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었다면, 산책을 해보는거야.

자궁근종 수술 후 독백

by 고요


g62d5c1d48da3f753dca15bee06d04aa39986b250e6a8840e73592d297156f9b131a3bfb99f3.jpg

© AnnieSpratt, 출처 Pixabay


길은 공평하지 않다. 누군가에겐 쉬운 길이, 어떤 이에겐 에움길 같기도 하다.

때론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야하는 일이기도 하고,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한다. 나는 아니겠지라고 생각했다. 조금 돌아갔어도, 금방 따라잡을 거라고 생각보다 빨리 도착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니, 길을 잃었다. 이유모를 곳에 덩그러니 놓여진 것 같다. 조금 더 신중하게 길을 선택했어야 했는데, 천방지축마냥 뛰어다니던 나를 아무리 원망하고, 때리고, 미워해도 바꿀 수가 없다.


어렸을 때, 바닥에 주저 앉아 떼를 쓰던 장면이 기억난다. 밤이었고, 차에서부터 시작한 떼쓰기는 바닥에 주저 앉아서도 계속 되었다. 어떤 행인이 나를 좀 달래려고 했지만, 소용 없었다. 나의 목적은 엄마였으니까. 제발 알아달라고,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떼를 썼다. 그저 무지막지한 떼쓰기 만이 나를 구원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은 엄마가 져주고, 어느날은 내가 적당히 포기도 하면서 떼쓰기를 통해 수많은 일을 해결해갔다.


아무리 떼를 써도 달라지는 일이 없다는 걸, 조금 더 일찍 알았다면 좀 달랐을까.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없지만, 다시 처음부터 걷게 해달라고, 조금만 더 쉬운 길을 달라고 아무리 떼를 써도 달라지지 않는다. 떼쓰기가 목적을 잃었기 때문인걸까, 누구에게도 토해낼 수 없는 무기력한 울음 앞에 점점 자기 이야기를 하는 법을 잊게 된다. 대신 글을 쓰는 법을 배웠다.


전신마취 후 가래를 절대 삼켜서는 안된다고 한다. 나는 가래를 뱉어본 적이 없다. '캬악 퉤'하는 무례한 소리가 듣기가 싫어서. 자신에게서 나는 소리도 듣기 싫었다. 가래를 자꾸만 삼키니, 몸에서 열이 난다. 어떤 고통은 가래를 닮아서 삼킬수록 열이난다. 가래를 뱉는 연습이 나에겐 고통을 뱉어내는 것 같다. 처음엔 침을 퉤퉤 뱉어내다, 다음엔 작은 가래를 뱉어낸다. 그게 꼭 고통처럼 느껴져, 더 큰 가래를 뱉고 싶어진다. 글을 쓰는게 가래를 뱉어내는 일이었다. 처음엔 침을 뱉듯 정제되지 않은 글들을 퉤퉤 뱉어내다, 점점 덩어리를 갖춘 글이 되어갔다.


g8d95d8095dd87d52c8813a09361ba1e192f6540b36fdcb9d64558755ccbfa1cb8bd7c09359b.jpg

© sasint, 출처 Pixabay


자궁근종 수술을 마쳤다. 쉽게 생각했다. 아니, 쉽게 생각해야했다. 수술을 할 이유가 전혀 없다며 오히려 수술을 말리는 의사에게 수술의 이유를 설명해야했으니. 하지 않아야 하는 수많가지 이유가 있지만, 어떤 일은 그래도 걸어가야하는 길이 있다. 수술이 내겐 그랬다. 유산 이후 끝나지 않는 고통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이 감사했다. 그리고 다독였다. 금방 지나갈거라고, 병원에서 잠시 쉬자고.



한두시간이면 끝날 것이라는 수술은 4-5시간이 걸렸고, 너무 많은 피를 쏟아냈다. 수술 첫날 저녁 처음 느껴보는 고통에 과호흡과 경련이 왔고, 간호사와 의사는 바빴다.

'이대로 죽는 다면 어떨까'

'아이를 너무 갖고 싶어서 필요하지도 않은 근종수술을 하다 죽은 불쌍한 여자'로 기억될까?

아이를 너무 갖고 싶다는 마음보단, 끝나지 않는 고통 앞에 무엇이든 하고 싶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무엇보다 불쌍한 여자가 되는 건 죽는 것보다 싫다. 억지로 호흡을 하고, 수면 아래로 내려가는 평온한 나의 모습을 자꾸만 끌어 올린다. 머리끄댕이를 잡고서라도 올라와라.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수혈을 했다. 나에게 피를 준 이 사람의 삶은 어땠을까. 할 수 있는게 누워있는 것 뿐이니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상상의 이야기 속으로 끌고간다.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을까. 나의 내비게이션은 고장나있다. 어디에 와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목적지를 분명 입력했는데, 운전을 하다보니 길을 잃었다. 남들은 벌써 목적지에 도착해 있고, 어떤 이는 저만치 앞서 가있는데, 나만 여기서 뱅뱅 돌고 있는 기분이다. 길을 잃은 막막함에 벌벌 떨며 주저하다가, 생각한다.

'그래도 가야하는구나. 멈춰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게 없구나. '


6570261_uploaded_7464443.jpg

© MALI, 출처 OGQ



에움길로 한참을 돌아가더라도 계속 가야한다. 대신 가다보면 노을을 볼 수는 있겠지. 길가에 핀 들풀의 이야기는 들을 수 있겠지. 노을보다, 들풀의 이야기보다 목적지에 도착하는게 더 좋다는 것 쯤은 안다. 그래도, 남들이 듣지 못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겠지. 돌아가는 길에 생각지도 못했던 수없이 많은 만남이 있을 수 있겠지.


우는 것으로 많은 일을 해결했던 그날의 나는 이제 없다. 이젠 커야지. 어른이 되어야지. 되어가야지. 아무리 울어도 현실은 달라지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길을 가는 수밖에 없다고. 대신 가다가 노을이 보일 거라고, 들풀도 너에게 말을 걸어 올거라고. 이왕 가는 길. 산책처럼 걷자고, 하염없이 걷다보면 지치니까, 걷다가 풀썩 주저앉아 아이처럼 즐기고 사랑해보자고. 어쩔 줄 모르는 현실을 그냥 사랑해보자고. 그러다보면 어느새 울음이 그치고, 웃고 있을거야.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