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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ofessor Sunny Sep 16. 2021

미국 대학 지도교수님과 지내기

멋진 한 사람

살면서 ‘생명의 은인’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이 21세기에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할만한 돌발상황이 얼마나 발생할까. 그런데 우리 엄마는 나의 박사과정 때 지도교수님을, 최소 두어 번쯤 본인 딸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불렀다. 엄마의 그 표현을 듣던 그 당시의 나는 엄마의 그 표현이 ‘선생님’이란 직위에 쓰긴 어울리지 않고,  또 너무 촌스러운 표현이라 생각했었다. 어찌 됐건, 선생님과 보낸 4년은 내 나머지 인생의 색깔을 확실히 정해주었다.


사실 박사과정에 진학하고 몇 년이 지나도록 우리 부모님은 내가 박사과정에서 공부하는 줄 몰랐다. 나는 그저 유치원에서 근무 중이라고 둘러댔던 거 같다. 박사과정 2년 차, 수료해야 하는 모든 수업을 마쳤을 때쯤, 수중에 있던 돈이 다 떨어지면서 어쩔 수 없이 엄마에게 돈을 좀 달라고 해야 하는 시기가 왔다. 나는 조교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 조교일은 한 달에 1300불에서 1800불의 생활비가 나오고 학비를 면제해준다. 나는 그 돈으로 작은 아파트의 렌트비, 식비를 포함한 모든 생활비를 부담했다. 돈이 적지만 살만은 했다. 문제는 여름 방학 3달은 일을 하지 않아서 돈을 받을 수가 없다. 나처럼 외국인은 학생 신분으로 있는 동안 학교 외 어느 곳에서도 돈을 벌면 안 된다. 그 여름 3달을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엄마에게 내가 3백만 원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이야기해야 했다. 원래 엄마는 내가 공부를 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래서 말하지 않았던 거였는데, 막상 내가 박사과정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참 좋아하셨다.


나는 박사 첫 2년을 재미있게 보내기도 했지만, 심적인 부담이 말도 못 했다. 우선 첫해에는 적응을 잘 못했고, 거의 매년마다 쳐서 패스해야 하는 큰 시험들이 버거웠다. 더욱이 첫해가 끝나자마자 나의 첫 지도 교수는 다른 학교로 이직을 하셨는데, 그러면서 나는 한마디로 낙동강 오리알이 됐다. 첫 지도교수를 따라 다른 주로 이사하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니고, 또 첫 지도교수가 떠나고 남은 학교에는 나의 전공분야를 봐줄 분이 안 계셨다. 그야말로 멘붕이 왔었다.  


과 내에서 공기처럼 떠다니던 나에게, 지금의 나의 지도교수님이 “너도 알다시피 우리는 분야가 다른데, 그래도 나랑 같이 공부할래?”라고 물어줬던 그날은 온몸에 소름이 끼칠 정도의 감동을 받았다. 엄마는 이 부분에서 나의 선생님이 생명의 은인이라고 느낀 거 같다. 맞는 말이기도 하다. 내 공부 생명이 끊어질 뻔한 걸 붙잡아주었으니까.  


나의 선생님과 나는 전공 분야가 완전히 다르다. 선생님의 전공분야는 학습장애 청소년, 나의 전공분야는 자폐 어린이의 행동치료. 선생님은 질적 연구, 나는 양적 연구 방법으로 시작점이 달랐다. 선생님한테도 나를 제자로 받아야 하는 느낌은 아마도 30년 동안 배 농사를 지은 사람한테, 사과 농부가 되려는 사람을 가르쳐봐라 하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선생님은 나를 제자로 받아서, 내 분야를 확장할 수 있게 돕고, 또 본인의 전공분야와 방법론까지 가르쳐주셨다. 그녀는 인간적으로도 멋있었다. 아침 4시에 기상하여 자전거를 타고 30분을 연구실로 달려와서, 예쁜 옷으로 환복하고 그 아침 이른 시간부터 집중해서 논문을 쓰고, 오후 4시면 다시 사이클 복으로 환복, 집으로 달려가서 저녁을 먹으면서 남편과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이런 선생님의 부지런한 모습을 보는 것은 학생의 신분으로 모든지 배우려는 자세에 있던 나에게 “그래 교수란 저런 모습이야” 하는 이미지를 확실히 각인시켜주었다.  


나의 선생님은 특수교육 안에서도 질적 방법론으로 꽤 저명한 분이셨다. 사실 나처럼 외국인은 잡마켓에서, 특히나 더 보수적이라는 교육학과의 잡마켓에서 큰 경쟁력이 없다. 그럼에도 잡인터뷰에서 나는 선생님의 제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제대로 잘 배워온 사람’이라는 긍정적인 시선을 받았다. 교수직은 보통 서류심사, 전화 혹은 화상 인터뷰, 캠퍼스 인터뷰로 이어지는 3가지 인터뷰 과정을 거치는데, 우리 선생님은 내가 전화 인터뷰를 보는 날에, 선생님 연구실 건너편 방음이 잘 되는 빈 교실을 예약해주시곤 했다. 아마 같이 떨리는 마음으로 연구실에서 인터뷰가 잘 끝나기를 기다리셨겠지. 내가 한 전화 인터뷰의 끝 무렵에 바로 캠퍼스 인터뷰 초청을 받았던 날은 나보다 더 좋아해 주셨던 거 같다.


이제는 내가 교수 7년 차에 접어들면서, 여러 가지 일을 겪을 때마다 선생님을 생각한다. 박사 학생을 지도할 때, 논문을 쓸 때, 뭔가가 잘 안 풀리면, 나는 자연스럽게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본다. 또 종종 가만 앉아서, 선생님이 나에게 무슨 얘기를 해줬던가도 곱씹어본다. 최근에 나는 무기력증이 심하게 오고, 일에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았었다. 언젠가 선생님이, ‘나는 일을 하루 18시간씩 한다’ ‘나는 만성 불면증이 있어서 잠을 몇 시간 자지 못한다’, 이런 말씀을 하셨던 게 기억이 난다. 그래, 선생님도 그렇게 이 일이 힘들다는데 나처럼 보통 인간은 당연히 더 힘들겠지- 그런 결론은 위안이 되기도 한다.


선생님과의 이 계획 없는 인연에, 나는 잘도 붙어 기생해서 성장했다. 언젠가 엄마가 말한 대로 선생님이 직업적인 생명줄, 요새는 정신줄, 다 붙잡아 주고 있는 거보니 정말 나의 은인이 맞긴 한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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