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람들의 걸음은 빠르다.
말의 속도, 생각의 속도, 감정의 변화까지.
모든 것이 순식간에 변하고,
뒤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화는 짧아졌고, 감정은 짙어졌으며,
판단은 즉흥적이 되었다.
한 문장을 읽고, 그 문장 속에서 사람을 정의한다.
한 장면을 보고, 그 사람의 모든 삶을 추측한다.
“그 사람은 이런 사람이야.”
“그 말은 그런 뜻이겠지.”
확신은 빠르지만 근거는 얕고,
그 얕음이 오히려 당당함으로 포장된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가장 빠른 시대이자 가장 깊이가 없는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언제부턴가 대화는 이해를 위한 행위가 아니라
신념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 되었다.
누군가의 말을 듣는 시간보다
내가 반박할 말을 준비하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이해하려는 노력’은 사라졌고,
‘이기려는 태도’만 남았다.
이건 정치 이야기가 아니다.
철저히 인간에 관한 이야기다.
모두가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확신에 취해 있고,
다른 생각을 ‘틀렸다’고 규정한다.
서로의 생각이 부딪히면, 대화는 싸움이 되고,
결국 남는 건 피로감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점점 ‘생각하지 않기’를 선택한다.
생각하지 않으면 상처받지 않으니까.
다름을 인정하면 외로워지니까.
그 결과, 이 사회는
‘빠르게 판단하는 사람들’과
‘조용히 입을 다문 사람들’로 나뉘었다.
나는 이 현상이 무섭다.
말하지 않는 평화는, 평화가 아니라 마비다.
감정이 사라진 게 아니라, 표현의 용기가 사라진 시대.
그게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얼마 전, 이오네스코의 희곡 『코뿔소』를 다시 읽었다.
대학 시절엔 그저 ‘부조리극’으로만 이해했다.
하지만 지금 읽으니,
이건 너무 현실적인 다큐멘터리였다.
이오네스코가 그린 세계는 간단하다.
한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코뿔소로 변해간다.
처음엔 그들을 이상하게 보던 사람들도
점점 “다들 그렇게 되는데,
나만 다르면 이상하지 않을까?” 하고
스스로 코뿔소가 되어간다.
그 장면을 읽으며 등골이 서늘했다.
그건 단순히 ‘전체주의의 풍자’가 아니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SNS 시대,
다수의 공감에 휩쓸리고,
‘좋아요’의 개수로 정의되는 개인의 가치.
이건 현대판 코뿔소가 아니고 무엇일까.
그 작품의 주인공 베랑제는
끝까지 코뿔소가 되지 않는다.
그는 외롭고 두렵다.
하지만 끝까지 인간으로 남기를 선택한다.
그 대사는 오래 남았다.
“나는 인간이기를 원한다.
나 혼자라도 인간으로 남겠다.”
이 문장이 지금 내 마음을 찔렀다.
“나 혼자라도 인간으로 남겠다.”
그 말이 이렇게 아프게 다가온 적이 없었다.
지금 우리에게 ‘코뿔소화’는 다른 형태로 존재한다.
정치적 전체주의가 아니라,
사회적 동조주의로 나타난다.
“남들이 그렇게 하니까.”
“요즘은 다 그렇게 살아.”
이 말이 한 개인의 신념을
무너뜨리는 가장 흔한 주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집단의 시선에 철저히 묶여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줄을 스스로 목에 걸고,
그 줄이 꽉 조여올 때마다 ‘나는 안전하다’고 착각한다.
‘생각하기’를 포기한 인간.
이건 단지 게으름이 아니라,
스스로를 지우는 가장 완벽한 방식이다.
SNS를 보면 매일 새로운 코뿔소들이 생겨난다.
누군가가 한마디 하면,
그 한마디는 순식간에 수천 명의 코로 들이받는다.
“생각하지 말고, 같은 방향으로 달려.”
그 속도감에 짓눌려서, 사람들은 점점 말을 삼킨다.
생각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표현할 용기가 사라진다.
나는 그 무리에 속하지 않는다.
하지만, 완전히 벗어나 있는 것도 아니다.
어딘가 중간쯤에 서 있다.
소리를 내면 부딪히고,
가만히 있으면 사라질 것 같은 공간.
때로는 나도 그 무리에 섞이고 싶다.
함께 달리면 덜 외롭고, 덜 무섭다.
그러나 그 속에 들어가면 나 자신이 희미해진다.
생각하지 않는 편안함과
생각하는 고통 사이에서 매일 흔들린다.
이건 모호한 감정이다.
분노도 아니고, 체념도 아니다.
그냥 어딘가 불안하고, 설명할 수 없이 쓸쓸하다.
