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생각하며, 민들레의 이야기.
내가 사는 곳은 평평한 흙길로 덮여 있는 오름. 매일 아침 눈을 뜨면 형형색색의 신발들이 눈을 사로잡곤 하지.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다양한 색깔들이 정신 없이 오가는 걸 봐. 가끔씩 목소리도 들려와. 빨간색 신발은 남편 때문에 화가 많이 났나봐. 파란색 신발은 직장에서 승진을 못 했대. 곁에 있는 다른 신발들에 서로에게 다가와 위로해주고 있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대화도 들려와.
'내려가면 오늘은 두루치기를 먹으러 갈까?'
'두루치기? 잘하는 집 알아?'
'응, 내려가서 10분만 걸으면 돼. 유명한 집이더라고. 엄청 맛있어.'
'완전 좋지! 얼른 가자!!'
이런 대화가 들리면 신발은 엄청 가벼워지고, 목소리에선 설렘이 묻어나와. 정말 신기하지. 도대체 두루치기가 뭔데 그럴까? 나도 한번 먹어 보고 싶어. 그러면 내 발걸음도 가벼워질 수 있을까? 사실 나는 걸어 본 적이 없아. 땅 속에 뿌리를 박고 살아가니까. 걷지 않아도 괜찮아. 수많은 벌레 친구들이 오고가며 다른 세상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땅과 연결된 덕분에 저 멀리 땅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모두 알 수 있거든.
나는 내 삶도 충분히 만족스러워. 그런데 형형색색의 신발들을 볼 때면, 가끔은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뿐이야. 만일 내가 걷게 된다면, 나는 멈추지 않고 땅 끝까지 걸어볼거야. 걷다가 곳곳에 있는 내 친구 민들레들을 만날거야. 내 친구들은 대부분 산 아래 도시에 살고 있거든. 다들 홀씨가 되어서 도시로 날라간 친구들이지. 따분한 산 속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날아간 친구들이야. 도시는 더 힘들다던데, 자유를 찾아 떠난거지. 그게 진짜 자유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나도 홀씨가 되면 도시로 가보려고.
요즘들어 삶이 조금 따분해졌어. 신발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거든. 어쩌다 한 두개의 신발들이 보이지만, 그 신발들은 전부 가라앉아 있어. 가벼운 말소리도 들리지 않아. 신발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걸까? 신발들이 다 어디로 사라진거지?
아마도 얼마전 저 멀리서 땅이 절규하는 소리가 들리던데, 그거랑 관련되어 있는 것 같아. 땅과 주위의 벌레들과 나무와 내 친구 민들레들도 전부 절규하는 소리가 들렸어. 나는 너무 깜짝 놀라서 무슨 일인가 싶었어. 이 친구들은 몇날 며칠을 울며 절규했어. 그렇게 슬픈 소리는 태어나서 처음이었어.
신발들은 어느 날과 다름 없이 각자 자기 갈 길을 가고 있었어. 그녀의 신발도 그 중 하나였지. 그녀는 매일 이곳을 찾아 산책을 한 후 출근을 해. 그날도 짧게 산책을 한 후 출근할 생각이었지. 그런데 별안간 처음 본 낯선 신발이 평화로운 그녀의 걸음에 와다다 달려드는게 아니겠어?
다들 멈추라고, 그만 두라고 소리쳤어. 하지만 우리들의 목소리가 신발에게 들릴리가 없지. 우리는 늘 말하고 있는데 말이야. 땅 속으로 그녀의 피가 스며들어왔어. 땅은 온 몸으로 그녀의 피와 눈물을 받아들였어. 할 수만 있었다면 있는 힘을 다해 그녀를 안아주었을거야. 얼마나 아프고 무서웠을지 땅은 곁에서 다 보았거든. 나무도 할 수만 있다면 가지를 부러뜨려서라도 그녀를 보호해주고 싶었을거야. 나무도 위에서 다 내려다 보았거든. 그날 모두가 그 장면을 보았어. 땅도, 나무도, 벌레들도, 바람도, 하늘도 심지어 공기까지도.
그날 이후 땅은 한 참을 말을 잃었어. 땅은 이곳에서 흘린 수많은 피와 눈물을 모조리 기억해. 그동안 땅이 흘린 눈물이 지금의 모래알이 되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지. 이번에도 땅은 그녀의 고통과 아픔 앞에 아주 오래 아파할거야. 모래알은 더 많아지겠지.
땅과 함게 그날 그 장소에 함께 있던 다른 친구들도 모두 슬픔에 잠겨 있어. 그 친구들의 슬픔은 공기와 땅을 타고 우리에게도 전해졌어. 그리고 더 이상 신발들도 보이지 않았지. 왠지 신발들도 함께 아파하느라 그런 것 같아. 너무 아프고 무서워 걷지 못하게 된게 아닐까 싶어. 산책을 빼앗겨 벼린 신발들을 꼭 껴안아주고 싶어. 내가 민들레 홀씨가 되어 자유롭게 날아가게 된다면, 신발들을 다 찾아갈거야. 그리고 말해줄거야. 너의 산책을 되찾으라고. 너가 잘못하지 않은 일에 움츠리지 말라고.
이 글은 신림동 성폭행 사건으로 사망하신 피해자를 생각하며 쓴 글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동네는 그 현장과 멀지 않습니다. 저 역시 그곳을 산책하곤 했지요.
어쩌면 그 현장에 그녀가 아니라, 내가 있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이 몸서리치게 아픕니다.
내 대신, 우리 대신 희생당한 그녀를 조금이라도 안아주고 싶었습니다.
그날 이후 산책하는 이들의 숫자가 현저히 줄었습니다. 다른 산책길에서도 사람을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우리 모두 그 일이 내 일이 될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슬픔에 잠겨버린 것 같습니다.
산책을 빼앗겨버린 것 같습니다. 우리의 평범한 일상을 되찾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다시 민들레가 형형색색의 신발들을 볼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잘못은 그들이 했는데, 다른 이들이 움츠려야하는 것이 마음이 아픕니다.
부디, 평화롭고 안전한 세상에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