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rofessor Sunny Sep 17. 2021

미국교수로 새로운 시작하기

교수생활

2010년 8월에 박사 과정을 시작해서 2015년 5월에 졸업하기까지 나는 5년을 박사 과정 학생으로 살았다. 외국인 박사 학생에게는 학비가 비싸기 때문에, 이 돈 문제 (생활비와 학비)때문에라도 나는 하루빨리 졸업을 하고 싶었다. 졸업할 때까지 운이 좋게도 조교 일을 계속할 수 있기는 했는데, 이 조교직이라는 것은 매 학기 받을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이 백 프로 없다. 그래서 나는 그런 인생의 불안감을 매일 껴안고 살고 싶지 않아, 수업과 연구들을 최대로 몰아서 하면서 빨리 과정을 끝내버리고 싶었다. 그렇지만 중간중간 인생의 드라마 스토리가 끼어들면서 졸업이 자꾸만 늦어졌다.  


어찌 됐던 나는 홀로 졸업의 프로세스를 서두르고자 하여, 2013년 말에 졸업 논문을 거의 완성하고 잡마켓에 용감히 뛰어들었다. 미국의 교수직은 보통 서류전형, 30분-1시간의 화상이나 전화 인터뷰, 마지막에 3-4명의 최종 후보의 캠퍼스 인터뷰 순으로 진행된다. 나는 그 해에 13군데의 대학에 서류지원서를 내밀었다. 미국의 대학들은 8월에 새 학기를 맞는 학교가 대부분인데, 교수직은 그 전 해의 10-12월쯤에 그 8월 새 학기 자리를 채우기 위한 채용공고가 가장 많이 뜬다. 그런데 서류를 내고 다음 해 3월이 되고 4월이 되도록, 연락이 한 통도 오지 않았다.  


그때 즈음, 내가 존경으로 따르던, 은퇴하신 할아버지 교수님께서 파트타임으로 과의 행정 일들을 도와주신다고 종종 학교에 들르시곤 하셨다. 나는 어느 날엔가 그 교수님을 붙잡고 앉아서, “도대체 연락이 안 오는 이유가 뭘까”에 대한 심도 있는 토론을 시도했다.  


내 첫 번째 질문 “ 내 (한국) 이름이 너무 이국적인가? 미국식 이름으로 개명할까? 뭐 ‘에밀리’ 이런 거 할까?”에 교수님의 답은  “네 이름 예뻐 그냥 둬- 그냥 그 이름의 너로 살아라 (be yourself)”


내 두 번째 질문 “서류가 안 들어간 거 아닐까? 다시 보내볼까?”에 교수님의 답은 “그럼 이메일이라도 보내서 받았냐고 물어봐”  


바쁜 교수님을 붙잡고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해 대면서 한참 넋두리한 꼴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한편 내 지도교수님께 물었을 때는  “그러게.. 왜 연락이 안 오지? 나는 네 연구 좋은데”로 끝.


그 해에는 정말 이메일 한통, 전화 한 통 오지 않고 끝이 났다.  




다음 해가 되었다. 또 10월이 왔다. 나는 첫 실패를 맛 본 직후부터 이를 갈며 전투적으로 논문을 써 대면서 논문의 ‘수’ 늘리기에 집중했다. 그 해는 9월 말부터 시작해서 10월 중순이 되기 전에 이미 15군데 정도의 대학에 서류 지원을 마쳤다. 와! 그런데 이번 해에는 또 미친 듯이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두 번씩 전화 인터뷰를 보기도 하면서- 물론 거의 다 망쳤지만- 너무 행복한 나머지 다크서클이 잔뜩 내려온 채로 사무실에서 막춤도 췄다. 그 해에도 존경하는 우리의 할아버지 교수님을 붙잡고 앉아서 “선생님 말씀이 맞았어요, 제 이름은 예쁘네요”라고 농담하는 여유까지 부렸었다.  


나는 그 해 10월 입덧이 극에 달했던 임신 초기였는데, 너무 긴장한 나머지 화상 인터뷰 중 헛구역질도 몇 번했다. 화면 속 상대방의 당황한 표정은 정말 압권이었지. 2014년 10월 24일에 화상 인터뷰를 봤던 대학은 전화 말미에 나에게 캠퍼스 인터뷰 초대에 대한 긍정적인 암시를 주었고, 인터뷰 방 밖에서 화상 인터뷰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지도교수님은 득달 같이 달려와 축하해주셨었다.  


