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모두가 다르다’는 말은
더 이상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건 너무 당연한 말이 되었고,
이제 사람들은 그 ‘다름’을 이해하기보다
‘정답’을 강요한다.
“너는 틀렸어.”
“내 말이 맞잖아.”
이 짧은 문장들이
얼마나 많은 관계를 무너뜨렸는지 모른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대화를 ‘이겨야 하는 게임’처럼 생각한다.
논리로 상대를 설득하는 것이 곧 지성이라 착각하고,
감정을 내세우면 미성숙하다고 단정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진짜 지성은 ‘이해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이해하지 못함을 인정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사람은 결국 자신의 경험 안에서만 이해한다.
다른 이의 고통, 다른 이의 슬픔,
다른 이의 가치관을
완전히 느낄 수는 없다.
그렇기에 이해란
‘같은 경험을 한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감정이다.
문제는,
사람들은 그걸 모른 척한다는 것이다.
“나는 네 입장을 이해해.”
이 말은 대부분 진심이 아니다.
진짜 의미는 이렇다.
“나는 네 입장을 내 경험 안에서 해석했어.”
이해란 결국 ‘해석의 한계’다.
그 한계를 모르기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싸운다.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할 때,
사실은 이해되지 않아서 미워하는 것이다.
논리로 설명되지 않으니까,
감정으로 공격하게 된다.
그게 인간의 본성이다.
하지만 모든 싸움의 시작점은 같다.
“나는 저걸 겪어보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해되지 않음’을 두려워할까.
그냥 모르면 모르는 대로 두면 되는데,
굳이 상대를 설득하려 하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무력감’ 때문일 것이다.
이해되지 않는 상대 앞에서
인간은 불안을 느낀다.
그 불안을 덮기 위해
우리는 신념을 내세우고,
논리를 꺼내고,
정답을 주장한다.
그건 결국 두려움의 다른 이름이다.
나는 이제 이렇게 생각한다.
이해는 설득의 결과가 아니라,
공존의 태도라고.
우리는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비로소 평화가 시작된다.
모든 사람은 서로의 세계를
잠시 스쳐 지나갈 뿐이다.
그 세계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존재를 ‘있음’으로 받아들일 수는 있다.
그게 진짜 존중이고,
진짜 대화다.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다.
다만, 존재를 부정하지는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