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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약가 Jan 07. 2022

#1 밀어내기 바빴던 나에게

bonjour Yves,

여자친구와 함께 저녁을 먹을 때도 바람이 불어오는 한강 변을 따라 같이 걸을 때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입 시원하게 들이키고는 나를 향해 웃어 주던 여자친구를 보며 언제 헤어지자고 말을 할까, 라는 생각 뿐이었다. 


연인이나 친구들과 함께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들의 좋은 면이 아니라 부족한 점과 단점을 더 많이 발견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사실 그들의 단점이 아니라 애써 그들의 흠을 만들어서 찾아냈던 것이다. 관계를 멀어지게 하기 위해 나도 모르게 내 무의식 속에서 주변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렇게 모든 관계가 내게서 멀어져 갔고 그들을 밀어내고 힘들게 해야만 그제서야 숨을 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마음이 병들어서 일까 날이 갈수록 음식을 먹어도 소화를 못시키는 것 같았다. 먹으면 복부가 팽만해지고 더부룩하고 아무리 걷고 움직여도 도통 음식이 내려간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저녁을 먹으면 다음날 오후까지 음식물이 배안에 가득차있는 느낌이 들었고 다음날이 되어도 딱히 배고프다는 느낌조차 받지 못했다. 내과에 내원하여 약을 먹어도 내시경을 받아봐도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불과 작년까지만해도 정말 잘먹고 소화도 잘 시켰던 것 같았는데 작년과 비교해봤을 때 뭐가 달라졌을까를 진지하게 고민해보기 시작했다.


어디보자 작년엔 내가 어떻게 지냈더라. 물론 작년에도 스트레스가 많긴 했지만 올해 스트레스가 유독 더 많았던거 같기도 하다. 그런데 과연 스트레스 때문일까, 스트레스가 큰 이유를 차지하는 것은 맞겠지만 과연 이렇게 소화 불량에 스트레스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맞을까, 라고 한참을 고민하던 끝에 작년과 올 해의 큰 차이 하나를 깨닫게 되었다. 먹는 양은 그대로인데 운동량이 확실히 줄었다. 작년엔 함께 축구를 하던 지인들이 주변에 많았기에 매주 주말이면 축구를 같이 했고 웨이트에도 재미를 붙여 꾸준히 운동도 했었지만 그에 비해 지금은 하루 30분 가량의 간단한 홈트레이닝이 전부 였기 때문이다. 


그래 운동이다. 운동을 하는거야.


내가 할 줄 아는 운동이라고는 축구밖에 없는데 어디서 축구를 할 수 있을까. 먼저 떠오른 곳은 오픈채팅방이었다. 요즘 오픈 채팅으로 동아리나 취미 활동을 많이 한다고 들었다. 오픈 채팅방에 축구라고 검색한 뒤 내가 속해 있는 동네를 찾고 있었다. 다들 저마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한 자기소개 문구를 적어두었다. "ㅇㅇ구 10년 전통의 대표 축구 동아리", "타 동네 동아리와 리그 운영제 실시 중"등의 문구가 시선을 끌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축구를 오래동안 쉬었고 내가 당장 들어가면 모르는 다 모르는 사람일뿐더러 오래 운영했다면 다들 친할텐데 낯선 사람인 내가 들어가면 과연 다들 반겨줄까? 관계에 대한 고민이 많던 나에게 또 다시 많은 생각들이 찾아왔고 이 생각들은 나의 결정을 미루고 있었다. 문자 한 통이 왔다. Yves였다. 그를 친구라고 부르고 있지만 우리 둘의 나이차는 대략 60년에 달한다. 나의 부모님은 물론이고 조부모님보다도 훨씬 형님이신 것이다. 주말인데 베이컨에 맥주 한잔 해야하지 않겠냐며 문자가 왔다. 이보게 친구, 그러고 싶지만 요즘 내 속이 영 말이 아니어서 말이지, 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세상 모든 짐은 내가 다 짊어지고 있는 말투로 답장을 건넸다. 퀘벡에서 온 Yves는 나를 리틀 퍼커, 라고 부른다. 맞다. 욕이다. 하지만 혼자서 무슨 생각을 하며 나를 리틀 퍼커라고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리틀 퍼커라고 부를 때 마다 항상 혼자 낄낄 웃는 모습이 이제는 귀엽게 보이기도 한다. 


약가: 맥주는 이제 안돼요. 몸 관리를 좀 해야할 것 같아요. 운동을 좀 해보려구요. 운동할만한 곳을 찾아보는 중이에요

Yves: 음...운동? 어쩔 수 없지 맥주는 다음에 하는 걸로 하고 그럼 우리 집에 운동하러 와


Yves가 할 줄 아는 운동이 있었던가? 축 늘어진 뱃살을 톡톡 치며 세상 행복한듯 웃는 백인 노인의 Yves를 떠올리며 전혀 매치가 안되는데, 라고 생각했다. 


