대로 누워만 있다가 토요일이 다 흘러가는 건 아까워 다시 집을 나섰다. 마트를 들려 맥주 6캔 묶음과 감자칩을 사들고 이브의 집으로 향했다.


이브네 집으로 가는 길


이브의 집 앞에 도착했을 때 어디선가 잔뜩 화가 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변을 잠시 둘러보며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살펴보던 중 이 소리는 이브의 집에서 들리는 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세히 들어보니 이브의 딸 소피아의 목소리였다. 이브의 집 앞에서 몇 분간 가만히 서있으며 지금 이 타이밍에 내가 들어가도 되는 것일까 그러자니 이브의 집까지 걸어온 이 1시간이라는 시간이 너무 아까운데,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잠시 후 문을 벌컥 열며 소피아가 나왔다.


소피아: 웁스, 온 줄 몰랐네? 혹시 들렸니?


: 걱정하지 마세요. 방금 막 왔어요.


사실 방금 막 왔다는 말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지만 소피아의 화내는 목소리는 온통 불어여서 알아들을수도 없었다.


소피아: 괜히 별로 좋지 못한 모습만 보여줬구나. 이브랑 맥주라도 하려나보네? 그래 마침 잘됐다. 내가 방금 막 이브에게 엄청 화를 내고 나오는 길이거든. 같이 맥주라도 하며 네가 마음 좀 달래주면 좋겠구나.


분명 소피아가 이브의 딸일 텐데 방금 한 말은 마치 이브의 어머니라도 되는 것 같은 소리로 들려졌다. 화를 잔뜩 내긴 했지만 소피아도 이브 생각을 많이 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이브의 집에 들어가자 소파에 고개를 푹 숙인 채 앉아있는 이브를 발견했다.


: 이브 저 왔어요.


이브: 어~ 리틀 퍼커. 이번주는 출장이라고 하지 않았니?


: 맞아요. 방금 막 집에 왔다가 할 일도 없고 해서 놀러 왔어요. 그런데 제가 타이밍을 잘못 잡은 모양이네요. 소피아랑은 무슨 일로 그렇게 싸운 거예요?


이브: 잉? 리틀 퍼커 너는 지금 우리가 싸운 걸로 보이는 게냐? 일방적으로 내가 혼난 거다. 그것도 아주 호되게 말이야.


: 그것도 맞는 말이네요. 누가 자식이고 누가 부모인지 모를 정도였어요. 사실 소피아가 방금 나가기 전 저한테 이브의 마음 좀 잘 추슬러달라고 부탁하고 나갔거든요.


이브: 그래 소피아라면 충분히 그런 말을 하고도 남을게다.


: (이브에게 맥주 한 캔을 건네며) 소피아의 이브에 대한 마음이 어떠한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저를 보는 것 같네요. 저도 참 부모님 마음을 항상 신경 쓰고 그들의 마음이 힘들진 않는지 오늘 기분은 어떤지 많이 살피고 눈치를 보거든요.


이브: 너는 그러는 편이 마음이 편한 게냐?


: 그럴 리가 있나요. 눈치 보는 건데 마음이 편할 수가 없죠.


이브: 그래 그럴 테지. 그래서 사실 소피아가 내 눈치 보며 내 걱정을 해주는 것보다 차라리 저렇게 시원하게 화를 낼 때 내 마음이 편하단다.


: 어째서인가요?


이브: (맥주를 크게 한 모금 마시며) 리틀 퍼커 어쩌면 너는 공감을 할 만한 이야기겠구나. 내가 어릴 적 부모님의 마음을 살피고 챙기느라 내 마음을 많이 썼거든. 내 아버지는 젊을 적 승마 선수였다. 그가 어릴 적부터 꿈꿔왔던 직업이기도 하고 매일매일을 연습하며 주변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유망한 선수였단다. 한창 주가를 높이고 있을 무렵 내 어머니를 만났고 나를 낳았지.