캠퍼스 인터뷰는 5년여 전만 해도 (교육학과는 보통) 2박 3일의 여행을 떠나야 했다. 지금은 코비드 문제도 있고 해서 하루의 8시간 정도를 full스케줄로 잡아 화상으로 끝내는 추세로 접어들었지만, 코비드가 없었을 때는 비행기를 타고 가서 공항에 내리자마자부터가 이 인터뷰의 시작이었다. 인터뷰 관계자 중 한 명이 나를 공항으로 픽업을 나와서, 그날 저녁 만찬, 학과장과의 조찬, 대학장과의 1:1대면 미팅, 연구 발표, 가끔은 시범수업도 선보여야 했고, 대학원생들과의 만남, 대학생들과의 만남, 과 내의 모든 교수들과의 만남, 뭐 말도 못 하게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모든 식사를 나를 인터뷰 보러 나온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한다. 이 일을 2박 3일로 한 뒤, 그 학교 관계자인 누군가가 나를 공항 입구에 내려주면 인터뷰가 끝난다. 공항에 캐리어와 함께 덩그러니 서있던 나는,  마치 방금 미스코리아 출전했다가 나온 사람처럼, 입꼬리가 한없이 올라가 있다. 인터뷰를  잘 보고 싶었던 나는 나도 모르게 끊임없이 미소를 지었나 보다. 이미 부자연스럽게 올라간 입꼬리가 경련을 일으키며 내려가길 거부했다.  


나는 딱 두 번의 캠퍼스 인터뷰를 갔다. 첫 번째에서는 내가 임신 중이라는 사실을 쉬이 보고 결혼 전에 입던 타이트한 스커트를 입은 것이 문제가 됐다. 연구 발표 중 더 자연스레 설명해 보겠다는 열정으로 한 다리를 뻗었다가 스커트 뒤가 시원하게 쫙 찢어짐과 동시에 망했음을 인정했다. 두 번째 캠퍼스 인터뷰는 느낌이 좋았다. 모든 분들이 반겨주시고 나도 그 2박 3일을 나름 잘 버텨냈다. 그런데 임신 초기에 이렇게 비행기를 여러 번 타고 다른 주로 이동해서, 긴장상태로 장기간의 인터뷰를 두 번이나 연달아하다 보니 체력이 도저히 받쳐 주질 못했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내내 잠을 잤다. 거의 두 해 동안 이 인터뷰 하나만 바라보고 열심히 발버둥 쳤는데, 그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아! 올해는 더 이상은 시도할 수 없겠구나’ 깨닫고, ‘그래 안되면 뭐 내년에 또 하지’ 하고 시원하게 마음을 비웠다.


내가 마음을 비우고 집으로 돌아오던 그날, 아부다비에서 일하던 남편도 휴가를 맞아 나를 만나러 미국으로 들어왔다. 나는 입덧이 극에 달아, 너무 먹고 싶던 “짬뽕”을 먹으러 차를 3시간 타고 한인타운이 있는 시카고로 내려갔다. 맛도 없는 그 짬뽕을 국물까지 해치우고 내 입덧도 시원하게 떠났다.


마음을 비우고 남편과 그냥 놀았다. 더 이상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인정하니 차라리 마음이 개운했다. 기회는 또 있을 테니까. 며칠 후 나는 남편과 다시 시카고로 이동, 부모님이 있는 곳에서 휴식하러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를 타기 위해 게이트 앞에서 남편과 대기를 하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Hello? Sunny?” 나는 큰소리로 ‘그래 내가 써니다!’를 외쳤다. 느낌이 빡 왔다. ‘나는 됐구나!!!!!!!!’ 그 전화는 그 두 번째 인터뷰를 봤던 곳의 학장님이셨다. ‘너에게 오퍼를 주겠노라, 지금 한국 가는 거면 잘 다녀오고 다녀와서 자세한 이야기를 하자꾸나’. 정말 생애 최고로 감동적인 한국행이었다.

2014년 12월 10일, 나는 이렇게 교수가 되었고, 그 질긴 유학생활이 끝났다.     




피 말리는 여정 끝 회식 고고!

이전 13화 미국 대학 지도교수님과 지내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