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템즈강 하프 마라톤
여행지나 출장지에서의 러닝은 단순한 운동 그 이상이다. 낯선 곳을 온몸으로 느끼고, 그 공간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제법 맘 편한 방법이다. "달리는 게 힘든데 무슨 편한 경험이냐" 하겠지만, 러너를 위한 잘 정비된 길을 따라 달리다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마주치는 현지 러너들과 눈인사 몇 번 주고받는 사이, 낯선 이방인이 아니라 ‘그냥 러너’로서 그곳에 자리 잡게 된다. 그렇게 마음은 가볍고, 발걸음은 호기심을 따라 새로운 길 위를 자유롭게 튕겨 나간다.
런던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 템즈강을 따라 가볍게 달리러 나갔다. 처음엔 숙소 근처 강변만 가볍게 뛰고 돌아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저 멀리 '런던아이'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오자, 슬며시 욕심이 생겼다. "그래, 저 까지만 가보자." 마침 템즈강 상류 방면 우측사이드은 길이 잘 정비되어 있어 내 페이스 대로 뛰기에 제격이었다.
런던의 서쪽 첼시. 거기서도 서쪽에 위치한 숙소에서 출발해 다리 하나 건넌 뒤, 강변에 크게 자리 잡은 '배터시공원(Battersea Park)'을 끼고 달리기 시작했다. 여러 러너들과 마주치며 자연스레 인사를 나눴고, 그들을 따라 공원 안쪽으로 들어가 보고 싶은 유혹도 살짝 들었다. 직사각형 형태의 이 공원은 긴 면이 1Km 남짓, 둘레도 어림잡아 3Km 정도이니 매주 달리는 광교호수공원의 원천호수 코스와 비슷한 거리였다. 머릿속에 '이 정도면 가볼 만하겠는데?'라는 생각이 스쳤지만, 이내 꾹 참았다. 여행 첫날 아침부터 러닝이 너무 무리하면 이후 일정이 꼬일테니.
그렇게 기분 좋게 달리던 중, 아파트 공사 현장 같은 곳에 다다르며 강변길이 뚝 끊겼다. 방향만 대략 기억한 채 잠시 도로 쪽으로 우회해 달리다가 다시 강변길로 합류했다. 몇 개의 다리 아래를 지나며 계속 달리던 중, 드디어 유튜브로 봤던 랜드마크들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강 건너편, 우뚝 솟은 ‘웨스터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과 ‘빅벤(Big Ben)’. 웅장한 고딕 양식의 건축물들이 눈앞에 펼쳐지자, 절로 감탄이 터져 나왔다.
곧이어 길가에 '런던아이'가 모습을 드러낸다. 오늘 이곳까지 달리게 한 장본인. 2000년에 개관해 '밀레니얼 휠'로도 불리는 이 대관람차는 개관 당시엔 세계에서 가장 높았던 만큼 런던 전경을 내려다보기엔 충분해 보였다. (싱가포르의 플라이어보다는 조금 작아 보였는데, 런던아이가 135m, 플라이어가 167m로 30m가량 차이가 난다고 한다. 런던아이 이후 14년 뒤에 라스베가스에 200m '거대~' 관람차가 생겼다 하는데, 조금 미안한 얘기지만 거기서 그렇게 올라가서 볼 게 뭐가 있을까 싶었다. 각양각색의 호텔과 공기가 너무 좋아 또렷이 보이는 저 멀리 있는 산맥 정도)
시간이 흐르며 점점 늘어나는 직장인들의 출근 행렬을 보니, 러너의 여유로움이 더욱 값지게 느껴졌다. 7년 전 싱가포르 여행 갔다가 도착한 날 새벽에 마리나베이를 달리는 러너들을 보고 '저들은 저렇게 달리는데, 난 뭐지?" 갑자기 우울해졌던 때가 생각났다. 당시 수개월에 걸친 프로젝트에 파견나가 매일 야근과 주말 근무를 하며 건강검진 결과가 최악으로 나왔던 터라 체력이나 건강에 대해 많이 위축되어 있었는데 활기차게 달리던 내 또래, 아니 더 나이 든 러너들의 모습은 큰 자극이 되었다. "나도 저렇게 달리고 싶다"라는 생각에 그날 바로 러닝화와 옷을 사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땐 정말 완전 초보 러너였는데, 그래도 지금은 풀코스 마라톤을 두 번 완주하고, 하프는 매년 네다섯 번 달리고 있으니 어엿한 '러너'가 된 것 같다. 그나저나 런던의 직장인들은 어쩜 그렇게 다들 참 훤칠하고 멋쟁이들만 있는 것인지. 덕분에 더욱 기분 좋은 러닝!
