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졸 취업난이 극심했던 1990년, 나는 3차례 면접을 거쳐 서울에 소재한 패션 회사 전산실에 취업했다. 당시 회사는 신입사원 교육을 위해 교육팀을 새로 꾸리고 교육 프로그램을 새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교육 대상자가 우리 동기 49명이었다.
당시 교육 프로그램은 하루 12시간으로 빈틈없이 이뤄져 있었다. 3개월 동안 오전 6시까지 출근해서 오후 6시 퇴근할 때까지 강의와 워크숍, 청소까지 쉴 틈이 없었다.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 서울에 온 나는 회사 근처에서 하숙생활을 했다. 교육이 마무리될 무렵 일주일간 합숙 교육 기간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합숙 기간 중에는 육체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행군이 있었고, UKT라고 조별로 준비한 발표의 시간도 있었다.
끝날 것 같지 않던 긴 3개월의 신입사원교육이 끝나고 우리는 각각 다른 사업부와 부서로 배치되어 헤어졌다. 그리고 32년이 흘렀다. 회사에서 임원으로 승진하고 퇴사한 분, 일찍 퇴사해서 개인사업하며 CEO가 된 분, 큰 음식점 사장님,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분, 퇴사했다가 재입사해서 다니는 분, 그리고 나처럼 끝까지 평사원으로 버티는 분 등 사는 모습들이 모두 달라졌다.
아직도 바쁘게 일하는 우리들은 32년이 지난 지금도 동기들 얼굴 보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한달음에 달려온다. 먼저 세상을 떠나 고인이 된 분과 해외에 거주해서 참석이 어려운 분, 연락처가 없는 몇 분을 제외하고는 우리 모두는 정기 모임을 기대한다.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
바로 신입사원 교육 때 우리들의 첫 반장으로 뽑혔던 H씨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분은 브랜드 본부장까지 역임하고 퇴사를 했다. 그리고 개인 사업체를 꾸려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그는 바쁜 가운데서도 퇴사 이후 동기들의 연락처를 모아서 이때까지 한 사람 한 사람 연락하고 모임을 이끌고 있다. 한두 해는 그럴 수 있다. 그러나 30년을 한결 같이 이렇게 수고할 수 있을까? 처음에는 호응도가 크지 않았다. 다들 삶에 바빴기 때문이다. 연말 그 바쁜 시기에 예약한 식당에 혼자 앉아 오기로 한 동기들을 홀로 기다리다가 돌아간 적도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동기 사랑은 멈추지 않았다.
이제 우리 동기들은 다 안다.
그가 얼마나 진심으로 동기들을 사랑하고 섬기는지.
세상의 많은 모임들은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 경우가 많다. 단순한 친목 모임이라고 하더라도 사회에서 생성된 모임이라면 더욱 그렇다. 자신의 인맥을 넓히고 자신의 사업에 도움을 얻기 위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바로 손절하고 끊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시대다.
우리 동기 모임은 어떠한가? 한 날 한 시에 같은 회사에 입사했다는 것 외에는 출신 지역도 다르고, 학벌도 다르고, 성별도 다르다. 32년이 흐르면서 동등했던 사회적 지위조차 각자 달라졌다. 부의 수준도, 사회적 위치 등 삶의 격차가 벌어졌다. 하지만 누구 하나 그 차이를 모임에서 느끼지 않는다. 서로를 챙겨주고 궁금해한다. 각자의 형편과 사정을 함께 나눈다. 그리고 함께 기뻐하고 슬퍼한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바로 리더 H씨 덕분이다. 작은 조직이라도 그 조직이 유지되려면 누군가의 희생이 없이는 결코 지속되기 어렵다. 사람들을 좋아하는 H씨는 나이가 많은 동기는 '형'으로 적은 동기에게는 '씨'로 호칭하며 함께 늙어가자고 늘 말한다. 바쁜 세상에서 우리 모임을 위해 1년에 이틀을 비워 두라고 말한다. 우리의 입사일이 11월 1일 이므로 11월 1일, 그리고 기수가 7기 1차니까 7월 1일을 말이다. 물론 이것은 상징적인 날이고 실제로는 상황에 따라서 만남의 날은 달라진다. H씨는 동기들에게 연락할 때 편리한 단톡 방을 만들지 않는다. 수고스럽더라도 일일이 한 명 한 명 개인적으로 문자를 쓴다. 우리들에게 부담을 최대한 주지 않기 위함이다. 참 고마운 사람이다.
나는 이동이 자유롭지 않고 늘 산소기를 가지고 다녀야 하는 어려움이 있어서 항상 참석하지 못하는 죄송함이 있지만 가능한 참석 하려고 애쓰고 있다. 참석 여부와 상관없이 챙겨주는 H씨의 마음이 고마와서이고 그 자리에 함께한 동기들을 만나면 26세 청년으로 돌아간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