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반짝이는 워터멜론'과 우리 아빠
'반짝이는 워터멜론'
농인 가족 사이 유일한 비장애인을 '코다'라고 부릅니다.
주인공 '은결'이는 코다입니다. 엄마, 아빠, 형 모두 농인이지만 은결이만 비장애인입니다.
은결이는 가족과 가족 사이, 가족과 세상을 연결해주는 통로입니다.
자신이 잘 못하면 장애인인 부모님이 욕을 더 먹게 될까봐 은결이는 매사가 조심스럽습니다. 공부는 물론 모든 것을 잘 해내는 아이로 성장했지요.
이토록 착한 은결이에게도 말 못할 고민이 있습니다. 은결이의 꿈은 밴드 기타리스트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은결이가 의대에 갈 거라고 철석 같이 믿고 있습니다.
결국 아버지와의 갈등이 터져버리고, 은결이는 홧김에 아끼는 기타를 팔아버립니다.
기타를 팔고 나오는 길, 길이 어딘가 이상합니다. 간판도, 사람들의 옷차림도 모두 너무 올드합니다.
갑자기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레트로가 유행하기 시작한 걸까요?
맙소사, 레트로가 아니라 1995년이라고합니다. 2023년의 18살 은결이는 1995년으로 타임슬립합니다.
거기에서 철없는 아빠를 만납니다. 그런데 아빠가 말을합니다. 18살의 아빠는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아빠는 후천적 농인이었습니다. 그 시절 아빠는 무모하기까지 도전하며, 티없이 해맑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에게 사랑 받는 너무나도 반짝이는 청춘이었습니다.
은결이는 문득 자신이 아빠를 지키기 위해 1995년으로 온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짐합니다. 반짝이는 아빠의 청춘을 지켜주기로, 아빠의 사고를 막아 아빠의 목소리를 지켜주기로!
은결이는 아빠를 지킬 수 있을까요?
아빠와 동갑이 된 은결이는 누구보다 아빠와 친한 친구가 됩니다.
그 시절 아빠는 첫사랑을 위해 밴드를 만듭니다. 기타를 쳐 본 적도 없는 아빠는 은결이에게 기타를 배우며 조금씩 밴드에 진심으로 스며듭니다. 은결이 덕분에 밴드는 더 풍성해졌습니다.
성공리에 학교 축제도 마치지요.
아빠가 이토록 빛나던 사람이었던가, 은결이는 반짝 반짝 빛나는 아빠를 봅니다.
아빠의 다음 목표는 대학에 들어가 대학가요제에 나가는 것입니다.
아빠는 원래 대학에 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얼른 고등학교를 졸업해 돈을 벌어 할머니를 호강시켜드리는게 목표였죠. 그러나 은결이를 만나고, 밴드를 하며 꿈이 생깁니다.
은결이는 누구보다 간절합니다.
"제발, 이 사람의 꿈을 지켜주세요."
"제발, 이 사람을 지켜주세요"
지금부턴 우리 아빠의 이야기입니다.
사진이 한 장도 없는 아빠를 위해 아빠의 자서전을 썼습니다. 솔직히 아빠를 위한 것은 아닙니다.
나중에 아빠를 잃게 되었을 때, 아빠를 기억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을까봐, 어떻게든 아빠에 대한 기록을 남겨두고 싶은 나를 위한 것입니다.
작년 11월부터 2주에 한번씩 아빠를 만나 아빠의 삶을 들었습니다.
꽤나 충격적이었습니다.
아빠가 평소 '자신은 너무 가난하게 살아서 지금 먹는 밥과 이 삶이 너무 소중하다'라는 말을 자주 하곤 하셨어요. 가난을 겪어보지 않은 저로서는 가난에 대한 감이 오지 않았습니다.
아빠는 생각보다 더 가난했습니다. 집 없이 방랑하던 시절, 산 중턱에 움막집을 짓고 살아야했던 시절, 무책임한 아빠의 아빠 덕분에 14세에 가장이 되어야했습니다. 아빠는 60년 가까이를 '가장'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고작 중학교 1학년 밖에 되지 않았던 아이의 어깨에 짊어진 무게는 얼마나 무거웠을까, 이 아이에겐 어떤 꿈이 있었을까. 할 수만 있다면 그 시절의 아이에게 찾아가고 싶었습니다.
'반짝이는 워터멜론' 속 18세의 아들은 진짜로 18세의 아버지에게 찾아갑니다.
물론 18세의 아빠는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지만, 아들은 아빠를 알아봅니다. 그리고 아빠를 지키기 위해 애씁니다. 둘이 함께 자작곡을 만들고, 18세의 아빠는 아들에게 음성 편지를 남깁니다.
'너가 내 아들이라고 구라쳤지? 그런데 나는 니가 내 아빠 같았어.'
18세의 아빠는 아버지의 사랑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습니다.
아들은 그런 아빠에게 아버지를 느끼게 해주었던 것입니다. 2023년엔 늘 자신을 지켜주던 아빠를 1995년엔 자신이 지켜주었습니다.
눈물나게 부러웠습니다. 나도 14살의 아빠에게 가고 싶었으니까요.
모든 무게를 어깨에 짊어지고 홀로 서울에 상경했던 이 아이는 얼마나 막막했을까요?
'사실, 나는 공부가 되게 하고 싶었어. 초등학교 때는 곧잘 공부도 했었는데.'
14살의 아빠에게 공부를 가르쳐주고 싶었습니다. 똘똘하고 영리했던 아이가 꿈을 포기하지 않도록, 평생 무게에 짓눌려 살지 않도록 지켜주고 싶었습니다.
드라마 속 은결이는 갈 수 있지만, 저는 갈 수 없습니다.
드라마를 보며 대리만족했는지도 모릅니다. 은결이가 '나'라고 생각하면서요.
은결이는 아빠의 사고를 막기 위해 그렇게도 애썼지만, 안타깝게도 아빠의 사고를 막지 못합니다.
심지어 자기를 구하려다 대신 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빠는 더 이상 예전의 아빠가 아닙니다.
깊은 절망의 터널을 성실하게 지났고, 2023년 다시 만난 아빠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여전히 빛나게 살아갑니다.
만일 내가 14살의 아빠에게 갈 수 있었다고 한들, 아빠의 삶을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었을까요?
아빠는 본인에게 주어진 운명과 현실을 아주 성실하게 받아들였는걸요.
일어날 일은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일어납니다. 그것은 우리의 몫이 아니지요.
사랑하는 우리 아빠는 성실하게 자신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렇게 불행하지도 않았어요.
좋은 사람을 만났고, 뜻밖의 행운도 있었지요.
우리는 단편적인 이야기로 듣지만, 삶은 그렇게 단편적이지 않지요.
우리 아빠는 지금 자식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변을 돌아보니, 생각보다 자식의 존경을 받기가 힘들더라고요.
여전히 가장으로 애쓰며 살아가지만, 아빠보다 더 성실한 사람을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비록 14세의 아빠를 꼭 껴안아 주지는 못하지만, 70세의 아빠는 껴안아 줄 수 있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아빠를 껴안고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남은 시간 더 많이 껴안고 사랑하며 살고 싶어요.
14세의 아빠를 위한 몫까지 더욱이요.
14세건, 70세건 살아 있는 한 인생은 언제나 반짝이니까요.
VIVA LA VIDA! 인생이여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