이른 아침부터 길게 늘어선 단체 관광객 줄을 스쳐 지나갈 때, 그들이 달리는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현지인이 된 듯한 허풍스러운 마음이 차오를 때, 강 건너 '세인트 폴 대성당(St Paul's Cathedral)'이 "거기 애송이 여행객. 어흠~" 하는 것 같은 위엄을 드러낸다.
여기서 턴을 해야 하나 망설였으나,
롯데타워를 연상케 하는 초고층 빌딩 '더 샤드(The Shard)'가 눈에 들어왔다.
템즈강 동쪽 하류 랜드마크인 '타워브리지(Tower Bridge)'가 "나는 보고가야 하지 않겠어? 생각해 봐, 언제 또 여길 뛰어서 건너보겠어? "하는듯 하니 어찌 돌아설 수 있겠는가.
곧이어 마주한 타워브리지는 역시 그 웅장한 자태를 자랑했다. 130년 역사를 머금은 현수교 위를 달리는 2층버스의 빨간색이 인상적이다. 런던 특유의 정취를 만들어내는 건물들이 가득한 도심에 에지 있는 매력을 더하는 Red. 다리를 건너오는 길에도 연신 돌아보며 타워브리지 사진을 찍으며 가족과 함께 다시 찾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어느덧 다시 빅벤. 가까이에서 본 빅벤은 이번 여행에서 가장 강렬한 경험이었다. 강 건너에서 바라보며 느낀 감동은 ‘와 웅장하네~’ 정도의 감동과는 차원이 달랐다. 거대한 규모와 대비되는 정교한 문양과 화려함에 절로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황금빛의 100m 가까운 높이의 시계탑, 상단 시계만 7m 크기. 그 안을 가득 채운 300여 개의 오팔 글래스. 거대하고 좋은 전통 자재를 사용한 건물은 세계 곳곳에 지어지지만, 이런 디테일과 화려함은 역사와 문화가 응축된 도시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그야말로 '도시의 정수'로 다가왔다.
건축물에서 이런 감동을 느낄 줄은 미처 몰랐다. 그것도 특별한 기대나 계획 없이 온 런던에서.
여행 첫날 아침의 감동을 가득 안은 채 숙소로 향하는 길. 너무 멀리 오긴 했다보다. 14시간의 비행을 마친 다음 날 아침의 피로가 다리로 몰려오고, 썩 좋진 않은 강북면의 길에 오른발을 접질려 등골이 오싹해지기도 했다. 다행히 그간 쌓아온 러닝 구력 덕분에, 몇 번의 스트레칭으로 오른쪽 발목은 완주하는데 무리 없었고, 그렇게 하프마라톤 보다 긴 23.5Km 템즈강 러닝을 마무리했다.
(이날 러닝은 지금도 너무나 좋은 기억이긴 했지만, 역시 그날 일정에 부담이 되긴 했다. 아닌 척 다니긴 했어도 4만보를 걸은 그날. 걷는 거리가 길어지자 숨길 수 없는 피곤함이 짜증스러운 태도로 나타났던 것. 지금도 가족에게 미안한 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