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기 빛', 폴 틸리히
우리가 큰 고통과 불안 속에 있을 때 은총은 갑자기 우리를 찾아옵니다.
은총은 우리가 허무하고 공허한 삶의 검은 골짜기 속을 헤매일 때
갑자기 찾아옵니다. 우리가 사랑했었던 혹은 우리가 그로부터 소외되었던
다른 사람의 삶을 깨뜨렸다고 느낌으로써 우리들 사이의 거리가 점점 더 멀어져 갈 때 은총은 갑자기 우리를 찾아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존재, 우리의 무관심, 우리의 악함, 우리의 침착과
방향을 잃어버림 등에 대한 혐오로 더 이상 우리를 참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은총은 갑자기 우리를 찾아옵니다.
몇 십 년이나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오래된 억압이 우리 자신 속에 군림할 때
실망이 모든 기쁨과 용기를 앗아갈 때
은총은 갑자기 우리를 찾아옵니다.
간혹 그런 순간에 한줄기 빛이 우리의 어둠을 헤치고 들어옵니다.
'한줄기 빛', 폴 틸리히
조던 피터슨은 말했다. '인생은 혼돈과 질서의 경계에 있을 때, 가장 이상적'이라고.
혼돈과 질서의 경계에 있을 때 이상적이라고? 질서를 세웠을 때가 아니고?
지나친 혼돈 속에 있을 때 사람은 두려움을 느낀다. 어느 것도 정돈되지 않은 무질서의 상황, 보장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혼돈의 세계, 불안이다. 반대로 완전한 질서 속에 있을 때는? 인간을 답답하게 한다. 분, 초 단위로 세워진 계획표를 보면 설렘보다 답답함이 먼저 느껴지는 것처럼. 완전한 질서는 다른 여지, 예상치 못한 상황을 거부하게 된다.
생각해 보면, 완전한 질서가 하나 있긴 하다. 하나님이 세운 '에덴동산'. 그러나 에덴동산에도 뱀이 살았고, 태초의 악이 들어왔다. 아무리 완전한 질서를 세운다고 한들, 혼돈은 들어오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그런 것이라면 혼돈은 태초의 지배자가 확실하다. 즉, 혼돈은 거절하고 거부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제든 우리 삶에 찾아올 수 있다는 말이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 혼돈 속에서 완전한 질서를 세우려 했던 사람. 강하게 부딪힐수록 더 높이 튀어 오르는 탱탱볼처럼, 강하게 휘몰아치는 혼돈 속에서 그는 더 강해지기를 선택했다. 더욱 강방적으로 물고기를 모았다. 폭발물을 설치해 물고기를 튀어 오르게 하고, 산호를 두들기고, 작은 틈새에 독약을 풀어 '숨어 있는 작은' 물고기까지 모조리 밖으로 꺼냈다. 그리고 질서를 세워갔다. 고통스러운 현실 앞에서(아내의 죽음, 자녀의 죽음, 벼락과 지진으로 인해 연구실의 표본들이 대혼돈에 들어간 사실 등) 그는 주저앉아 울지 않았다. 더 당당한 걸음으로 걸어갔다. 그는 정말, 더 강해진 것일까?
그 걸음의 결과는? '숨어 있는 작은 것들'을 사랑했던 한 소년은, 그것이 바로 열등한 생물이라고 주장하는 우생학자가 된다. 당당한 걸음의 결과가 우생학이라니, 그렇다면 '강한 게' 과연 맞는 것일까? 강해져야 하는 것일까?
어릴 때 주저앉아 울던 기억이 난다. 떼쓰기. 어른이 되어서도 떼를 쓴다면, 모두가 눈살을 찌푸릴 것이다. 더 이상의 떼쓰기는 소용없다. 그렇다고, 울지 않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울지 않는 게 강하다는 말은 아니다. 아니, 강하다는 말의 의미가 조금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고통스러워하고, 울고, 손과 발을 벌벌 떨면서도 다시 일어나는 것. 끊임없이 찾아오는 혼돈 앞에서 서두르지 않고, 인내하며 다시 한 걸음을 걸어가는 것. 그것이 강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런 것이라면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강한 게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고통과 아픔을 마주할 줄 모르는 아주 나약한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강한 건 아프지 않은 게 아니라, 아프지만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몇 번이고 다시 세운 질서가 무너져 다신 못하겠다며 주저앉아 울지만, 다 울고는 다시 일어나 한 걸음을 걸어가는 것이다.
나는 그걸 은총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울면서 내딛는 한 걸음이 나는 은총이라고 생각한다. '큰 고통과 불안 속에 있을 때, 허무하고 공허한 삶의 검은 골짜기 속을 헤매일 때, 우리 사이의 거리가 점점 더 멀어져 갈 때, 자신에 대한 혐오로 더 이상 우리를 참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오래된 억압이 우리 자신 속에 군림할 때, 실망이 모든 기쁨과 용서를 앗아갈 때'
은총은 갑자기 우리를 찾아옵니다.
은총은 갑자기 우리를 찾아온다. 눈물을 닦고 한 걸음을 걷는 것, 떨리는 다리를 곧추 세우는 것, 그것이 은총이다. 거대한 혼돈 앞에서 벽돌 하나 세우는 게 은총이다. 내 고통과 현실을 직면하고도 걷는 한 걸음만큼 강한 것은 없다. 그것은 단단한 쇠막대기보다 더 강한 부드러운 천조각일지도 모른다. 어떤 형태의 혼돈이 찾아와도 그 형태에 몸을 맞추며 감싸 안을 수 있는, 강함. 혼돈은 언제든 우리 삶을 찾아와 겨우 세운 질서를 무너뜨리고, 흔들어 놓을 것이다. 서두르지 않고, 인내하며 다시 질서를 세울 것이다. 은총은 갑자기 우리를 찾아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