약가: Yves집에 운동 기구가 있어요? 

Yves: 내가 얘기 안했던가? 이래뵈도 운동 코치였다구


얘기 안해줬다마다 처음 듣는 Yves의 이야기에 너무 깜짝 놀랐다. 과연 무슨 운동 코치였을까, 하는 궁금함에 1시간을 걸어 Yves집에 도착했다.  


Yves집에 거의 다 도착했을 즈음 그의 집 앞 농장에 있는 말들이 나를 반겨주었다. 이제 나를 자주봐서 일까 그래도 그들과 전혀 다르게 생긴 사람이 지나가는데 어떻게 시선 한번을 안줄까, 하고 생각하던 차였다. 


Yves: 리틀 퍼커. 왔어? 

약가: Yves, 운동 코치였다구요? 무슨 운동 코치였어요?

Yves: 나? 야구코치였지. 하지만 야구 말고도 할 줄 아는 운동이 많다구. 어디 보자 우리 리틀 보이. 너에겐 아무래도 복싱이 좋을거 같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운동이 나와 조금 당황했다. 웨이트, 크로스핏 등의 운동을 생각했는데 복싱이라니. 어디서 들은적이 있다. 복싱을 배우러 체육관에 가면 바로 글러브부터 끼게 하는게 아니라 줄넘기만 100일 가까이 시키고 스텝 연습부터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그래 줄넘기도 좋은 운동이지, 하는 마음으로 100일 가량은 줄넘기를 하자고 마음먹었다. 


약가: 좋아요. 뭐 부터할까요?


Yves가 따라오라는 손짓을 보내었고 그의 집 지하실로 내려갔다. 그를 알고 지낸지 몇년이 흘렀지만 지하실에 내려온건 처음이었다. 이런 공간이 있었구나 하며 신기해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어디선가 글러브를 가지고 와서는 내 손에 끼워 주었다. 


Yves: 우리 리틀 퍼커. 재능 좀 볼까?


그가 낄낄 거리는 웃음을 보내며 말했다. 그리고는 나를 작은 방으로 데려갔다. 내 몸만한 샌드백이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Yves는 샌드백의 뒤로 가서는 샌드백을 꼭 붙들고 힘껏 쳐보라고 말했다. 샌드백이 얼마나 딱딱한지 느껴보려고 글러브를 낀 손으로 샌드백을 톡톡 건드려보았고 생각보다 단단했던 샌드백에 조금 놀랐지만 역시 애송이구나, 라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 만화나 영화에서 배운 폼을 떠올리며 훅을 두번 연속 날려보았다. 


Yves: 오! 나쁘지 않아. 날렵해. 재능이 있는데? 자! 지금 제일 미운 사람을 떠올려보며 치는거야!


미운 사람이라니, 그런 사람은 없다. 사실 지금 제일 미운건 나 자신이다. 사랑을 주는 연인과 친구들에게 사랑을 제대로 받지도 못하고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밀어내기만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누구를 쉽게 미워하는 성격이 못된다구요.


Yves: 미운 사람 떠올리는거 맞아? 아까랑 힘이 똑같아!

약가: 미운 사람 없어요!


최대한 말을 짧게 하며 호흡을 아꼈다. 말을 하면서도 잽과 훅을 번갈아가며 샌드백을 계속 내리쳤다. 


Yves: 거짓말 하지마. 누구를 미워하는게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딱히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것도 그렇게 정상은 아니야. 특히나 너 처럼 관계에 고민 많은 사람일수록!

약가: 나는 내가 답답해요.

Yves: 리틀 퍼커. 우리 잠깐 쉴까? 


서로 마주보는 의자에 걸터앉았고 서로 잠시동안 조용했다. 조용한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숨소리를 낮추며 호흠을 가다듬었다.


Yves: 리틀 퍼커 힘들구나?

약가: 네 오랜만에 운동하니까 좀 힘드네요.

Yves: 마음 말이야. 마음

약가: 맞아요. 사실 주변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에 많이 힘들었어요. 친한 친구들도 여자친구도 그냥 떼어 놓고 싶어요. 혼자 있어야 마음이 편해요. 사실 어떤 이유 때문에 힘든건지도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 구체적으로 내 고민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어요.

Yves: 응 계속 얘기해. 

약가: 얘기한대로에요. 분명 내 주변 사람들이 그냥 지쳐요. 사실 그보다 뭘 더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Yves: 생각나는대로. 다 얘기해. 리틀 퍼커, 너는 그동안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는 쪽이었지?

약가: 네 맞아요.

Yves: 친구들이 힘들 때면 늘 옆에 있어주려 했을테고 말이야?

