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자에게 보내는 편지

'어린 왕자', 생텍쥐베리

by 고요


어린 왕자를 처음 만난 건, 법정스님의 '스스로 행복하라'를 통해서였다.

어린 왕자에게 쓴 법정 스님의 절절한 편지 한 통이 내 마음을 울렸다.



32467067798.20230128071323.jpg




photo-1566125882500-87e10f726cdc.jpg

© katemacate, 출처 Unsplash





어린 왕자!

지금 밖에는 가랑잎 구르는 소리가 들린다. 창호에 번지는 오후의 햇살이 지극히 선하다.

이런 시각에 나는 티없이 맑은 네 목소리를 듣는다. 구슬 같은 눈매를 본다. 하루에도 몇 번씩 해 지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을 그 눈매를 그린다. 그리고 이런 메아리가 들려온다.

"나하고 친하자, 나는 외롭다."

"나는 외롭다..... 나는 외롭다..... 나는 외롭다......"


어린 왕자!

이제 너는 내게서 무연한 남이 아니다. 한 지붕 아래 사는 낯익은 식구다. 지금까지 너를 스무 번도 더 읽은 나는 이제 새삼스레 글자를 읽을 필요가 없어졌다. 책장을 훌훌 넘기기만 해도 네 세계를 넘어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행간에 씌어진 사연까지도, 여백에 스며 있는 목소리까지도 죄다 읽고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


그리고 네 목소리를 들을 때 나는 누워서 들어. 그래야 네 목소리를 보다 생생하게 들을 수 있기 때문이야. 상상의 날개를 마음 껏 펼치고 날아다닐 수 있는 거야. 네 목소리는 들을수록 새롭기만해. 그건 영원한 영혼의 모음(母音)이야.


아, 이토록 네가 나를 흔들고 있는 까닭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건 네 영혼이 너무도 아릅답고 착하고 조금은 슬프기 때문일 것이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디엔가 샘물이 고여 있어서 그렇듯이.

네 소중한 장미와 고삐가 없는 양에게 안부를 전해다오.

너는 항시 나와 함께 있다. 안녕 (1971)




32506091444.20230117163552.jpg


어린 왕자로 인해 법정스님의 세상이 흔들렸고, 그가 쓴 편지로 인해 내 세상도 흔들렸다. 이토록 절절한 편지를 쓰게 만든 어린 왕자는 도대체 누구일까. 사무치는 궁금함에 어린 왕자를 직접 읽었지만, 당시 나는 어린 왕자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그저 행성에 갇힌 왕이었고, 허영꾼이었고, 술주정뱅이, 사업가, 가로등지기, 지리학자였다. 나의 행성에 갇혀 다른 행성에 가볼 생각 따윈 전혀 하지 못하는, 정현종님의 말을 빌리면 '섬에 갇힌 자'였다.



사람들 사이엔 섬이 있다.
그 섬에 가보고 싶다.
'섬', 정현종






당시엔 나도 나만의 행성에 갇혀 있었다. 보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외치면서도, 보이는 것이 더 중요하게 행동하며. 오직 어린 왕자만이 다른 이의 행성에 방문할 수 있다. 눈물나게 맑은 순수함으로 타인의 세상에 대한 진실된 궁금함을 가진 자만이 갈 수 있는 세상. 고독의 시간에 갇히고 나서야, 다시 어린 왕자를 마주했다. 그리고 이제서야 어린 왕자에게 편지를 쓸 수 있게 되었다.





photo-1531604250646-2f0e818c4f06.jpg

© emulsio, 출처 Unsplash



어린 왕자에게.

노을을 사랑하는 어린 왕자야, 너를 생각하면 의자에 앉아 노을 지는 풍경을 바라보는 너의 모습이 떠오른단다. "사람은 너무 슬플 때 해 지는 걸 보고 싶거든..."이라고 말하던 네 말을 곱씹어 본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노을을 바라보며, '너는 어떤 슬픔을 삼키고 있는 걸까.' '네 슬픔의 근원은 무엇일까.' 생각해보았어.


어쩌면 너의 슬픔은 보이지 않는 걸 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어. 사실, 보이지 않는 걸 보는 사람은 외롭단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에 쉽게 매료되고, 좋아하지. 보암직한 옷을 입고, 비싼 차에 넓은 집에서 살기 위해 애쓰며, 보이는걸 치장하느라 바쁘단다. 먹음직한 음식을 찾아 다니며, 자랑하느라 바쁘지. 하지만 보이지 않는 걸 보는 사람은 그럴 시간이 없어. 길을 가다가 발견한 작은 풀꽃 하나의 이야기를 듣느라 걸을음 떼기가 어렵지. 어느날 운명처럼 너에게 다가온 장미 꽃 한송이가 너의 세계로 들어 온 것처럼 말이야.


'나랑 친하자, 나는 외롭다'라며 다가오는 너에게 나의 세계를 활짝 열어 주고 싶었어. 사랑해마지 않았던 장미가 실은 수천개의 흔한 장미 중 하나였다는 걸 깨닫고 눈물을 흘릴 때, 내 마음도 쿵 내려 앉는 것 같았지. 하지만, 여우를 만나 깨닫게 돼. 그 장미는 네가 길들인 장미였다는 걸. 이미 수천개의 흔한 장미와는 다른 장미가 되었다는 걸 말이야. 나에게 너도 흔한 남자아이 중 하나가 아니야. 잃어버린 나의 세계를 마주하게 해 준 너는 나의 어린 왕자다.


어쩌면 너는 어린 날의 나였을지도 몰라. 네가 천천히 죽어갔던 그 날처럼, 어린 날의 나도 나조차 모르게 천천히 죽어갔다. 길에서 만난 친구들을 만졌다가, 손이 더러워진다며 혼났던 그날. 다르게 행동하면, 친구들이 겁을 먹는다는 걸 깨달았던 그날. 아, 어쩌면 피아노를 치다가 악보대로 치치 않는 다며 선생님께 손을 맞았던 그날일지도 모르겠어. 그런 날들에 나는 너처럼 천천히 시들어 갔다.


어린 왕자야,

'나랑 친하자. 나는 외롭다' 다시 나의 세계로 찾아와주렴. 나에게로 다가와 우리 서로를 길들이자. 벼가 무르익는 가을 논을 보며 너의 머리칼을 떠올리고, 노을을 바라볼 땐 너의 슬픔이 생각날 수 있도록. 어쩌면 그 일은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일 같다는 생각이 들어. 숨을 쉬는 것은 결국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가느냐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나와 함께 매일 이야기를 만들어가자. 어린 왕자야 나의 세계로 놀러오렴. 나는 외롭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서두르지 않고 다정하게 말 거는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