그러다가 어느 날 크게 부상을 당했단다. 시간이 얼마나 지나든 간에 부상을 이기고 다시 복귀하려고 했지만 좀처럼 부상은 회복되지 못했고 결국 선수를 그만두어야 했다. 말과 함께한 인생인데 쉽게 다른 직업으로 갈 수 없었을 테지. 코치도 하고 일반인들에게 승마를 가르치는 일도 하며 생계를 이어갔지만 본인의 꿈을 이루지 못한 슬픔과 잔인한 현실에 대한 서러움의 탓을 내 어머니에게로 돌렸다. 매일같이 그녀에게 화를 냈고 어머니의 마음도 덩달아 같이 병들어 갔지. 이것을 지켜보는 어린 나로서도 참 힘든 일이었지만 거기에 더해 어머니도 힘들고 지친 마음을 나에게 많이 털어두었고 아버지도 유망한 선수에서 하루하루 벌어먹고사는 생계형 코치가 되니 그 짜증을 내게 털어 두었단다. 그렇게 나는 한쪽에서 어머니의 슬픔을 그리고 다른 한쪽에선 아버지의 서러움을 들어야 했단다.

왜 내게 이런 감정을 털어놔서 무기력하게 만드냐며 화를 낼 수 조차 없었지. 그저 그들의 힘듦을 이해하고 안쓰럽게 바라보며 참아 내야 했단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마음 넓은 자녀가 부모의 마음을 이해해주는 효심 깊은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여기서 정말 큰 문제는 뭔지 아니?


: 그 누구도 이브의 마음을 들어줄 사람이 없었군요. 그걸 부모님이 해주었어야 했는데 말이죠.


이브: 그렇지. 안 그래도 어린 내게 그런 힘듦을 더해주었으니 나 역시 어딘가에 내 마음을 털어둘 수 있어야 했겠지.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말이다 리틀 퍼커. 그렇게 우리 집에서 나는 부모의 부모가 되어갔다는 거다. 부모가 자식의 마음을 들어주고 이해해주고 위로해주듯 내가 내 부모의 마음을 계속 들어주고 살펴주고 있던게지.

집에서 이미 부모의 부모 노릇을 하는데 밖에서라고 다를 리가 있을까. 어딜 가나 내 부모를 대하듯 다른 사람을 대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단다. 타인의 마음을 챙기고 살펴주고 필요한 것을 고민해주고 심지어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의 태도처럼 타인의 개선되어야 할 점에 대해서만 자꾸 신경을 쓰게 되었단다.


: 마냥 일찍 철이 들고 부모님을 챙겨준다고 해서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좋은 것만은 아니었군요. 그리고 왜 이 이야기를 지금 해주는지 그리고 왜 저라면 이해할 거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아요. 저도 부모님을 대하는 태도로 타인을 대해서 그런지 계속해서 타인의 감정을 살피고 들어주고 맞춰주려고 부단히 애써요. 가끔은 친구든 연인이든 직장동료든 그들 위에 있는 듯한 태도로 조언을 건네기도 하고 제가 뭐라고 더 나은 방향을 제시해주기도 하면서 걱정을 해주죠. 마치 저는 다 겪어봤고 내가 하는 말이 분명 도움이 될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서요.


이브: 물론 그냥 단순히 내 이야기를 한 것이다만 나도 리틀 퍼커 너를 섣불리 판단하고 말을 한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지만 말이다.


: 역시 성격은 어디 안가네요. 이 와중에 제 마음 걱정을 해주었군요. 맞아요. 연인과 친구들에게는 동등하고 나란히 가는 입장으로 직장 상사들에게는 그들을 선배로서 바라봐주는 태도로 지내고 싶지만 어느 순간 오만하게도 그들을 판단하고 유약하게 대하는 저를 발견해서 두렵네요.


이브: 하지만 내가 어떤 태도로 타인을 대해왔으며 왜 그런 태도를 취하게 되었는지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은 분명 큰 차이가 있더구나. 그러니 리틀 퍼커 너는 잘 해낼 게다. 네가 원하는 관계를 잘 이루어갈 게야.


나: 저도 그러길 바래요. 잘해야한다는 부담도 무언가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도 내려놓고 친구에겐 친구처럼 부모님에겐 아이처럼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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