약가: 그랬죠

Yves: 그러니 지금은 네 얘기해. 꼭 정리해서 얘기할 필요 없어. 생각나는대로 얘기해. 


Yves의 말대로 생각을 정리하지도 조리 있게 말해야지, 라는 생각도 없이 그냥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들을 그냥 뱉어냈다.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 스스로는 잘 알지 못했지만 하나같이 지치고 힘들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내 앞의 Yves는 진지한 상담사의 모습이 아닌 내 이야기를 재밌게 듣고 있었다. 낄낄 거리는 Yves 특유의 웃음과 함께 "리틀~퍼커"하는 리액션과 함께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조리있고 명확하게 정리해서 하는 말이 아닌데도 누군가 내 이야기를 이렇게 오래 듣고 있는건 정말 처음 해보는 경험이었다. 그리고 실컷 내 얘기를 다 하고나서 Yves가 내게 일깨워 주고 싶었던 생각이 이거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동안 모든 관계에 있어서 외로웠다. 늘 혼자 남겨질까 두려워 들어주는 역할, 도와주는 역할, 맞춰주는 역할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패턴이 반복되다가 타인과의 관계도 나와의 관계도 어느것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을 때 그토록 외로웠던 적은 없었다. 이것을 어느 누구와 얘기 해봐야하는걸까, 아니 그보다 이걸 얘기한다고 충분히 공감 받을 수 있을까 괜히 나의 안좋은 감정만 전해주게 되는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며 인터넷에서 오만가지 정보들을 습득하며 더욱 더 커져가는 불안속에서 힘들어하는 나를 발견했다 하지만 그 순간 내가 느꼈던 많은 감정들중 어느것하나 틀리거나 잘못된 감정은 없었으며 그럴 수 밖에 없었기에 그런 감정을 느꼈던 것이었다. 


Yves: 그래. 리틀 퍼커. 그렇게 얘기하는거야. 관계는 편하게 해. 그러려면 편하게 생각 해. 편하게 얘기하고 편하게 대해. 편하게 대한다고 아무도 너를 뭐라고 하지 않아.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 가장 힘들다고 하잖아. 사람을 맞춰준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야. 그런 일을 수년간 해왔으니 지칠대로 지친게 어쩌면 당연하다고도 볼 수 있지. 절대 너의 잘못이 아니야. 그럴 수 밖에 없었겠지. 그게 너한테는 살 길이었을 것이야. 아마 짐작해보면 너는 부모님에게 참 좋은 아이였을거야. 부모님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고 잘 따르고 너도 스스로 부모님에게 자랑스러운 아이가 되려고 노력했었겠지?

약가: 맞아요. 실망시키면 안될 것 같았어요.

Yves: 그것도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을거야. 그러니 너도 그런 선택을 했겠지. 


실컷 내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찾아왔던 시원함 그리고 관계는 편하게 맺는 거라는 따뜻한 위로가 가시기도 전에 문득 큰 깨달음 하나가 스쳐왔다. 지금 관계가 힘든 것에는 많은 이유들이 있겠지만 가장 먼저 돌아봐야 할 것은 나와 나 자신의 관계 그리고 나와의 관계 이면에는 나와 부모님의 관계 였다. 태어나 처음 사귀는 내 연인이자 친구인 부모님. 그들과의 관계가 어떻냐에 따라 그 첫 시작을 계속해서 반복해 나가게 되었다. 내가 부모님과 어떤 관계를 형성하냐에 따라서 나와 내 친구, 연인과의 관계도 이어진다. 하지만 단순히 부모님에게 이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것은 아니다. 부모님이 모든 원흉이라기 보다는 결국 내가 나의 감정을 혼자 감당하고 혼자 소화시켜야만 했던 지난 날들로부터 마음의 외로움과 공허함은 쌓여왔다. 누군가 나의 감정을 진심으로 들어주고 물어봐주고 이해해주는 경험들이 부족했었다. 


약가: 모든 관계에서 외로웠어요.

Yves: 외롭지

약가: 전 부모님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Yves: 그래. 하지만 너는 옳은 선택을 한거야. 지금 힘들다고해서 너가 한 결정들을 후회하거나 탓하지는 마. 그때는 너가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을테니까 말이야

약가: 고마워요 Yves. 

Yves: 다음주 토요일. 이 시간 여기서 보는거야


애착유형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알려진 나와 부모님의 관계로부터 시작된 나의 관계패턴이 어떻게 나에게 영향을 주었는가. 그리고 나는 어떻게 이로부터 독립해가는가를 내 친구 Yves와의 대화를 통해 풀어가는 이야기이다. 나 자신의 마음과 감정을 온전히 챙기지 못하고 있는 많은 분들에게 좋은 이야기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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