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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깡대지 May 14. 2023

<시니컬 오렌지>
-'중앙화'된 사랑의 슬픔

단연코 윤지운 최고의 마스터피스 

황혜민과 오신비 

누군가 나에게 제일 좋아하는 한국 만화가가 누구냐고 물어본다면 고민도 없이 '윤지운' 작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림 실력은 그렇게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연출, 심금을 울리는 대사, 섬세한 심리묘사에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작가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한다. '코인충' 브런치 작가를 천명했으면서 웬 만화책 리뷰냐 하면 내 인생 만화라 할 수 있는 작품인데도 그동안 어떤 곳에서도 내 감상을 늘어놓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블록체인 개념과도 살짝 연결해 '시니컬 오렌지(이하 시니렌)' 감상을 풀어보고자 한다. 


시니컬 오렌지. 제목만 봐서는 어떤 내용인지 파악하기 힘들다. 냉소적인 오렌지라니. 결말까지 다 읽고 나서도 오렌지의 뜻은 잘 모르겠지만 주인공 황혜민을 빗대어 풀어낸 말이라고 생각한다. 작중 황혜민은 고등학교 2학년인 여고생으로 누구나 한 번쯤 돌아볼 만큼 뛰어난 미모와 몸매를 가진 미소녀다. 그 덕분에 남학생들에겐 추앙의 대상이 되지만, 까칠하고 자기중심적이며 냉소적인 성격 탓에 같은 학교 여학생들에겐 미움의 대상이다. 카페 파이퍼를 운영하는 사촌오빠 오신비, 과외 선생이자 신비의 여자친구인 허소류에게만 자기 세계를 허락했던 황혜민이 어느 날 갑자기 무대뽀로 돌진해오는 장마하로 인해 자신을 가뒀던 틀에서 벗어나 성장한다는 얘기다. 


솔직히 어떤 완벽한 문장으로 표현한다고 해도 이 작품의 매력을 고스란히 글로만 전달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이 만화를 '까칠한 여고생 황혜민과 능글맞은 미소년 장마하의 사랑 이야기'로 요약하는 건 거의 이 작품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한다. 두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가 중심인 건 맞지만 시니렌의 매력은 순정만화라는 장르에 국한하기에는 넘쳐흘러난다. 시니렌은 2002년~2006년까지 연재한 만화다. 즉, 2023년 기준 대학교 3학년~고등학교 2학년 친구들이 태어났을 때 연재된 오래된 만화다. 그럼 왜 나는 이렇게 오래된 시니렌의 매혹에 이토록 오랫동안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걸까? 


먼저 황혜민의 성장기 때문이다. 황혜민은 누구나 탄성을 자아낼만한 미소녀에다 명품 가방, 액세서리를 휘감고 담아 모두의 부러움을 산다. 하지만 말주변이 없고 까칠하며 냉소적인 성격 탓에 학교에선 딱히 친구를 사귀지 못한다. 오히려 여자애들에게는 말도 안 되는 루머의 희생양이 되어 따돌림을 당한다. 나는 비록 황혜민같은 미소녀는 아니지만 학창 시절 황혜민과 비슷한 성격이라 비슷한 따돌림을 당한 적이 있다. 이유 모를 괴롭힘을 당해 아파하면서도 내심 친구를 사귀고픈 황혜민의 심리 묘사가 가슴에 박힌다. 정말 대인관계에 서툴러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의 마음을 윤지운 작가는 예리하게 그려낸다. 그러면서 황혜민이 장마하로 인해 자신을 되돌아보고 점차 자신의 틀을 깨부수며 성장해가는 모습은 눈물겨울 정도로 아프면서도 사랑스럽다. 시련과 역경을 이겨내고 마침내 활짝 웃는 혜민을 보면서 같이 위안을 받는 느낌이다. 


