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자격 2

남편은 미친놈 편?

by 정현숙

목요일 재판을 마친 후 온몸이 무너져내리는 듯한 피곤함으로 아무도 없는 불 꺼진 관사로 들어가 온몸을 웅크리고 잠이 들었다.

집에 가고 싶었다...


금요일 업무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다.

드디어 내 집이다. 따뜻하고 고마운.

채 가시지 않은 눅진한 피로와 거북함이 다시금 엄습해 왔다.

저녁식사 후 남편에게 어제의 재판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침을 튀겨가며 성토했다.

내가 얼마나 이성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애를 썼는지도 말이다.


남편은 내가 하는 얘기를 쭉 듣더니 뭘 그렇게 감정을 소모하느냐고, 그냥 차분하게 절차만 진행하면 되지라며 한마디를 건넨다.

살짝 언짢았다.

누군들 그렇게 감정소모하고 싶겠냐고. 근데 사건이 그렇지가 않잖아 이 사람아...

속으로만 나부댔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이야기를 줄줄이 이어나갔다.


근데 말이야 그 미친놈이 뭐라는 줄 알아?
글쎄 와이프가 본인 바람피운 걸 감추기 위해
자기 딸을 방으로 밀어 넣어주었다고 하는 거야.
이혼법정에서 할 소리야 그게?
그러면서 지가 강간한 거
마누라도 공범이라면서 미친 소리를
쳐자빠져서 하더라고.
완전 싸이코 아니야?



나의 말에 남편은 일말의 요동도 없이 한마디를 툭 던진다.


당신이 모르는 뭔가 다른 사정이 있겠지...



삐! 삐! 삐! 삐! 삐~~~~~~~!!!!!!!!!

이거 뭐지? 이 남자도 미친 거야 뭐야. 지금 누구 편을 들고 있는 거지? 이렇게 힘든 마누라가 침을 튀겨가며 말하고 있는데 설마 그 미친놈 편을 들고 있는거야?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맛탱이가 갔다.

남편에게 버럭 소리를 질러댔다.


14살 의붓딸을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패륜적인 짓거리로 3년간 유린하고
대법원까지 가서 징역 20년형이 확정되었는데
무슨 다른 사정?
설사 다른 사정이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왜 그런 미친놈의 다른 사정까지
고려해 주고 살펴줘야 하는데?


첨엔 웃으며 이야기 했는데, 말하다보니 점점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그러다 어느 순간 꼭지가 훽 돌았다.

법정에서 피고에게 미처 다하지 못한 화풀이를 남편에게 쏟아냈다.

남편도 처음에는 웃으며 응대하다 곧 '어라? 뭐지?' 하며 어리둥절해하더니, 내가 멈추지 않고 계속적으로 공격을 하자 남편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사실 그러고는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잘 나지는 않는다.


남편은 안방으로, 나는 건넌방으로 들어가 각자의 방문을 닫아버렸다.

싸늘한 기운이 휘감아 쳤다.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그저 남편의 따뜻한 말 한마디만 바랬을 뿐이었는데...


당신 오늘 정말 힘들었겠구나.

정말 뭐 그런 미친놈이 다 있대?

당신 정말 힘들었겠다...

정말 힘들었겠다...

힘들었겠다...


그 한마디면 족했다.



다음날 아침식사를 준비하는데 남편이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오더니 "여보 미안해~"하며 사과를 한다,

정말 화들짝 놀랄 일이었다.

전날 싸운 분위기로 봐서는 최소 일주일에서 한 달은 가도 무방하리만큼 피 튀기는 감정다툼이었는데 말이다.


남편이 이렇게 빛의 속도로 사과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초유의 사태이다.

더더군다나 남편이 정확하게 미안하다는 단어를 쓰며 사과를 한 것도 너무나 놀라웠다.

대개는 미안해도 말도 잘 못하고 그냥 비비적거리면서 유야무야 넘어가곤 했는데 말이다.


어제 맘 상한 걸로 치자면 나 역시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였을 텐데 남편의 그 한마디에 그냥 또 눈 녹듯 녹아들었다.

그 나쁜 놈 때문에 우리 부부가 싸우고 감정소모하고 낯을 붉힌다는 것 자체가 상당한 넌센스이니 말이다.

그렇게 장렬히 싸우고 허무하게 화해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렇다.

대문자 T인 그가 한 "당신이 모르는 뭔가 사정이 있겠지"란 말은 "그러니 너무 그렇게 당신 마음 쓰지 마. 당신만 힘들어져"란 의미였을 것이다.

그러나 대문자 F인 나에게는 "당신이 모르는 뭔가 사정이 있겠지"란 말이 "나는 미친놈 편이야"란 말로 들렸다.


20년 넘게 지지고 볶고 함께 살다 보니 이제 그의 T적 언어도 나름 잘 해석한다고 생각했는데,

내 마음이 척박해지니 다시금 나의 F적 마인드로만 그의 말을 해석하고 비난해 버렸다.


우리 부부는 미친놈 덕분에(?) 한번 더 환기하게 되었다.

우리가 정말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과 여전히 상대방의 마음과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또한 상대방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냥 받아들이고 한 번 더 암기해야 한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삶에 적용되지 않아 한번 삐끗했다면 바로 사과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도 말이다.

이거 뭐 그 미친놈에게 고마워해야 하나. 참내...


여하튼 우리 부부가 치열하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 <조사보고서>가 접수되어 올라왔다.

다가오고 있다... 결정의 시간이...


(3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