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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행복을 미워하지만 원해.

<슬픔이여 안녕>을 읽고

by 이시현

프랑수아즈 사강이 18살에 쓴 책인 <슬픔이여 안녕> (1954) 은 세속적인 아름다움과 쾌락에 파묻힌 채 사는 한 소녀가 이지적인 세계에 매료와 강압을 느끼고 그 양가적인 감정들 사이 소녀가 내리는 어떠한 선택을, 그리고 몰아치는 갖가지 감정들을 섬세하게 풀어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을 읽으며 슬픔보다는 오히려 행복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인간은 모두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나는 그 행복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데, 크게 묶자면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생각한다. 책에 나온 주인공인 세실이 평생을 안고 살아가던 가장 원초적인 쾌락적 행복과 지식을 깨우치는 데에서 오는 조금은 미묘하고 복잡한 행복. 전자를 품은 사람들은 대체로 삶의 기반이 기쁨이다. 힘들고 아픈 일을 겪을 때면 어디서든 쉽게 찾을 수 있는 행복에 몸을 맡기면 쉽게 고통을 잊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후자를 원하는 사람들은 다르다. 행복을 찾는 과정 자체부터가 고단하다. 지식을 찾는다는 것은 자신의 무지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한계를 이겨내는 것이다. 즉, 삶의 기반이 고독과 자책, 슬픔과 짜증이라는 말이다. 이 사람들은 지식을 발견하고 발전한 본인을 되돌아볼 때 엄청난 쾌감을 느낀다.


위의 두 가지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삶의 목적에도 차이가 있다. 행복 그 자체가 목적일 수도 있고, 진전에서 오는, 고통으로 점철된 행복이 목적이 될 수도 있다. 첫 번째 행복은 가장 순수한 종류의 달큼한 행복이다. 그 어떠한 화합물도 섞여 들어가지 않은 행복 말이다. 그들은 삶을 진심으로 즐길 줄 알며 자유롭다. 반면, 두 번째 행복은 다소 때가 묻은 행복이다. 첫 번째 행복과는 다르게 부정적인 감정들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그런 행복 말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 행복이 이상적인 행복이 아닌가? 나는 전혀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뒤틀리지 않다는 조건하에, 부정적 감정이 묻은 행복은 더 깊고 진한, 잘 숙성된 와인 같은 풍미를 선사한다. 입안에서 천천히 음미하면 할수록 다양한 향기를 내어 황홀경을 맛보게 해주는 그런 행복 말이다.


삶에서 어떠한 행복을 추구하든 우리들은, 그리고 나는, 서로 다른 행복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을 존중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만이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서부터 탈피하여 껍데기에서부터 날아올라, 더 먼 곳에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해 주기 때문이다. 프랑수아즈 사강은 분명 모두를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녀는 이 책에서 첫 번째 행복을 추구하는 세실부터, 안으로 인해 두 번째 행복을 원하게 되면서도 그 행복을 피하고 싶어 하는 세실 또한 완벽하게 묘사했다. 세실은 엘자의 행복을 탐닉했고, 동시에 혐오했다. 세실은 안의 행복을 원하고, 그리고 그 행복을 동시에 증오했다. 사강은 첫 번째 행복을 상징하는 엘자와 두 번째 행복을 상징하는 안을 이야기했고, 안에 의한 세실의 내적 성장에서 오는 엘자에 대한 한심하고 안타까운 마음들과 안에게 느끼는 존경과 불안의 마음들을 전달했다. <슬픔이여 안녕>은 사강이 존중으로 행복의 근원을 파악하여 날아오라 멀리에서 삶을 포착한 결과이다. 그녀가 지닌 천부적인 감성이라는 재능이 18살이라는 이른 나이부터 그것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프랑수아즈 사강

나와는 다른 사람에 대한 깊은 관심을 두고, 끊임없는 통찰은 우리가 삶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혀주고, 조금 더 나은 태도를 가지게 해 준다. 안타깝게도 나는 사강과 같은 재능을 타고나지 못했다. 때문에 사강처럼 본질을 깨달을 수 있는 그날까지,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리든 나는 노력할 것이다. 어떠한 행복을 추구하든지 간에 우리는 각자의 세상 속에서 각자의 속도로 끝없이 커갈 테니까.






영화 <Bonjour Tristesse (슬픔이여 안녕)>, directed by Otto Preminger (오토 프레민저),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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