시니렌은 총 9권으로 완결인데 1권부터 9권까지 표지를 살펴보면 냉소적이었던 황혜민의 표정이 서서히 부드러워진다. 완결권인 9권에서는 혜민이 활짝 웃고 있다. 시니렌의 줄거리는 '얼음장같이 차갑고 냉소적이었던 공주님이 웃는 법을 배워가는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만화책 내용을 살펴보면 황혜민의 표정이 가장 어두운 표지인 1권은 여느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처럼 명랑하고 쾌활한 분위기로 시작한다. 반대로 황혜민이 가장 밝은 표정으로 활짝 웃는 9권은 오신비의 죽음, 마침내 드러난 진실에 파국으로 치닫는 인물들의 관계 등 가장 어두운 내용을 담고 있다. 어두운 진실을 가슴 속에 품으면서도 활짝 웃고 살아갈 수 있는 게 성장한 인간의 강함이란 게 아닐까. 윤지운 작가의 의도를 그렇게 내 멋대로 해석해본다. 


시니렌을 20년째 앓는 또 다른 이유는 오신비 때문이다. 단연코 오신비는 한국 순정만화계예 전무후무할만한 '서브 남주'다. 아니, 다른 나라 작품까지 합쳐도 이렇게 애절하면서 서글프고 처절하고 동시에 강렬한 캐릭터를 또 만날 수 있을까. 비록 시니렌의 남자 주인공은 장마하지만 단언컨대 이 만화의 중심 축은 오신비다. 신비가 없으면 이 만화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 오신비는 그를 임신한 줄 몰랐던 엄마가 홧김에 먹었던 약의 부작용으로 천연 백발로 태어나 날카로운 눈매 때문에 사람들 속에 섞이지 못하고 많은 편견과 시비에 시달렸다. 그래서 신비는 학창시절 입도 험하고 주먹부터 나가는 깡패가 됐다. 


공부는 잘해서 서울대학교에 들어갔지만 1학기 만에 필요한 걸 다 배웠다는 이유로 자퇴하고 카페 파이퍼를 차려 운영한다. 하지만 신비의 카페 파이퍼에는 아무나 들어올 수 없다. 그가 허락한 소수의 존재 황혜민과 허소류, 필요에 의해서 개입을 허용한 장마하 정도를 빼고는. 신비의 여자친구 허소류에 따르면 파이퍼는 무균실이기 때문에 아픈 사람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다치고, 사람과 잘 섞이지 못한다는 점에서 혜민과 신비는 같은 상처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또 신비에게 재수 없는 일이 생길 때마다 혜민에게도 감추지 못할 상처가 생기고 그럴 때마다 둘은 서로에게 위안이 되고, 안식을 느낀다. 둘은 놀랍도록 닮았기 때문이다. 

 

혜민은 신비를 '가족'처럼 생각하지만 신비는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자신과 같은 상처를 가졌기에 세상에서 유일하게 신비를 이해해 줄 수 있는 혜민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단순히 여자로서 사랑하게 된 게 아니다. 귀여운 동생이기도 하고, 절친한 친구이기도 하다. 혜민은 신비에게 그 자신을 제외한 세계 전체가 된다. 그런 혜민이 자신을 떠날까 봐 두려워진 신비는 혜민을 교묘하게 자기중심적이고, 고집 센 아이로 만들어놓는다. 그렇게 혜민에게 가까워지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도록 망가뜨린다. 그 안에 고립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에게 반한 동창생 허소류를 끌어들여 혜민의 친한 친구 겸 의지할 수 있는 언니로 만든다. 자신이 채워줄 수 없는 혜민의 외로움을 소류가 채워주도록. 그래서 친구를 사귈 필요성을 혜민이 느끼지 못하도록. 그렇게 신비는 공주님과 같은 혜민을 자신의 성 안에 가둬놓은 마왕이 된다.    


"사랑해. 사랑한다. 오래전부터 내 세계엔 너 하나밖에 없었어. 난 너만 있으면 바랄 게 없어."

