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어른이 되면서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말투를 다듬고, 표정을 고치고, 불편을 만들지 않기 위해 애쓴다. 관계가 무너지지 않도록 부드러운 면만 꺼내어 들고,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덜 남기길 바라는 마음으로 작은 배려를 계산한다. 어른이 된다는 건 그렇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법’을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나는 그 반대쪽에 서 있다. 좋은 사람이 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무심해지려고 한다. 정서적 교감을 줄이고, 마음의 결을 타인에게 내어주지 않으려고 조금씩 거리를 둔다. 얽히지 않으면 덜 피곤하고, 덜 상처받는다는 걸, 나도 어느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멀어지려는 쪽을 선택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그런 나를 두고 다정하다고 말한다. 편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나는 단지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렇다면 그렇게 해”, “응, 너를 존중해” 같은 말만 건넸을 뿐인데, 그 말이 그들의 귀에는 친절의 형태로 들리는 모양이다. 내가 한 발 물러선 거리를 그들은 온기로 착각한다. 내가 비워둔 공간을 배려라고 읽는다.
나는 그저 말하지 않았을 뿐인데, 그들은 그 침묵을 이해로 오해한다.
가끔 생각한다.
정말 좋은 사람은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내가 뭘 하려 하면 ‘괜찮을까?’
하고 함께 고민해 주는 사람,
귀찮을 정도로 의견을 더해주는 사람,
감정의 온도를 맞추기 위해 한 번 더 묻고,
한 번 더 확인하는 사람.
요즘 기준으로는 오지랖, 잔소리,
꼰대라 부르며 피하려 하는 사람들.
그러나 실은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누군가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일지 모른다.
우리는 마음을 내어주는 이들을
부담스럽다고 밀어내면서,
마음을 감추는 사람을 편하다고 끌어당긴다.
이 아이러니 속에서 나는 종종 멈춰 서게 된다.
나는 무심해지려고 했을 뿐인데
그들은 그 무심을 다정이라고 부른다.
나는 선을 그었을 뿐인데
그들은 그 거리를 편안함이라 말한다.
어쩌면 사람들은 나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아니라,
자신이 보고 싶은 방향으로 읽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때때로 이 관계들 속에서
묘한 고독과 묘한 자유가 동시에 스며든다.
그 두 감정이 뒤섞인 온도가,
지금의 나에게는 이상하게 잘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