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남정 May 31. 2022

 [북&무비] - 어린이가 미래다

《그레텔과 헨젤》vs 「헨젤과 그레텔」

 


  야코프 그림과 빌헬름 그림 두 형제가 쓴 동화가 우여곡절을 겪고 비로소 간행된 때는 1812년과 1815년이었다. 총 156편의 이야기가 수록된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이야기』라는 이름의 이 동화집은 ‘입으로 전해진 동화에 충실하면서도 그 형식과 이념이 당시 독일의 중류층 구미에 가장 알맞은 동화’로 탄생하는 데 성공했다. 그 뒤로도 동화는 계속 추가되고 개정되면서 1857년 제7판이 간행되었을 때는 모두 210편의 이야기가 되었고, 이는 160개국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익숙한 동화가 되기에 이르렀다.    

  

  그림 형제의 많은 작품들은 지금까지도 다양한 콘텐츠를 통해 각색되고 재탄생되고 있다. 그 중 새엄마가 아이들을 숲에 내다버리고, 길을 헤매다 들어간 과자집에서 마녀를 만나며, 그 마녀를 물리치고 집으로 돌아온다는 「헨젤과 그레텔」의 이야기가 2020년 7월, 스토리뿐만 아니라 장르까지도 비틀며 영화 《그레텔과 헨젤》로 재구성되었다.     

 

  가난한 나무꾼이 아내와 두 아이를 데리고 숲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남자 아이 이름은 헨젤이고 여자 아이 이름은 그레텔이었습니다. 워낙 가난한 살림이라 늘 먹을 것이 부족하곤 했는데, 거기다가 그 해에는 큰 기근이 나라 전체를 휩쓸고 지나가서 나무꾼은 식구들의 먹을거리를 그나마 마련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가난한 나무꾼’이 주체가 되어 시작되는 동화를, 영화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아버지는 아예 등장하지 않으며, 계모가 아닌 진짜 어머니는 나라 전체를 휩쓴 기근에 악령까지 깃드는 바람에 아이들을 집에서 쫓아내기에 이른다. 길을 잃지 않으려고 자갈이나 빵조각을 길에 떨어뜨렸던 동화 속에서의 오빠 헨젤은, 영화에서는 누나 그레텔의 껌딱지 동생으로 등장한다. 말하자면 1800년대 남성 중심적 동화를 여성 중심적 서사로 비튼 셈이다. 한편으로 보자면 동화 「헨젤과 그레텔」도 마지막에 마녀를 오븐에 밀어 넣고 오빠를 구하는 그레텔의 활약상이 돋보이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애초에 그레텔을 누나로 설정하고 그레텔이 주체가 되어 진취적으로 스토리를 이끌어간다는 점에서 영화 《그레텔과 헨젤》은 많은 관심과 기대를 받기에 충분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영화는 과도한 욕심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잘 알려져 있듯 그림형제의 동화는 민담과 설화를 수집하여 만든 이야기들이고,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교훈을 담으려고 했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잔혹한 내용들이 많다. 따라서 영화가 이 동화를 호러나 서스펜스라는 장르로 그로테스크하게 그리고자 했다는 점에는 공감한다. 또한 여성중심의 서사와 그들의 상징적인 대사를 통해 페미니즘이나 PC적 시각을 표현하고자 했다는 것 역시 공감한다. 영화 전체적 분위기 역시 이러한 요소들을 잘 갖추고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점이 이 영화를 망친 요소가 되고 말았다. 즉 너무 여러 가지 ‘요즘 것’들을 넣고 싶다보니 이것저것 다 갖다 넣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영화는 산만하고 지루하고 황당한 것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그림 형제의 「헨젤과 그레텔」이 잘 정돈된 이야기인 것도 아니다. 영화가 최근 트렌드를 좇으려고 이것저것 시도함으로써 스토리와 구성이 산만해졌다면, 원작 동화는 ‘복선처럼 깔려있는 의미 없는 것’들이 이야기를 산만하게 한다. 예를 들면 돌아오는 길을 표시하기 위해 자갈을 하나씩 떨어뜨리며 걷는 헨젤이 자꾸만 집 쪽을 돌아본다. 이유를 묻자 ‘지붕 위에 앉아 있는 하얀 새끼고양이’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한 마녀를 물리치고 돌아오는 길에서 만난 큰 강물 앞에서, 이들은 친절하고 ‘하얀 오리 한 마리’의 도움을 얻게 된다. 여기서 등장하는 ‘하얀 새끼고양이’와 ‘하얀 오리 한 마리’의 존재감과 역할은 그게 전부다. 그 어떠한 상징도, 복선도, 암시도 가지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헨젤’과 ‘그레텔’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당시에는 영아 살해나 아동 유기가 빈번하던 시대였다. 비슷한 일들이 모양새만 다르게 현대에서도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고작 50여 년 전만 해도 먹고 살기 힘들 때는 자식을 다른 나라로 ‘버렸고’, 불과 몇 년 전에도 장애가 있는 친자식을 외국에 버리는 사건이 있었으며, 아이가 말을 듣지 않는다고 달궈진 프라이팬에 손을 지지거나 세탁기에 넣고 돌리는 일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아이의 갈비뼈가 부러지도록 폭행하고 방치해서 죽게 하거나 가방에 가둬 질식할 때까지 둔 사건도 있었다. 화목한 가정을 위한 ‘패밀리’적 정신으로 보든 ‘페미니즘’적 정신으로 보든, 또한 그것의 장르가 호러든 드라마든, 이야기가 어떻게 각색되었든 간에 “어린이가 곧 미래”라는 사실은 헨젤과 그레텔이 말하고자 하는 단 하나의 자명한 교훈이라는 점이 분명하다. 또한 이것이 오늘날까지 불멸의 베스트셀러로 회자되는 단 한 가지 이유가 된다. 

작가의 이전글 [북&무비] - 고통과 계급 없는 사회를 꿈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