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취향
요즘 취향
커피를 안마신지 1년이 넘었다. 그 전부터도 커피를 자주 마시지는 않았지만, 임신부터 모유수유를 하는 동안 커피는 완전히 끊었다. 임신 전에는 임신 전 아침마다 드립커피를 내려 마시려고 모든 재료를 준비해놓았지만, 임신과 함께 한두번 사용해본 후 찬장에 고이 넣어 두었다.
그 전부터도 커피를 자주 마신건 아니었지만, 어느날 문득 드립커피가 먹고 싶었다. 믹스커피도, 에스프레소 샷을 추출한 커피도 아닌 드립커피여야 했다. 원두를 핸드블랜더로 직접 갈아 필터에 넣고 천천히 물을 내려 마시는 커피가 먹고 싶었다.
그 말인 즉슨, 커피를 마시기 보단 '커피 마시는 행위'가 하고 싶었던거다. 나는 커피 맛을 잘 모른다. 카페에 가도 무조건 '카페라떼'를 먹는다. 우유에 진한 에스프레소 샷을 넣은 커피는 고소한 맛으로 먹는다. 그게 아니면 달달한 음료를 시켜 먹지 아메리카노나 드립커피는 거의 시켜 먹지 않는다.
새벽에 일어나면서 아침 시간이 길다보니, 아침을 조금 더 느리게 보내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한게 드립커피였다. 핸드블랜더에 홀원두를 넣고 천천히 갈고 난 후 깊게 향을 맡는다. 드립커피를 마신다기 보다 향을 마신다는 느낌이 더 강하다. 막 갈린 원두의 향에서는 정의할 수 없는 여러가지 향이 진하게 난다. 향을 깊게 맡으면 정신이 깨어난다.
투박하게 갈린 원두를 종이 필터에 넣고 천천히 뜨거운 물을 내린다. 천천히 커피가 내려지는 걸 보고 난 후 커피를 마신다. 대체로 빵과 곁들어 먹는다. 어쩌면 목막힘 대용으로 마시는 것 같기도 하다. 맛으로 먹는게 아님은 분명하다. 커피가 식으면 쓴 맛이 강해져 늘 커피를 남긴다. 내게 중요한건 커피를 마시는게 아니라, 맡는 것이다.
아기를 키우는 일이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다시 새벽에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전보다 짧아졌긴 하지만, 새벽 루틴을 보내고 나면 시간이 남는 날이 종종 있다. 남는 시간에 다시 커피를 갈기로 했다. 그렇게 1년만에 찬장에 묵혀두었던 핸드블랜더와 필터를 다시 꺼냈다.
매일 반복되는 육아 출근 전, 원두 향을 깊게 마시며 핸드블랜더를 간다. 아기가 깨어나면, 아침을 먹이고 난 후 그제야 커피를 내려 마신다. 아니 향을 맡는다. 그마저도 만지고 싶어하는 아기 눈치를 보느라 잠깐 맡고 치워야 하지만, 그 찰나의 향이 몸 속 곳곳에 들어와 여운을 남긴다.
그렇게 찰나의 기운으로 하루의 활력을 얻는다. 커피 맛도 모르면서 아침마다 커피를 내려 마시는게 허세 같을 수 있지만, 커피 맛을 알아야만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원두를 갈고, 커피를 내리며 집안에 퍼지는 커피 향을 맡을 수 있다는게 내겐 퍽 즐거운 일이다. 나는 향에 민감해서 향수도, 섬유유연제도, 방향제도 쓰지 않는다. 그런 내게 자연적으로 즐길 수 있는 향이 있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매일 아침을 커피 향 덕분에 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다니, 커피를 마시는 것 따윈 중요하지 않지 않나?
조금씩 더 늘려가야겠다. 잠깐의 기분 좋은 일들을, 산책 길에 만나는 들꽃들, 어린 아기가 뛰어가는 모습, 뒷 사람이 나올 때까지 문을 잡아주는 사람, 뭉게구름, 도시에도 기분 좋은 일은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