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나서 악보를 '북' 찢어버렸지 뭐야
언제부터인지 기억도 안나는데, 애들한테 언젠가부터 내 이야기를 자주 해주었다. 엄마가 어렸을 때 이모랑 과자상자에서 외할머니 몰래 과자 꺼내먹었던 이야기, 엄마가 이모랑 집에서 문 가지고 장난치다가 이모가 문에 손이 끼어서 엄마가 자진해서 엉엉 울며 무릎꿇고 손 들고 있던 이야기 등 주로 어릴때의 흑역사들을 들려준다. 들려줄때마다 초집중하며 잘 듣는다. 엄마가 어릴때 할머니한테 혼났던 이야기들이 그렇게도 재밌나보다.
그 중에서도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엄마의 흑역사는 엄마가 책을 북 찢었던 이야기다. 이 얘기를 하게 된 계기가 확실히 있다. 아이들이 한창 본인들 그림책을 북북 찢어대서 처음엔 '발달상 그런거겠지' 라고 이해를 해보려 했지만 평소 책에 뭔 짓을 잘 안하는 나는 그런걸 보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애들을 혼내보기도 하다가, 책에 있는 친구들이 아프겠다, 하며 감정에 호소해보기도 하다가.. 정말 별 짓을 다해본 뒤 마지막 카드로 꺼낸게 바로 그 내가 어릴적 책을 북 찢었던 이야기다.
어릴 적 나는 학원을 딱 두 군데 다녔다. 독서학원이랑 피아노학원. 독서학원은 책이 정말정말 많아서 행복했고, 피아노학원은 진도 도장깨기가 너무 재미있었다. 주5일을 다녔고 진도도 주5일 다 나갔다.
초등학교 2학년 새학기부터 피아노학원엘 다니게 됐다. 다른 친구들은 초등학교 1학년때 이미 피아노를 다녔는데 나는 아무런 학원도 다니지 않고 학교 숙제하고 가방 챙기고 집에서 책 읽고 만화만 보며 지냈다. 그러다 2학년이 되니 정말 피아노라는게 치고 싶어져서 부모님을 계속 졸라 피아노학원엘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대학 다닐 때 엄마랑 얘기하다 알게 된 건데, 엄마는 그 무렵 날 피아노 말고 미술학원에 보낼 생각이었단다. 엄마는 위로 언니들과 오빠들이 많은 집 막내이신데, 딸조카들이 한명도 빠짐없이 미술을 전공해서 나랑 내 여동생도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 알고 그러겠노라 생각하셨단다. 그런데 피아노학원엘 보내달라고 조르니 얼마나 다니나 보자, 그만두면 미술학원에 보내야지.. 계획(?)하고 계셨다 하셨다.
그런데 초등학교 2학년 3월 학기부터 시작된 피아노가 그 해 9월 학기엔 체르니 100 시작, 그 다음해에 바로 체르니 30, 3학년 겨울에 체르니 40 시작과 동시에 소품들부터 각종 소나타까지 연습할 수 있게 되고, 원장님이 재밌으셨는지 콩쿨을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셨다.
진도를 빨리 나갈 수 있었던 건 의외로 간단했다. 나랑 또래였던 남자애가 나보다 진도가 좀 더 빨랐는데 걔가 옆방에서 치고 있는 걸 가만히 듣고 그 페이지를 찾아서 치면 정말 금방 칠 수 있었다. 거기다 원장님께서는 레슨때 항상 시범연주를 보여주셨는데 이게 나에게는 엄청난 모델링이 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한 번 들으면 곧장 따라치기가 너무 수월했다. 나중에 이게 절대음감이어서 그렇다는걸 알게 되었다.
피아노는 정말이지 너무 재밌었다. 그 당시 다른 친구들 진도카드표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냅다 색칠부터 하게 만드는 체르니와 하농도 나한테는 너무 재밌었다. 특히 체르니는 원장님이 시범연주 보여주실 때 늘 원템포로 보여주셨는데 진짜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멋있었다. 레슨 시간에 원장님의 연주를 보며 '꼭 이렇게 쳐서 넘어가겠다' 생각했다. 하농은 나중에 열두키 스케일을 치면서 충격적이었던게, 왠지 조 마다 색이 다른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레슨 시간에 원장님께 이걸 어린이의 시각으로 열심히 설명했는데, 그 날 원장님께서 엄마에게 전화를 하셨다고 했다. 예중준비를 하는게 어떨까요?
