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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지 Sep 12. 2022

보름달 숙제

달을 보니까 우리 반 생각이 났어요.


 초등학교 6학년 2학기 과학 교과서에는 달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달의 위상 변화와 그 이유를 알아보는데, 사실 이건 꽤 어려운 내용이라 웬만한 어른들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가끔 보면 초등 교육과정 수준이 깜짝 놀랄 만큼 높다니까. 특히 과학이 제일 심하다.

 달의 위상 변화. 달의 모양이 초승달에서 반달을 거쳐 보름달이 되는 것. 그리고 이렇게 꽉 차오른 달이 다시 작아졌다가 또 커지는 것을 반복하는 이유와 그 규칙을 알아보는 수업이다. 당연하게도 달이 부지런하게 제 몸을 깎았다가 다시 살을 찌우는 것은 아니다. 핵심은 달이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치 연극을 볼 때 관객이 무대 위에서 조명이 켜진 부분만 볼 수 있듯이, 둥그런 달이 무대라면 우리는 그중 태양의 빛을 받는 부분만 눈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지구, 태양, 달. 셋이 이루는 각도가 바뀌면 달에 태양 빛이 닿는 구역이 계속해서 바뀌고, 우리가 보는 달의 모양도 계속 바뀌는 거다.

 그 주기가 약 29.5일이다. 그래서 한 달에 딱 하루만 완전한 보름달이 뜬다. 심지어 태양을 기준으로 하는 양력으로는 때를 알 수없다. 음력 날짜를 확인해야만 보름달이 뜨는 날을 알 수 있다.



 나는 엉뚱하게도 임용고시 공부를 하며 이런 달의 위상 변화에 매료되어버렸다. 달 덕후로 거듭난 나는 컴퓨터와 휴대폰 바탕화면은 무조건 달 사진. 조명도 보름달. 심지어 랩네임까지 달지로 바꿔버렸다. 둥그렇고 빵떡 같은 얼굴형도 보름달을 닮았다고 생각하니 썩 마음에 들었다.

 어떻게 달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밤하늘에 이렇게 예쁘게 빛나면서, 규칙적으로 모습을 바꾸는데, 그 규칙이 엄청 복잡하고 동시에 귀하기까지 하다니. 정말 도도하지 않은가! 심지어 달의 모양이 달라지면 뜨는 시간이나 위치도 달라진다. 매력 터져.

 놀랍게도 이 모든 복잡한 규칙을 우리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다 배운다. '아니 내가 그런 내용을 초등학교 때 배웠다고?' 하는 의문이 들어도, 여러분의 과학 수준이 6학년 친구들보다 낮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6학년 친구들도 이 단원에서는 꼭 반쯤 혼이 나간 눈으로 수업을 듣고, 단원 평가는 다른 때보다 늘 엉망이고, 문제를 잘 맞힌 친구들 마저도 이렇게 헷갈리는 내용은 보통 금세 까먹기 마련이니까. 기억나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다.


 ... 아니! 솔직히 괜찮지 않다! 달을 좋아하는 나는 가르치는 입장에서 솔직히 슬프다. 이렇게 매력적인 달의 변신 이야기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다니. 그래서 나는 아이들이 이 내용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달을 닉네임으로 쓰는 선생님으로서의 일종의 사명감을 가지고 이 단원을 매번 열정적으로 가르친다. 실험 관찰을 펴서 달 스티커를 쪼르르 붙여보는 시간도 물론 도움이 되겠지만, 달을 공부하려면 역시 밤하늘을 올려다봐야 한다. 그래서 단원이 끝나고 나면 매번 내주는 숙제가 있다.

  <보름달이 뜬 날에 달 사진을 찍어 단톡방에 올리기>

 작은 상품도 걸려있는 이 숙제에 아이들은 꽤 진지하게 임한다. 졸업까지 남은 시간은 약 5개월. 남은 보름달은 다섯 개뿐이다. 음력 15일이 되면 저녁 즈음부터 우리 반 단톡방은 시끌시끌해진다. 누군가 달 사진을 먼저 찍어 올리며 1등! 을 외치면 집에서 시간을 보내던 아이들도 후다닥 밖으로 나간다.

 달이 보이는 동남쪽 하늘이 어느 방향인가 빙글빙글 돌아보다가, 건물들이 시야를 가리지 않는 넓은 공간으로 뛰어가서는, 휴대폰 카메라를 켜 뿌옇고 작은 달 사진을 찍어 보낸다. 사진으로 찍는 것보다 직접 눈으로 보는 게 훨씬 더 예쁘다는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같은 달을 본다. 밤하늘에 매일 뜨는 달. 사실은 참 흔하지만 결코 흔하지 않은 보름달 덕분에 우리는 달에 한 번, 재미있는 추억을 공유할 수 있었다.



 2021년 9월 21일. 오늘은 추석이다. 한가위. 가을의 달빛이 가장 좋은 밤. 삼십 대를 코 앞에 두고 맞이한 이십 대의 마지막 명절에 나는 괜한 기분들을 마주했다. 나만의 길을 간답시고 힘차게 놀고 있기는 하지만 과연 이게 잘하고 있는 게 맞을까? 나를 아껴주고 걱정하는 몇몇 분들의 생각이 결국 맞으면 어떡하지? 나는 아이들에게 결국 돌아갈 수 있을까.

 그리고 저녁 즈음, 2018년의 반 친구들과의 단톡방에 반가운 달 사진이 두어 장 올라왔다.

  "선생님, 달이 무지 크고 밝아요."

  "보름달 보니까 우리 반 생각이 났어요. 보고 싶어요 쌤."

 3년째 간간이 이어지고 있우리만의 숙제. 내 소망대로 아이들달의 변신 이야기를 잘 기억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고, 이론은 날아가고 추억과 반가움만 남았을 수도 있겠다. 뭐 그래도 그것대로 좋다.


 달력에 아주 작고 드물게 표시되어 있는 음력 날짜까지 확인하며 보름달을 챙기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 마음먹고 기다다가 만나기보다는, 어쩌다 올려다본 하늘에서 달이 꽤 크게 떠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아 보름달이 근처구나, 하고 떠올리는 경우가 더 많을 거다.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의 달에서 나를, 우리를 떠올려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그냥 지나갈 수도 있는 일상의 장면에 우리가 꽤 반갑게 자리 잡은 거잖아. 좋다! 숙제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 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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