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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청지기 Apr 28. 2023

백업은 '지금'보다 '내일'을 위한 것입니다.

"컴퓨터가 안 돼요!!!"


아주 먼 옛날(?)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1995년 2월 6일 오후 5시 38분이었습니다. 갑자기 컴퓨터가 멈춰버렸습니다. 화면이 정지했다는 표현이 맞겠지요. 컴퓨터를 사용하다 보면 가끔 원인불명으로 이런 경우가 생겨서 리부팅(다시 껐다가 켬)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영업부, 경리과 등 각 부서 직원들의 문의전화가 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출고전표를 입력하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안 돼요!”

“지금 자료확인 중인데 왜 이러죠?”

“지금 결산을 해야 하는데 좀 도와주세요.”.....


전 제가 쓰던 것만 문제가 생긴 줄 알았는데 LAN(근거리통신망)에 접속해서 사용하던 모든 컴퓨터가 멈춰버린 것이었어요.


“아이쿠! 큰일 났네. 귀찮아서 백업(자료가 손상될 것을 예상하여

다른 곳에 보관하여 두는 것)도 받아두지 않았는데....”


제 얼굴은 금세 사색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전산관리자로서 당황하면 안 되지요.


“확인해서 조치를 취한 후 연락 드리겠습니다”


라고 말씀드린 후 제일 먼저 파일서버(LAN의 중앙 컴퓨터)를 점검했습니다. 사태가 심각했습니다. 특별한 원인도 없이 파일서버가 멈춰버렸더군요. 잠시 최선을 다해 작동시켜 보려고 애썼지만 결국 실패했지요. 할 수 없이 이후의 결과를 주님께 맡기고 파일서버의 전원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잠시 파일서버에 손을 얹고 기도한 후 다시 전원을 넣었습니다. ‘웅-’하면서 힘차게 작동이 되더군요. 그런데, 화면에 파일(자료)들의 에러 메시지(손상내역)가 스크롤(화면에 나타나 위로 밀려 올라가는 것) 되며 나타났습니다.


“설마... 인덱스 파일만 깨졌겠지....”


라며 파일 하나하나씩 점검하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도 현재 작업 중이던 2월 자료 외에는 이상이 없었습니다. 문제는 2월 자료였습니다. 지금까지 야근하며 각 부서에서 작업했던 네트워크 상의 자료들을 모두 포기한다면 지금까지 작업했던 내용을 똑같이 다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매일 백업을 해두었더라면 하루만 포기해도 되는데...”


미리 자료를 보관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마음깊이 밀려왔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기에 얼굴이 잿빛이 되어 컴퓨터 앞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열심히 자판을 두들기고 있는 긴장된 이 순간에도 각 부서 직원들은 계속 자신들의 필요만 요청해 왔습니다.


“지금 출고시켜야 돼요.”

“지금 회전전표를 쳐야 된단 말이에요.”

“지금 입고자료가 이상해요. 좀 봐주세요.”


짜증이 났지요. 하지만 화낼 수 있나요.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집에서도 전화가 온 겁니다. 이 바쁜 통에. 아내에게 짜증을 냈지요. 화풀이를 한 겁니다. 그런데 분위기를 느꼈는지 빨리 전화를 끊더라고요. 한참 동안 컴퓨터 모니터를 쳐다보다가 불현듯 스치는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 한 번 해보자!”


드디어 6시 20분경에 2월 2개 브랜드 판매관리자료를 모두 복구했습니다. 물론 약간의 생채기를 입은 파일도 있었지만 요. 파일 복구가 끝난 후 당장 광디스크(고밀도 자료보관장치)에다 1994년도와 올해 자료를 몽땅 백업받았습니다. 잠시 수고하면 만에 하나 자료가 손상을 입어도 큰 피해를 입지 않건만 이 ‘잠시’를 못했기 때문에 이 날도 큰일 날 뻔했던 겁니다.


컴퓨터를 사용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백업(자료보관)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당장 하지 않으면 낭패를 당하는 급한 일은 아니지요. 컴퓨터가 고장 나서 자료가 손상을 당하지만 않는다면 백업은 귀찮은 일일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잠시 후의 일을 모르는 우리이기에 항상 대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만약 철야하면서 열심히 작업한 논문 자료가 복구할 수 없을 만큼 손상을 입었다고 합시다. 시간의 억울함은 물론이고, 원문이 없다면 소중한 지적재산까지도 잃어버리게 되는 것 아니겠어요.


저는 장애인이기에 학교 다닐 때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백업을 많이 했습니다. 지금은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많이 개선됐지만 1980년대와 1990년대만 해도 장애인을 향한 사회의 반응은 냉랭했지요. 장애인의 진학, 취업, 결혼은 일간신문의 토픽 감이었습니다. 사법고시나 행정고시 등 소위 고시를 합격할만한 수재가 아닌 평범한 장애인은 꽉 막힌 현실의 벽 앞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장사나 사업도 돈이 있어야 하지요. 배우면 뭣합니까?”


많은 장애인이 저보고 그럽디다. 그러나, 현실에 안주하면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준비하면 언젠가 요긴하게 쓰일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며 열심히 백업(노력)했습니다. 회계학을 공부했는데 컴퓨터를 부전공으로 공부했습니다. 당시 장학금을 받으려면 컴퓨터 과목보다는 교양과목을 신청했어야 했지요. 다른 과목은 A 또는 B+ 이상인데 컴퓨터 과목만 C였거든요. 결국 부전공 신청한 친구들 30여 명 중 졸업 땐 2명만 남더라고요. 당장은 도움도 되지 않았고, 별반 써먹을 것 같지도 않았지만 내일을 위해 긴급한 것(장학금)보단 중요한 것(컴퓨터 공부)을 택해 백업(공부) 한 것이 30년 넘게 전산실에서 일할 수 있었던 비결이 아니었을까요?


이제 내년이면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눈높이로 보면 회사에서 만년 과장으로 33년 직장생활을 마감하게 된 것이 안쓰러울 수 있겠지만 한 곳에서 33년을 한결 같이 애쓰고 노력해서 완주한 스스로를 나는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답니다.


나는 지금도 열심히 백업 중입니다. 금방 꺼질 것 같은 나약한 촛불처럼 불안 불안한 몸이지만 하나님의 때가 되어 이 세상을 떠나는 그날을 알 수 없기에 은퇴 후 제2의 인생을 위해 투자공부, 언어 공부는 물론 온라인 소통을 위한 SNS도 열심히 하고 있지요.  


당장 사용하지 않는다고, 언제 사용될지도 모르는 일에 시간 낭비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내일을 위해 준비하는 사람만이  인생의 기회가 왔을 때 붙잡을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백업은 ‘지금’보다 ‘내일’을 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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