엄마는 미술도 아니고 음악으로 어떻게 서포트 해줘야 할지 너무 막막해서 우선 생각해본다고만 말씀하셨다고 했다. 그리고 그건 금방 없는 얘기가 되었고, 난 그냥 초등학교 졸업 전까지 피아노학원을 열심히 다니는 애가 되었다.
중고등학교때는 합창대회때마다 우리반이랑 다른반 두 군데는 더 돌면서 반주봇으로 열심히였다. 음악시간에 노래 반주도 어쩌다보니 맡아서 하게 되고, 가창 실기시험이 있으면 그 전에 내가 녹음을 몇 곡 해서 음악선생님께서 그걸로 가창시험을 보시기도 했다.
고등학교 2학년때 음악선생님은 날 앉혀놓으시고는 너는 작곡을 해보는 게 어떻겠니? 하셨다. 작곡? 피아노 치는 걸 좋아하면 작곡을 하는거예요? 했더니 청음이랑 피아노가 괜찮으면 지금 시작해도 늦지 않아, 하셨다.
그때부터 작곡과 준비를 조금씩 해나갔다. 많은 작곡가들의 곡을 듣고 악보를 보다보니 너무 경이로웠다. 그전까진 '좋은 곡'이란 그냥 원래 있는 곡이라고 생각, 아니 생각조차 안했는데 악보를 뜯어보니 '이걸 사람이 만들었다고? 이런 생각을 했다고? 아니 어떻게?' 싶었다. 화성학은 너무 재밌었고 작곡도 내가 생각했던 소리를 악보로 만들어서 그걸 피아노로 다시 쳤을때 그 싱크로율이 거의 일치하면 진짜 미치게 좋았다. 피아노 치는것과 작곡은 너무 다르지만 또 둘 다 너무 재밌었다.
그렇게 나는 음대생이 되었다.
여기까지 보면 그냥 피아노에 재능이 있던 애가 음대 간 이야기인가 싶지만 나에게도 피아노학원 원장님께 눈물 쏙 빠지도록 혼쭐났던 스토리가 있다.
<엘리제를 위하여>를 연습하는데, A'로 넘어가기 직전 반음스케일 하강 부분이 있다. 그 부분을 아무리 연습해도 매끄럽게 되지가 않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뭔가 준비가 덜 된채로 원장님께 레슨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화가 났던 나는 아니나다를까 "거기 다시 한 번 해봐" 라는 원장님 말씀을 한 세번째 들었을 때 나도 모르게 그 하강스케일 부분의 피아노 악보를 '북' 찢어버렸다. 원장님은 그 즉시 나를 엄청나게 혼내셨고, 나는 엉엉 울면서 집에 갔다. 엄마에게 이실직고 하고 또 무지하게 혼이 났다. 그렇게 버릇없이 굴거면 학원 다 때려치라는 얘기까지 들었다. 그렇지만 학원은 계속 쭉 다녔다. 그 시대에 인터넷이 활성화되어있고 스마트폰이 흔했으면 아마 정말로 학원을 때려쳤을테지만 다행히도 학원 빼면 재밌는 것들이 없어서 때려치진 않았다.
아이들에게 이런 엄마의 창피한 이야기를 해주면 너무나 좋아한다. 원장님이 뭐라고 했어? 할머니는 뭐라고 했어? 책 테이프로 붙여줬어? 등등 질문도 참 많다.
내가 초등학교때 피아노학원 말고 미술학원을 다녔으면 나중이 미대에 갔었으려나? 모르긴 몰라도 아니었을 것 같다. 만약 미대에 갔어도 취미로 피아노를 치다가 그대로 음악에 빠져버리지 않았을까.
지금 33개월을 목전에 둔 우리 애들은 아무 생각이 없다.
이게 좋다. 자기들 좋은 건 조금 늦게 만나도 결국 이어진다. 나랑 음악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애들도 본인들의 평생 친구를 언제 어디서라도 운명처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는 와중에 책을 북 찢는 일 같은 게 여러번 반복되더라도 괜찮다.
이왕이면 '북' 찢지 말고 '박박' 찢어봤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