내가 인간으로 남고 싶어 할수록,
더 인간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해 생각해야 하는데,
그 ‘생각’이 오히려 나를 고립시킨다.
그게 지금 내가 사는 세상의 역설이다.
요즘 나는 감정이 자주 흐릿하다.
화가 난 것도 아니고, 행복한 것도 아니다.
모든 감정이 한 겹씩
비닐로 덮여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람을 만나도, 뉴스를 봐도, 글을 써도
어딘가에서 스스로
감정의 강도를 줄이는 나를 발견한다.
“이 정도로는 괜찮아.”
“굳이 깊게 생각하지 말자.”
그게 나를 보호해 주는 줄 알았는데,
이제는 나를 무디게 만든다.
이오네스코가 말한 코뿔소들은
어쩌면 바로 이런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자신을 지키려다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들.
생각을 멈추며 평화를 얻었지만,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은 존재들.
나는 그런 인간이 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동시에,
그렇게 살지 않으면 너무 피곤한 세상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서야 할까.
무리 밖에서, 무리 안을 바라보며
이 모호한 감정을 끝없이 곱씹고 있다.
외로움과 평화 사이,
무기력과 분노 사이,
그 어디쯤에서 매일 흔들리며 서 있다.
인간으로 산다는 건,
생각하고, 의심하고, 질문하는 일이다.
그러나 요즘은 그게 용기가 아니라
피곤함으로 받아들여진다.
다른 생각을 한다는 건
다른 목소리를 낸다는 뜻이고,
다른 목소리를 낸다는 건
언제든 공격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용히 무리의 속도에 맞춘다.
나는 그 속에서 자주 고민한다.
‘과연 생각하는 게 옳은 걸까?’
‘그냥 적당히 살아가면 안 될까?’
하지만 생각하지 않으면,
나는 나 자신이 아니게 된다.
결국 인간다움이란
이 모순을 견디는 힘일지도 모른다.
고립을 감수하면서도,
생각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일.
그게 인간으로 남는다는 뜻 아닐까.
나는 이 세상이 두렵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무섭다.
그들이 내게 “함께 가자”라고 손을 내밀 때,
그 손을 잡지 않으면 이상한 사람이 된다.
하지만 잡으면, 나는 사라진다.
요즘은 이렇게 자문한다.
“나는 도대체 어디에 속해야 할까?”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그저, 생각을 멈추지 않으려 애쓸 뿐이다.
나는 속해 있지 않다.
그렇다고 떠난 것도 아니다.
그 중간에서,
생각이란 것을 붙잡고 버티고 있다.
그게 나의 저항이자,
나의 생존 방식이다.
요즘 사람들은 너무 빠르게 움직여. 그리고 타인이 하는 일에 쉽게 휘둘리지. 대화라는 건 언제부터인가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게 아니라, 자기 신념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 되어버렸어. 이해와 존중은 오래전에 사라졌고, 지금 남은 건 단정 짓기와 판단뿐이야. 인간이란 본래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존재잖아. 무언가의 원인을 끝까지 파고들고,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아야 하는데 말이야. 그런데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다 같이 생각을 포기했어. 너도 그렇다니까 나도 그렇고, 네가 고개를 끄덕이면 나도 같이 끄덕이는 식으로. 그렇게 생각은 사라지고, 그저 방향만 남았어. 모두 같은 쪽을 보며 달려가는 거지.
이제 이곳에서 ‘다르게 생각한다’는 건 위험한 말이 되어버렸어. 모두가 같은 박자를 맞추고 있을 때, 혼자 다른 박자를 치면 비정상이 되는 세상이야. 그래서 나도 결국 그들처럼 고개를 숙였어. 고개를 들면 튀어 보이니까. 튀면 부딪히니까.
나는 요즘 우리가 코뿔소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해. 거칠게 달리면서도,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는. 눈앞의 무리를 따라가며 먼지를 일으키는. 그 속에서 인간이기를 선택한다면, 과연 이곳에서 나는 정상으로 보일 수 있을까? 아니겠지. 다들 달리는데 혼자 멈춰 서 있으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으니까.
모두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같은 리듬으로 고개를 흔드는 이곳에서는 조용히 따르는 게 안전하대. 그래야 부딪히지 않으니까.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한 사람이 멈춰 서면 모두가 동시에 그를 바라봐. 그 순간의 정적이 무섭도록 선명하거든.
그래서일까. 나는 아직도 가끔 묻는다. 인간으로 남는다는 건, 결국 이 무리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또 다른 형태의 코뿔소가 되는 일일까. 아니면 그저, 잠시 숨 고르며 나를 잃지 않으려는 노력일까. 광기에 휩쓸린 무리 속에서 그 질문조차 사치로 느껴질 때면, 나도 모르게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