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수가 만든 틀에는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반면 개인의 언행에는
“어째서”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이것은 마치 사회적 반사신경 같다.
다수의 행동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소수의 행동은 곧장 분석과 평가의 대상이 된다.
“저 사람은 왜 저래?”
이 한 문장은 타인을 향한 호기심인 동시에,
우리 사회의 가장 교묘한 폭력이다.
물론 모든 경우에 해당되진 않는다.
하지만 대체로 사회는 그렇게 작동한다.
집단의 규칙에는 쉽게 의문을 품지 않는다.
회사, 학교, 종교단체, 모임, 심지어 가족까지-
우리는 그 안에 들어가는 순간
어느 정도 ‘따르는 것’을 전제로 한다.
“다들 그렇게 하니까.”
“예전부터 그래왔으니까.”
이 말이 갖는 힘은 생각보다 크다.
누군가가 새로운 질문을 던지면
그는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으로 보인다.
질문은 불편함을 낳고,
불편함은 대체로 ‘조용히 묻히는 편이 낫다’는
판단으로 귀결된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자신의 생각을 접는다.
말하고 싶은 게 있어도 삼키고,
틀렸다는 확신이 있어도 침묵한다.
유대감이라는 이름으로 감정을 숨기고,
조직의 안정이라는 명분으로 판단을 보류한다.
“로마에서는 로마의 법을 따르라.”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
우리는 이런 말을 자주 듣는다.
맞는 말이다.
그들의 법과 질서 안에 머물겠다면
그들의 규칙을 존중해야 한다.
하지만 그 말속에는 묘한 냉소가 숨어 있다.
“이견은 필요 없다.
말없이 따라오라.”
사회는 언제나 효율을 우선시한다.
질문보다 순응이 빠르고,
의심보다 침묵이 안전하다.
그래서 나 역시 한동안은 그렇게 살았다.
말하지 않는 법,
감정을 눌러두는 법,
나를 사회의 톱니 중 하나로 만드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깨달았다.
집단의 질서가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그렇다”라고 말하는 순간,
사람들은 사고를 멈춘다.
‘다수의 의견’은 그 자체로 일종의 면죄부가 된다.
다수가 한 행동에는 “왜”라는 질문이 생략되고,
소수가 한 행동에는 “어째서”라는 비판이 따라붙는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오래된 사회적 불균형이다.
같은 사과를 보고도
누군가는 “맛있겠다” 생각하고,
누군가는 “저 소리 싫은데”라고 느낀다.
이 단순한 차이에서 세상의 모든 갈등이 시작된다.
인간은 누구나 다른 감각, 다른 기억,
다른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나 사회는 이 차이를 표준화된 정상으로 묶어버린다
다름을 이해하기보다는
틀림으로 규정하는 것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쉽다’는 이유 하나로,
우리는 수많은 관계를 잃고,
수많은 가능성을 포기한다.
미국의 심리학자
데이비드 로젠한(David Rosenhan)의
유명한 사회실험이 있다.
그는 8명의 정상인을 모집해
“제정신으로 정신병원에 들어가기” 실험을 했다.
그들은 단지 “공허함을 느낀다”라고 말했을 뿐인데,
모두 정신질환자로 진단되었다.
의사들은 그들의 행동을 분석하고,
그 안에서 ‘이상 신호’를 찾아내려 애썼다.
그들은 이미 ‘환자’였기 때문이다.
로젠한은 이 실험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비정상은 개인이 아니라,
그것을 정의하는 시스템 안에 있다.”
나는 이 말을 곱씹었다.
우리가 믿는 ‘정상’이란
사실 누군가가 임의로 정해놓은 기준일 뿐이라는 사실을
비슷한 맥락에서 떠오른 사례가 있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광기의 역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광기는 인간이 만든 구분선이다.
우리는 이성이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
그 밖의 모든 것을 광기로 부른다.”
이 문장은 섬뜩하게 정확하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는 과학이 아니라 사회가 만든다.
다수가 공감하지 못하면 그건 ‘비정상’이 되고,
공감하는 순간 ‘정상’이 된다.
만약 내가 외눈박이 행성에 떨어진다면 어떨까?
나 혼자 두 눈을 가진 채 “나는 정상이다”라 외친다면,
그곳 사람들은 아마 이렇게 말하겠지.
“이상한 인간이 왔다.”
그렇다.
정상은 절대적 개념이 아니다.
‘수의 힘’에 의해 결정되는 상대적 상태다.
그래서 나는 이런 생각을 자주 한다.
혹시 우리가 ‘비정상’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그들의 세계에서는
우리처럼 ‘정상’ 일지도 모른다고.
그들은 우리를 보며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이 사람들, 이상해.
왜 저렇게 눈치를 보며 살아?”
나는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이해되지 않을 때
“왜 저래?” 대신
“저 사람은 어째서 저렇게 행동할까?”
라고 묻는다.
그 질문 하나가 시선을 바꾼다.
이해되지 않는 행동 뒤에는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 상처, 기억이 숨어 있다.
어쩌면 그가 말하지 못한 트라우마가,
그의 표정과 언행으로 번역되어 나오는 것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늘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사람들은 그를 “짜증 나는 사람”, “독한 사람”이라 부른다.
하지만 그가 늘 경계하고 방어하는 이유가
“과거에 지나치게 믿었다가 상처받은 경험”이라면?
그의 냉소는 단순한 성격이 아니라,
자기 보호의 또 다른 방식일 수도 있다.
또 어떤 이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있기를 좋아한다.
우리는 그를 “무뚝뚝하다”라고 판단한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타인을 깊게 관찰하고,
그 관찰 속에서 세상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인간은 표면으로 드러나는 언행보다
훨씬 복잡한 내면을 가지고 있다.
그 내면의 결을 이해하지 않고 내리는 판단은,
언제나 오만하다.
사실, 우리 모두는 크고 작게
자신만의 ‘정신의 틈’을 가지고 살아간다.
어떤 이는 완벽을 향한 강박을,
어떤 이는 인정받고 싶은 열망을,
어떤 이는 끝내 버리지 못한 후회를 품고 있다.
그 차이의 정도가 다를 뿐,
그 누구도 완전히 온전하진 않다.
그러니 어쩌면,
우리가 서로 다른 개성을 ‘특별함’이라 부르는 대신
‘각자의 방식으로 앓고 있는 병’이라 정의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지 모른다.
누군가는 그 병을 감추고 살아가고,
누군가는 그것을 작품으로, 언어로,
표정으로 표현할 뿐이다.
나는 이제 사람을 볼 때,
그의 ‘정상성’보다 그의 ‘맥락’을 본다.
정상이라는 말은 언제나 타인의 기준에서 나온다.
맥락은 그 사람의 시간에서 나온다.
“저 사람은 이상해.”
이 말 뒤에는
“나는 저 사람의 맥락을 모른다.”
라는 말이 숨어 있다.
그러니 누군가를 이상하다 단정하기 전에,
그가 어떤 세계에서 살아왔는지
한 번쯤 상상해보려 한다.
그 상상은 이해의 첫걸음이 된다.
다수가 만든 틀을 의심하지 않으면서
소수의 행동만 비판하는 사회 속에서,
‘정상’이라는 단어는 이미 권력이 되었다.
그 권력은 언제나 “다수의 안도감”을 위해 존재한다.
“우리 대부분은 괜찮다.”
이 한 문장을 믿기 위해
누군가는 ‘비정상’이라 불린다.
결국 중요한 건,
누가 정상인가가 아니라
서로 다른 정상들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는가이다.
그것이 내가 믿는
가장 인간적인 정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