  

마지막의 마지막에 가서야 신비가 혜민에게 털어놓는 고백이다. 나름 적지 않은 만화, 소설, 드라마, 영화를 봐왔다고 생각하는데 이보다 더 처절하고 애절한 사랑 고백을 본 적이 없다. 신비는 혜민과 피가 섞이지 않은 사촌관계지만 현실적으로 이어질 수 없기에 혜민의 선택지가 자신밖에 없도록 망가뜨려놓고 자신만 바라보도록 독점하고자 한다. '중앙화'된 사랑인 것이다. 신비 역시 혜민처럼 사람과 잘 교류한 적이 없기 때문에, 중앙화해서 철저히 자기 혼자 독차지해야만 혜민의 사랑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신비의 사랑은 혜민을 온전히 충족시키지 못한다. 


혜민과 마음을 나누는 장마하는 동화로 따지면 마왕을 물리치고 성을 허물어 공주를 구출하는 왕자와 같다. 마하의 사랑은 신비의 사랑과 정확히 대척점에 있다. 비유적으로 혜민이 자신만을 사랑하도록 팔다리를 자르고, 그러지 않으면 머리까지 자를 기세였던 신비의 중앙화된 사랑과 달리 마하의 사랑은 블록체인 개념으로 치면 '탈중앙화'되어 있다. 마하는 혜민의 세계를 열어준 사람이다. 학교에서 고립되어 있던 혜민은 마하를 통해 마하 전 여자친구들의 모임에 가입해 친구들을 얻고, 타인과 교류하는 법, 혼자서 자립하는 법을 터득한다. 마하는 혜민이 선택지가 자신밖에 남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자신만을 바라보기만을 원하는 신비와 같은 사랑을 원치 않는다. 다른 사람들과 평범하게 어울리면서, 헤민이 떳떳하게 혼자서 살아갈 수 있으면서도 마하를 선택해 혜민이 자신을 사랑해 주길 원한다. 


마하의 사랑은 블록체인 개념과 비슷하다. 비트코인과 블록체인은 지난 2009년 사토시 나카모토라는 익명의 개발자가 2008년 금융위기를 보고 월가에 치중된 중앙화된 금융 경제 시스템에 환멸을 느껴 만든 기술이다. 블록체인은 여러 노드 운영자가 하나의 거래를 검증해 거래의 투명성과 위변조를 방지하는 탈중앙화된 기술이다. 우리 말로는 분산원장이라고도 한다. 한 장의 장부가 아닌 여러 장의 장부에 걸쳐 기록하기 때문에 거래를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비의 사랑이 하나의 서버에서 모든 것을 총괄하고 결정하는 기존 중앙화된 시스템과 유사하다면 마하의 사랑은 좀 더 열려있고 다양한 개체와의 교류와 교감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좀 더 탈중앙화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블록체인은 탈중앙화되어 있는 만큼 중앙화된 시스템보다 더 정확하고, 정교하게 거래 내역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탈중앙화야말로 블록체인의 매력이자 핵심이지만, 사람의 마음이 어디 컴퓨터 시스템이던가. 신비처럼 진심으로 갈망하고 애원하는 상대방이 생기면 혼자서 독점하고 싶은 건 본성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런 사랑은 슬플 수밖에 없다. 혼자 상대방의 모든 걸 독점하고, 차지하길 열망하지만 정말로 타인의 모든 걸 독점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인간이, 사랑이 있을 수 없다. 그런 사랑이 있더라도 오래 갈 수 없다. 


그래서 신비의 사랑은 슬플 수밖에 없고, 공허할 수밖에 없다. 그 아련함 때문에 나처럼 시니렌을 20년째 앓는 독자들이 많은 거 아닐까. 하지만 시니렌이 정말 명작인 이유는 그런 슬픔과 처절함 때문에 후회로 절망해 나락 끝까지 떨어지는 인간을 보여주면서도 그런 어두운 감정을 모두 끌어안고서도 사람은 다시 웃으면서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종족과 학문에 통찰한 자가 아니고서는 쓸 수 없는 이야기다. 부디 이 글을 읽는 모두가 시니렌을 한 번쯤 만화카페에라도 가서 보고 그 매력에 흠뻑 빠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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